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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리 Feb 16. 2020

이상형의 뒷면

2020.2.16.

가끔 나를 심통 나게 하는 말들이 있다. ‘이상형이 어떻게 되세요?’라는 말도 그렇다. 아, 일단, 제발, 이상형(理想型)이라는 말을 그렇게 빈곤한 의미로 쓰지 말아줬으면 한다. 분명 그 질문의 의미는 ‘네가 원하는 연애 상대는 어떤 사람이냐?’겠지만, 이상형이라는 말은 ‘내가 좋아하는 연애 상대 유형’이라는 좁은 의미로만 쓰기에는 좀 크다.


말 그대로 ‘이상적인 유형’, 영어로도 아이디얼 타입(ideal type)이잖아. 연애 말고도 친구나 동료나 기타 등등 수많은 인간관계 유형을 포괄해 쓸 수 있는 말 아닐까? 심지어 사람 말고 다른 존재, 혹은 사물, 혹은 추상적인 뭔가에도 쓸 수 있는 말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연애는 우리가 타인과 관계 맺는 수많은 방식 중 하나일 뿐인데.


내가 ‘이상형’의 대중적인 용례에 이토록 분개하는 건 내가 연애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서다. 차라리 ‘어떤 사람과 친해지고 싶으세요?’라는 질문을 받았다면 화를 내기보다는 부끄러워하겠지. 하지만 그런 세련된 질문을 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그러니까 아마 내 대답은 ‘당신 같은 질문을 하는 사람이요’가 되겠지.



이상형이라는 말에는 차별이 전제되어 있다. 여러 가지 중 뭔가가 더 좋다고 느낄 때 이상형이라는 말을 쓸 수 있다. 선호하는 것, 편애하는 것, 다른 것에 비해 나의 이상에 가까운 것. 예를 들면, 소설가 황정은은 나의 이상형에 가까운 글을 쓴다. 즉, 나는 황정은의 글이 다른 누군가의 글보다 좋다. 나는 그의 글을 선호하고 편애하며 이상으로 삼는다. 거꾸로, 이 말은 내가 누군가의 글을 좋아하지 않거나, 싫어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뭔가를 좋아하는 만큼 다른 뭔가를 싫어하게 된다.



한때는 그 좋아함과 싫어함의 격차를 줄이려 애썼다. 균형, 이해, 전모, 개인, 고유성 같은 말들에 의지하면서. 이상형을 두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저 살아가면서 어쩌다 가까워지는 사람, 어쩌다 멀어지는 사람이 있을 뿐이며, 누구를 마주치든 당장 앞에 있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며 살아갈 뿐이라고. 혹 그가 나와 많이 다른 사람이더라도, 그 다름에 부딪치며 고민하는 일이 나를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잘 안됐다. 다행히 예전에 생각했던 ‘이상형’이 헛되었다 깨닫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과거의 편견이 깨지는 만큼 새로운 편견도 쌓여 갔다. 모든 게 완벽해 보이는 사람에겐 분명 어딘가 깨는 구석이 있을 거야. 모든 게 비호감인 저 사람에겐 분명 멋진 구석이 있을 거야. 누구에게나 장단점이 있어. 모든 인간은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야. 다 똑같아.


모두를 좋아하기보다는 모두를 싫어하는 상태에 가까웠다. 박애보다는 무애, 아니 무심에 가까웠다. 모든 사람은 다르니 그 미지를 존중하자는 생각이 어느덧 모든 사람은 똑같으니 별 새로울 것 없다는 오만으로 바뀌어 있었다. 누구와도 친해지고 싶지 않았다. 누구도 좋아하지 않았다. 이런 건조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요즘은 내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대신, 호-불호는 한 쌍임을 잊지 않는 조건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나는 무엇을 싫어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싫어할 수밖에 없다면 그 싫어함에도 최선을 다하고 싶다. 부디 어렵게 좋아하고 어렵게 싫어하는 사람일 수 있기를. 좀 더 유심히 고민할 수 있기를. 무심의 삶에서 유심의 삶으로 이동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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