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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영 Mar 18. 2021

말죽거리 잔혹사

셋넷 영화이야기52 : 삶의 이유


홀로 걸으라 그대 행복한 이여!


시커먼 교복과 삐딱한 모자, 숨 막히는 교실과 난무하는 교사의 폭력, 수컷들의 영역다툼과 어쩌지 못하는 성적 욕망, 닫힌 교문과 열린 담벼락, 단발머리 여학생과 분식집 아줌마. 다시금 영화 속으로 빠져들며 가슴이 저려온다. 난 그때 그 시절 말죽거리 고등학교에 있었다. 영화를 만든 감독은 단짝 친구였다.    

 

코로나가 덮치기 전 우연히 방문했던 입시학원 풍경이 떠올랐다. 밤 10시가 훨씬 넘은 시간인데도 학원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중학교 3학년 학생들이 뒤엉켜 바글거리고 있었다. 자정 너머까지 수업을 듣고 겨우 집으로 돌아간단다. 그 시각까지 왜 거기에서 영문 모를 공부를 해야 하는지 되묻는 아이들이 몇이나 될까. 자신들이 가는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고 있을까? 자신들이 살고 싶은 삶의 모습을 잠시라도 상상해볼까?    

 

영화 속 낡은 시간 칠흑 같은 학교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냈던 나와 고삘이들도 자신들의 꿈을 묻지 않았고 가고 싶은 나라를 그리워하지 않았다. 벌거벗은 금발 여인의 사진을 몰래 훔쳐보며 군복 입은 교련교사의 몽둥이를 잊고자 했다. 이소룡의 기괴한 몸짓 발짓으로 비명을 지르며 발광을 하면서 막막했던 다음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애써 숨겼다. 진추하의 안개 같은 노래에 취해 자위를 하면서 교복 입은 여학생 주위를 배회했다. 말죽거리 외딴 학교를 채웠던 일그러진 풍경은 온 땅을 피로 물들이고 공포의 도가니로 몰고 간 80년대 초 절망의 시대 잔혹한 풍경이었다.            


우울했던 풍경을 떠올리며 왜 그리도 가슴이 저렸을까. 어쩌면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어떤 생의 다리 앞에서 마주친 애틋한 그리움이었을까. 희미해진 첫사랑이 불쑥 찾아와 다정하게 멱살을 흔들 때 느끼는 허무함이었나. 사랑하는 이의 복수를 잔인하게 마무리하고 무표정하게 걷던 주인공(영화 악마를 보았다)이 갑자기 오열하며 눈물을 쏟았던 이유를 가슴에 가만히 묻어둔 채, 오십견에 시달리는 말죽거리 옛날 학생에게 묻는다. '네 삶의 질주가 향하는 곳이 어딘지 아니?'     



* 셋넷학교 17년 대안교육 활동을 기록한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출판사들의 외면으로 시중에는 없습니다. 010-6334-2890(박상영)이나 댓글로 주문해주시면 보내드리겠습니다. <윗마을 학생과 아랫동네 선생> 14,000원(배송비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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