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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리 Oct 14. 2019

행정적으로

사소한 행정 절차 하나 때문에 맘졸여야 하는 날이 있다.


그날은 회계 절차가 꼬여버린 우리 팀 교육 비용을 해결하기 위해 하루종일 신경을 곤두세웠다. 퇴근길 지하철에 앉아 있는데 수화기 너머 담당자의 말이 뇌리에 어른거렸다. ‘행정적으로는 절차가 안 맞아서.’


행정적으로는. 내 설명이 ‘실제로는’ 납득이 가지만 ‘행정적으로는’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말이다. 행정, 행정은 뭘까. 나는 내 직업을 ‘행정직’이라고 편리하게 뭉뚱그리곤 한다. 정작 행정이 뭔지 별로 생각하지도 않는 주제에.


정을 행하다. 일단 떠오르는 ‘정’은 국회에서 정해진 나라의 정책이다. 그 정책을 세세하게 실행하는 게 말단에 있는 나의 역할. 하지만 정치라는 말이 국회에만 있는 게 아니듯, 행정이란 말도 법령과 조문 바깥에 동시에 존재할 것이다.


삼 년간 보고 느끼기로는, ‘행정’이란 아귀를 맞추는 일이다. 계획하고 실행하고 보고하고 증빙하고 그래서 노동한 이들에게 대가를 주고 혜택받아야 할 이들에게 각자 배정된 예산만큼의 이득을 주는 일이다. 내게 주어진 수단은 명확하다. 모니터 속 에이포 규격 네모 안에 표현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글이든, 사진이든, 영상이든, 링크든 뭐든 상관없다.


계획하고 증빙해야 하는 이유는 내가 쓰는 돈이 공금이기 때문이다. 꼭 필요한 목적으로, 정당한 절차를 통해 선정한 업체를 통해 사용했다고 증명할 의무가 따르는 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렇게 돈을 모으게 되었나, 여기서 정치라는 말을 넓은 의미로 쓸 수 있게 된다.


같이 살아가기 위해서다. 정치는 여러 사람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 의견 차이를 조율하는 일이다. 공동체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합의하고 실현해 나가는 과정이다. 국가는 공동체 유지의 수단이다. 우리는 이 돈이 우리 공동체 유지를 위해 쓰일 거라 믿으며 세금을 낸다. 공금을 잘 쓰기 위해 만들어진 시스템 속에서 나는 매일 뭔가를 받고 쓰고 낸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면 영수증에 일일이 풀을 발라 붙이고 시시콜콜 사용 내역을 쓰고 파일 한 장 펜 한 자루 사는 데도 계획서 한 편을 써내는 일을 좀 참을 수 있게 된다.


거대한 믿음 체계 가운데 있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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