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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리 Nov 09. 2019

독립출판물을 사는 이유

소비는 정직하다. 그 사람이 무엇에 정말 관심 있는지를 투명하게 알려준다. 내가 가장 돈을 많이 쓰는 항목은 언제나 책, 강좌 수강비, 모임 참가비, 구독비 등이다.


어떤 대상에 관심을 갖게 되기부터 소비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내가 독립출판물을 소비하기까지는 참 오래 걸렸다. 독립책방이나 독립출판에 대해 안 지는 3~4년쯤 된 것 같은데 정말 '소비'하기 시작한 건 올해가 처음.


솔직히 마음 한 구석에 독립출판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다. 저항 정신과 갬성이 깃든 척 하지만 실제로는 알맹이 없는 느끼한 글 천지일 것이라고, 허울 좋은 명분만 가득한 판일 거라고 생각했다. 질투였을 거다. 나와 별 차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나는 아직 하지 못한 것을 하고 있다고 느낄 때의 감정.



독립출판물을 본격적으로 구입하기 시작한 건 '사막에 누워 별을 봐야지' 개정판 작업을 하면서부터였다. 초판을 만들 때에는 시간이 촉박하기도 했거니와, 이미 기성출판물을 많이 봐 왔고 그게 완성체일 텐데 굳이 독립출판물을 보고 참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판형이나 편집도 내게 이미 있는 기성출판물들을 참고했다.


개정판을 만들면서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쨌든 나는 '독립출판물'의 형식으로 책을 유통할 예정이었다. 마켓에 나가고 책방에 입고를 할 계획이었다. 다른 독립출판물 작가들이 어떻게 글을 쓰고 어떻게 책을 만들었는지 궁금했다. 관심 가는 독립출판물을 사서 보기 시작했다. 나와 비슷한 주제를 다뤘거나 사진과 글의 톤이 비슷하다고 생각되는 책들을 참고자료라는 명목으로 사 모았다. 그러면서 깨달은 몇 가지.


읽고 싶은 책(X), 갖고 싶은 책(O)


첫째, 책=글이 아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건데 보통 '책을 좋아한다'고 하면 문학/에세이/사회과학 분야 책 소비자를 말하는 경우가 많아 착각들 하는 것 같다. 독립출판물 중에는 만화나, 일러스트나, 기발한 아이디어가 메인인 경우가 많다. 독립출판물 페어를 가 보라, 책을 들고 조용히 탐독하는 사람이 많은지, '헐, 귀여워!'를 연발하는 사람이 많은지. (퍼블리셔스나 언리밋쯤 되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이리저리 쓸려 다니는 사람이 제일 많다. 그보다는 좀 작은 페어에서 관찰해 보자)


이때 책을 사는 이유는 '독서'보다는 '소장'에 가까워진다. 당장 책을 든 자리에서 다 읽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짧은 내용의 책일지라도 산다. 그 책이 너무 귀엽고 기발하고 좋아서. 그 '오브제'를, 그 '아이디어'를 갖고 싶어서. '자리에서 다 읽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짧다'는 콤팩트함은 오히려 장점이 된다. 내용을 알아야 애정을 가질 수 있으니까.


후암동 ‘초판서점’. 이미지 위주의 책이 많다.


지켜보는 읽기


둘째, 작가가 나보다 엄청나게 뛰어나서 거창한 정보나 메시지를 주지 않아도 뭔가를 깨달을 수 있다. 독립출판물을 읽으며 종종 작가를 관찰하는 기분을 느꼈다. 압도적인 경지의 사유를 따라가느라 바쁜 읽기가 아니라, 괴로워하고 시기하고 과장하고 때로는 내가 과거에 지나온 것과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그런 누군가를 ‘지켜보는’ 읽기.


편집자의 시선을 통해 다듬어진 글이 아니기에 작가가 더 투명하게 보여서 그럴 거다. 아니 투명하다기보단 울퉁불퉁하다는 감각에 가깝다. 매끄럽게 다듬어지기 전의 울퉁불퉁함. 그렇다고 해서 그 책을 사서 읽는 행위가 낭비로 느껴지진 않았다. '메타적인 읽기'가 이런 걸까 싶었다. 정말 한 인간의 삶을 보는 느낌.


사실 기성출판물을 읽으면서도 비슷한 체험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사람은 검증받아 책을 낸 사람이라는 구별짓기는 그 사람을 '작가'로 인정합니다 땅땅- 하는 효과를 냈고, 지켜보는 읽기를 크게 자각할 일이 없었다.


지켜보는 읽기를 체험하며 용기를 얻었다. 내 책을 읽어 주는 사람들도 알아서 의미를 찾아내겠구나. 완벽한 글을 쓰지 않았다고 너무 자책할 필요는 없겠구나. 독서는 작가가 일방적으로 뭘 제공하는 행위가 아니라 독자가 '읽어내는' 행위다. 특히 독립출판의 의미를 무수한 개인사가 더 이상 침묵하지 않고 '출판되는' 것으로 볼 때, '지켜보는 읽기'는 더더욱 의미가 있다.


흔한 지름샷


먹물들은 몰라요


셋째, 기성출판물과 독립출판물의 매력은 아예 그 종류가 다르다. 소속사에서 전문가들의 손길을 거쳐 화려한 모습으로 프로의 무대를 꾸미는 뮤지션과 길거리에서 기타 한 대 들고 버스킹하는 인디 뮤지션의 차이라고 하면 감이 올까. 기성출판물과 독립출판물을 같은 척도로 비교하며 '퀄리티가 떨어진다'라고 말하는 먹물들은 절대 독립출판물을 즐길 수 없다.


