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상영 Jun 30. 2021

ROOTLESS.. 맨체스터

셋넷 여행 이야기 5 : 마음의 상처


풀잎의 끈질긴 생명력으로...


7월 30일 수요일     

지우(가명)를 기차역에서 만났다. 며칠 전 헤어졌던 사이처럼 반갑게 껴안았다. 녀석은 애써 담담해했지만 촛불처럼 불안한 이방인의 처지를 숨기지 못했다. 오랜만에 본 녀석의 뒷모습은 허전했다. 얼마 전 영국 정부에서 한국을 거쳐 온 탈북난민 신청자들에 대한 신분조회를 한국 정부에 요청했다. 어쩌면 탈남(脫南) 시도가 해프닝으로 끝날 지도 모른다는 초조함으로 얼굴이 어두웠다. 여기 와 보니 한국이 정말 살맛 나는 곳이라고 절실하게 느끼지만, 인간 개개인에 대한 소중함을 일상 속에서 지켜주는 이 나라가 인상 깊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같이 온 고향 친구들이 머무는 임시 거주공간에서 마련해준 소박한 만찬은 따뜻했다. 한국에서 준비해 간 김을 건네고 면세점에서 산 말보로 담배를 찔러줬다. 모진 풍파에 맞서다 부러지는 미련한 나무가 되지 말고 끈질긴 풀잎의 생명력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7월 31일 목요일     

영어를 배우고 싶어 왔다는 지우 이야기에 공감하면서도 늘 한국 사람이 되기 위해 긴장해야만 했던 한국생활이 힘들어서 떠났다는 경수(가명) 이야기에는 가슴이 저렸다. 같은 민족이라는 허울 좋은 틀 속에서 감당했던 마음의 상처를 느낄 수 있었다. 우린 탈북자들에게 무슨 도움을 줬던 것일까? 부자가 되겠다는 비현실적인 기대를 품고 한국에 와서 좌절했던 이들이 이곳에서 구원받을 수 있을까? 지우와 경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비상구를 쓸쓸하게 찾고 있었다. 한국을 거쳐 온 탈북난민들을 조사해서 추방한다는 암울한 상황에 갇혀있었다. “잠수 타야죠. 이대로 돌아갈 수 없어요. 영어 하나만이라도 얻어갈 겁니다.”     


8월 1일 금요일      

비틀스의 도시 리버풀의 유혹을 외면하고 잉글랜드 북부의 아름다운 유혹 피크 디스트릭트 국립공원으로 빠져든다. 8,9개월 동안 이민국에서 지정한 공간에만 갇혀 있다가 나온 나들이인지라 들뜬 흥분들이 저만치 앞질러 간다. 이번 여행은 운이 계속 따라준다. 영국 날씨는 늘 좋지 않아서 관광객들이 낭패 보기 일쑤라는데, 계속되는 맑은 날씨 덕분에 풍경 속으로 경쾌하게 들락거린다. 마주치는 사람들 모두 친절하다. 영국 사람들은 무뚝뚝하고 차갑다는 생각들은 어떻게 내 머릿속에 담겨 있는 걸까. 편견이란 게 참 무섭다는 것을 새삼 떠올린다.      


8월 2일 토요일     

영국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광이 숨겨져 있다는 레이크 디스트릭트를 둘러본다. 아름다운 호수들을 에워싸고 예쁘고 착한 마을들이 정답게 펼쳐진다. 큰 도시나 시골의 작은 마을 어느 곳에서도 믿기 힘든 이방인들의 모습을 만난다. 현지와 전혀 타협하지 않은 중국음식점과 중국인들의 당당한 삶이 현지인만큼이나 자연스럽다. 시간이 더디게 흘러서 사람이 여유로운 건지, 사람들이 평화로워서인지는 몰라도 느릿느릿 시간이 흘러간다. 긴장하지 않아도 되는 삶과 부드러운 시선들이 참 좋다. 서울의 적대적인 긴장과 미친 듯이 질주하는 삶의 속도가 지난 생에서의 기억처럼 아득하다.   

    

* 지우와 경수는 그해 늦가을 한국으로 쫓겨 돌아왔다.

작가의 이전글 ROOTLESS..뉴멀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