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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리 Mar 06. 2020

평온한 백수

2020.3.5.


백수가 된 지 삼일째.


열두 시쯤 눈을 떴다. 좀 더 일찍 일어나고 싶었는데... 새벽 여섯 시에 잠든 탓이다. 새벽에 본 유튜브 영상들은 모두 유익했으므로 크게 현타가 오지는 않았다. 오전에 하고 싶었던 러닝을 어쩔 수 없이 오후에 하게 되었다는 문제 정도.


밥을 먹고 바로 뛰러 나갈 준비를 했다. 레깅스 위에 트레이닝 바지를 겹쳐 입고, 반팔 티셔츠 위에 플리스, 바람막이, 숏패딩을 겹쳐 입었다. 어제 본 러닝 유투버의 조언대로 장갑도 챙겼다. 주머니에는 스마트폰, 에어팟, 카드 한 장. 옷차림이 워낙 두툼해서인지 스마트폰이 거추장스럽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옷차림이 가벼워질 때쯤엔 내가 러닝에 익숙해져서 망설임 없이 암밴드를 살 수 있게 되길.


러닝 유투버가 추천하던 어플이 생각난 건 집에서 나온 직후였다. 다행히 아직 집 와이파이 신호가 닿았다. 얼른 어플을 깔고 회원가입까지 마쳤다.


날씨가 정말 좋았다. 구름 없이 파란 하늘에 내리쬐는 햇빛. 바람이 조금 차갑긴 했지만, 옷을 많이 껴입은 덕분에 춥지는 않았다. 무작정 집 근처 산책로로 향했다. 다행히 초록색 우레탄 길이 놓여 있었다. 어제 본 영상을 복기해가며 간단한 스트레칭을 했다. 어플을 켜서 러닝 시작 버튼을 누르고, 에어팟을 귀에 낀 채, 드디어 달리기.


달리기를 시작할 때와 끝날 때의 페이스가 비슷하거나, 오히려 끝날 때가 조금 더 빨라야 한다는 조언을 기억하며 조심조심 달렸다. 회사에 오고 나서 이렇게 달려 본 기억이 없었다. 한때는 가장 자신 있는 종목이 오래달리기였는데. 학창 시절 체력장을 하면 항상 오래달리기만큼은 일등이었다. 오래달리기가 쉽다는 생각은 한 번도 들지 않았다. 그냥 어떻게든 이 종목만큼은 내가 일등, 이라는 생각이 강했다. 폐가 빵빵하게 차오른 느낌이 들고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도 어떻게든 몸을 움직였다. 근성으로 해결되는 종목만큼은 언제나 자신 있었다.


길은 생각보다 예뻤다. 날씨가 좋아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파란 하늘과 갈색 나뭇가지, 초록색 길, 밝은 빛. 체력만 된다면 마구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내 몸으로 낼 수 있는 속도는 조신하게 핫 둘 핫 둘 나아가는 정도. 뛰다 보니 조금씩 훈기가 올라왔다. 패딩은 입고 오지 말걸.


길은 생각보다 길었다. 아니 어디까지 우레탄을 깔아 놓은 거야...? 이십 년간 살아오면서도 몰랐던 일산의 모습이었다. 오른편으로 끊임없이 전철이 오가고, 사람들은 햇빛 아래 여유롭게 걸어 다녔다. 산책로의 길이가 과연 오 킬로미터가 될까 싶었는데 기우였다. 십 킬로미터도 되겠는걸?


오 킬로미터 사백 미터쯤을 달렸다. 첫 러닝이라 무서워서 살살 달린 덕에 상태는 멀쩡했다. 땀도 줄줄 나고 팔다리에 힘이 풀려 있기를 기대했는데 너무 몸을 사렸다. 하지만 오늘의 목표는 딱 오 킬로미터였으므로 이쯤에서 귀가. 돌아가는 길에는 마을버스를 탔다. 내일은 돌아오는 것까지 합쳐서 오 킬로미터가 되도록 해 보아요! 오늘은 뛰다가 너무 신나서 그만...


샤워를 하고 나서 동생과 오락실을 다녀오니 금방 저녁 시간. 오늘 저녁엔 '작가란 무엇인가'를 마저 읽으려고 붙들고 있다가 잠들어 버렸다. 그래도 조금 뛰었다고 에너지 소모가 있긴 했던 모양이다. 두시쯤 잠에서 깼는데, 당분간 나의 목표는 나를 잘 챙기는 것이므로 얼른 양치질과 세수를 하고 로션을 발랐다. 또 다른 당분간의 목표인 일기 쓰기를 위해 컴퓨터를 켜고 이렇게 일기도 남기는 중이다.


놀기로 작정하고 퇴사하면 이렇게 평온하구나. 좀 놀랍다. 취준생 때와는 다른 느낌이다. 그때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던 불안은 없다. 오히려 앞으로 어떻게 이 시간을 잘 쓸까, 하는 설렘과 기대, 그리고 넉넉하게 남아도는 생각 에너지가 있다. 끊임없이 울리던 카톡 알림과 전화가 사라지니까 뇌가 상쾌해진 느낌이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산만해야 했던 건지. 물론, 언젠가는 그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


앞으로 한 달은 나를 가꾸는 시간으로 삼을 작정이다. 어차피 온 세상이 난리라 뭘 할래도 할 수 없다(...) 한 달간 내 몸에 익히고 싶은 것은 러닝, 영어회화, 일기. 책도 한 권 만들 생각이다. 여행 계획도 세우고, 여행 다니면서 어떤 콘텐츠를 어떤 방식으로 만들지도 고민해보려고 한다. 그러려면 남들의 콘텐츠도 많이 찾아보고, 자료도 많이 찾아봐야 한다. 어제 새벽 보던 유튜브는 나름대로 연구 목적이었다.(?)


일단 내 몸과 정신을 최우선으로 챙기는 한 달. 앞으로 브런치에 쓰는 일기는 그 한 달의 이야기가 될 거다.


브런치에는 완결된 글만 올리려 하다 보니 도통 업로드를 하지 않게 됐다. 이번에는 좀 힘 빼고 사용해 보려고 한다.


뭐든 계속하려면 조금 쉽게 쉽게 해야 하는데 나는 그런 걸 참 잘 못한다. 엉성해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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