사실 내가 바로 전형적인, 기성출판물만 좋다고 소비하던 먹물 꼰대다. 글이라고 해 놓고 말줄임표나 엔터 많으면 깔본다. 맞춤법 틀린 거 많아도 깔본다. 편집 디자인상 오류가 많아도 만듦새 허술하다고 욕한다. 밀도 높은 문장이 촘촘히 들어 있는 책만 좋다고 찬양한다.


내 손으로 독립출판을 해 놓고도 수준 떨어진다면서 스스로 괴로워했다. 그리곤 지금껏 보아왔던 기성출판물의 퀄리티를 추구하며 개정판을 만들었다. 그런데 정말 묘하게도, 초판보다 매력이 없었다. 당장 마켓에 나가도 개정판은 초판보다 반응이 별로였다. 책을 들어 펼쳐보는 사람과 구매하는 사람의 수가 거의 초판의 절반 정도. 오히려 급하게 만들어낸 소책자 부록이 훨씬 인기 많았다.


그제야 정말 정말 말로만이 아니라 몸으로도 알게 된 거다. 말 그대로 '체감'. 아, 다른 거구나. 다음엔 좀 더 제멋대로 만들어야지. 다음엔 재밌는 책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 독립출판물의 매력을 진짜로 안 거다.





인기를 얻어서 출판사를 통해 다시 나오는 식으로 '기성출판'의 영역에 편입되는 독립출판물들도 있다. 지속 가능한 창작을 위해서는 수익이 발생해야 하고, 제작 및 유통 규모를 키워 볼 수 있다면 그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건 독립출판과 기성출판에 겹치는 부분이 있기에 가능한 일일 뿐, '독립출판에서 성장해 기성출판으로 가는'게 당연한 수순은 아니다.


사실 이제는 어정쩡하게 기성출판으로 책 한두 번 낸 사람보다 오랜 기간 독립출판의 영역 안에서 꾸준히 작업을 이어 오는 작가가 훨씬 멋져 보인다.


글 위주로 작업하는 독립출판 작가의 책을 읽어 보면 안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독립출판계에도 똑같이 많다. 요즘 그렇게 핫한 이슬아 작가도 사실 독립출판의 영역에 걸쳐 있다. 아니, 아무도 연재 지면을 주지 않더라도 일단 연재하겠다 했던 그의 무대뽀 이메일 구독 프로젝트 '일간 이슬아'야말로 그 해 가장 흥행했던 '독립출판' 아닌가.


기성출판으로 책을 낸 사람이라고 모두가 김훈만 한 문장을 뽐내는 건 당연히 아니다. 기성출판물 독자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아무리 여혐 꼰대 마초라도 그가 정말 문장을 너무 잘 쓴다는 건 인정해야 한다) 독립출판물도 마찬가지다. 기성출판물의 문장이 독립출판물에서 읽었던 문장보다 언제나 더 나은 것은 아니었다. 읽어 봐야 안다는 당연한 진리를 왜 독립출판물에서는 외면하는지.




내가 이렇게 써 봤자 어차피 안 살 사람은 안 산다. 내 생각에 가장 확실한 독립출판 소비자는 나처럼 독립출판을 직접 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아마, 독립출판을 하는 사람은 늘어날 거다.


책을 만들고 나서 주변의 가장 큰 반응은 '책을 만들다니 대단하다, 나도 만들고 싶다'였다. 그 속마음을 궁예질해 보자면 '네가 만들다니 나도 만들 수 있겠네'겠지. 나 하나가 책을 만들어서 다들 책 만들 용기가 생겼다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근데 나 같은 초짜 독립출판 창작자는 한둘이 아니다. 그 주변에 열 명만 책 만들고 싶다고 생각해도 벌써 후보가 몇 명이야. 물론 그 열망이 책을 신성시하는 오랜 강박을 든든한 빽으로 둔 것 같아서 찜찜하긴 하다.


그러니까 독립출판계는 어떻게든 한동안 근근이 유지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나의 예상이자 희망사항. 물론 한창 재밌게 독립출판 하던 작가들은 이제 상당히 인기가 많아져서 '오버'(?)로 떠나가는 느낌이고, 새로 독립출판 하러 오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앞으로의 방향이 결정되겠지만.


책은 콘텐츠를 엮어내는 형태 중 하나일 뿐이다. '물성'이라는 강력한 장점이자 단점을 지닌 형태. 콘텐츠이자 굿즈인 종합 예술 오브제. 앞으로는 책이든 영상이든 블로그든 모든 사람들은 콘텐츠를 만들며 살아가게 될 거다.


결국 '하우 투 콘텐츠'류의 콘텐츠가 제일 뜰 거라고 생각한다. 남의 콘텐츠는 안 봐도 내가 콘텐츠 만드는 데 필요한 건 찾아보게 될 테니까. 글쓰기 강좌의 인기도 계속될 거다. 글이 뭐 특출나게 엄청난 가치가 있는 장르라서가 아니라, 그냥 글이 제일 만들기 쉬운 형태의 콘텐츠라서.


사실 이 글은 '난 독립책방은 좋지만 독립출판물은 사기 싫다 암만 봐도 기성출판물보다 퀄리티가 낮거든'이라는 글을 SNS에서 보고 억울해서 쓰기 시작했다. 독립출판물을 쉴드쳐 주고 싶었을 뿐인데 결론이 너무 거창해졌다. 암튼 여러분 독립출판 하세요. 재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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