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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리 Oct 18. 2019

좋아하는 것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인쇄도, 펀딩 배송도, 행사도 어느 정도 마무리돼 가는 지금 내게 남은 일은 책방 입고. 기성 출판에서 작가가 유통 단계에 얼마나 신경 쓰는진 모르겠지만, 독립출판에서는 홍보와 유통과 판매 모두 온전히 작가의 몫이다. 여기저기 메일을 쓰고, 오프라인 행사에서 할 만한 이벤트를 고민하고, 유료 온라인 광고를 걸다 보면 지금 내가 사업을 하는 건지 창작을 하는 건지 좀 헷갈린다. 근데 그것마저 재밌다.


예전에 디자이너는 모든 과정을 본인이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라는 말을 들은 적 있다. 비단 디자이너뿐 아니라 모든 창작자에게 해당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기획해서 실행하는 게 좋은 사람들. 그러니까 독립출판이 이만큼 퍼졌을 거다. 고생을 자초하는 변태들.


책방에 입고 메일을 쓰는 일은 간단하다면 간단하고, 어렵다면 어려운 일이다. 어쨌든 이 메일 한 통으로 책방에 내 책을 어필해야 하므로. 전혀 모르는 책방에 메일을 보내는 것보다는 밑밥(?)을 차근차근 깔아 두면 훨씬 성공 확률이 높겠지만 역시 난 생각만 해두고 별로 실천을 하지 못했다. (혹시 밑밥 깔린(?) 책방 계시면 연락 주세요)


책방마다 분명히 성향이 있다. 이건 내 메일을 읽고 입고 여부를 결정할 책방 운영자의 취향이기도 하지만, 그 책방을 방문하는 손님들의 특성이기도 하다. 따라서 단순히 '책방 운영자를 설득해서 어떻게든 입고해야지!'라고 생각할 사안은 아닌 것 같다. 입고했는데 팔리지 않으면 책방뿐 아니라 나도 난감하다. 잘 맞지 않는 책방에 입고하는 것보단 차라리 본인이 직접 마켓에 들고나가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어디에 입고 문의를 넣을까 고민하며 뼈아프게 깨닫는 게 있다. 아무래도 내가 좋아하는 책을 주로 다루는 책방과 내 책이 어울리는 책방은 좀 다른 것 같다. 사실 내가 좋아하고 주로 읽는 독립출판물은 르포에 가까운 에세이들이다. 그게 아니라도 주제와 아이디어가 분명해서 책을 소개할 때 스토리텔링이 또렷하게 되는, 텍스트 위주의 책을 좋아한다. 그런데 내 책은 그런 부류의 책은 아니다. 내용을 놓고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책은 표지와 장르로 판단하게 되니까. 이건 아무리 봐도 낭만과 감성이 팡팡 터지는 이미지 위주의 여행에세이다.


몰랐던 건 아니다. 굳이 개정판을 만든 건 이 책을 조금이라도 내가 좋아하는 부류의 책에 가깝게 만들고 싶어서였다. 그 시도가 실패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아마 남이 알아봐 주긴 어려울 거다. 대신 책의 감성충 에너지(?)가 좀 희석된 감은 있다. 미안해 첫째야 너를 너대로 사랑해 주지 못해서. 개정판보다 초판이 오프라인 마켓에서 반응이 훨씬 좋았다. 어느 쪽으로든 개성이 뚜렷해야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물론 그냥 두꺼워져서 그런 걸지도...


친구한테 이 얘기를 하자 굉장히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석경: 왜 내가 만들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책방하고 안 맞는 것...?

친구: 완전 그럴 수 있지. 내가 생각하는 자아와 실제 자아의 충돌. 좋아하는 것과 결과물은 다를 수 있어.

석경: 으앙 ㅠㅠ 슬픈데요

친구: 하지만 글 쓸 때 언제나 일어나는 일이지 않니 ㅋㅋㅋ 다 완성해 놓고 보면 이거 누구여...


몽골 여행기로 책을 만들겠다고 했을 때는 크게 어떤 책을 만들려는 의도는 없었다. 그냥 몽골에서 남겨 온 글이랑 사진이 너무 많아서 만들었다.(...) 다녀와서 여운이 너무 강하기도 했고. 책을 다 만들면 어떤 느낌일지 미리 고민하진 않았다. 그냥 로 데이터가 많아서 자연스럽게 만들어낸 책이 나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감성 포텐 폭발. 근데 그 감성 포텐 역시 내 일부란 걸 인정해야 한다.


흥미롭다. 내 취향이 아닌 내 일부가 존재한다는 게. 내가 이걸 더 이상 ‘망했다’가 아닌 ‘다르다’고 취급할 수 있는 건 순전히 내 책을 좋아해 준 분들 덕분이다. 제가 제일 잘하는 게 자책인데요, 그걸 막아준 위대한 독자님들... 늘 부귀영화 만수무강 누리시길.


그래도 좋아하는 것을 만들겠다는 태도까지 포기할 수는 없다. 창작자의 기본 동기는 자급자족 아닌가. 언젠가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써 놓고 나니까 책 프롤로그에 썼던 얘기다. '일부러 애쓰고 노력한 것들은 이뤄지지 않는데 나도 모르게 만들어낸 것들은 조용히 쌓여서 뭔가가 되어 간다.'


흐헝. 그래도 다음 책에는 좀 다른 글 써 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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