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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리 Mar 07. 2020

퇴사에 용기가 필요하진 않았다

2020.3.6.



퇴사 후 둘째 날까지는 일기를 쓰지 않았다. 뭘 써낼 정도의 감흥이 없었다. 세상에. 정말 많은 부정적 감정들을 각오했는데.


동료나 직함, 내 책상을 잃는 상실감이 들겠지? 막상 닥치면 당연히 불안하지 않을까? 또다시 자책과 우울과 불면의 악순환에 빠지는 건 아닐까? 가족들과 한 집에 있는 걸 버틸 수 없으면 어쩌지? 과연 이번에는 탈출해야겠다는 욕구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데 나는 생각보다 훨씬 멀쩡하다. 취준생 시절 나를 간단없이 괴롭혔던 불안이 나타날 기미가 없다. 왜일까. (부디 이대로 몇 달 더 침착할 수 있길!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의 차이는 3년간의 회사 경험뿐이다. 내 삶을 책임져 본 경험. 조직의 일원으로 꽤 잘 해내 본 경험. 한 사람의 성인으로서 내게 필요한 것들을 구체적으로 파악해 본 경험.


회사에 다니며 자취를 한 덕일까. 회사가 어떤 영역에서 얼마큼 나의 보호막이 되어 주는지 조금은 안다. 회사를 그만두면 건강보험 지역가입자가 되어야 하는구나, 연말정산이 아닌 종합소득세 신고를 해야 하는구나, 신용카드를 만들기 힘들어지겠구나, 대출도 받기 힘들겠구나. 회사 이름만 적어 넣으면 간단히 해결되던 많은 것들이 혼자서 많은 검색과 전화로 해결해야 하는 골칫덩이로 변하겠구나. 그래도 행정 절차라면 익숙했다. 내가 지난 3년간 한 일이었다. 귀찮고 불편하겠지만, 두렵진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침착한 건 회사에서 보낸 지난 3년 덕분이다.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었다. 게다가 언젠가 공공기관과 일한다든가, 공공기관에서 뭔가를 지원받아야 하는 일이 생길 때 일선 담당자로 일했던 경험은 큰 도움이 되겠지. 진짜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회사에 처음 들어와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최소한 2년, 3년은 채우라는 말이었다. 선배들에게 퇴사 상담할 때도 가장 많이 들은 말이었다. 정말 싫었다. 2년 채우면 3년 다니라고 하고, 3년 다니면 5년 채우라고 할 거잖아? 그러면 대체 언제 그만둬도 되는 건데? 이직을 하지 못하면 영원히 이곳에 다녀야 한다는 거야?


하지만 결국 3년을 꾹 채우길 잘했다. 3년은 여기에 더 있는 게 좋은지, 무직 상태를 감수하고서라도 나가서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게 좋은지 판단할 최소한의 시간인 것 같다.


지금껏 퇴사를 두 번 미뤘다. 절대 돌아서지 않을 것 같던 내 다짐을 스스로 돌려냈다. 매번 나름의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한 번은 지금 내겐 퇴사보다 독립이 중요하니 좀 기다려서 전세대출을 받자는 이유였고, 다른 한 번은 사업이 돌아가는 1년의 사이클을 처음부터 끝까지 경험해 보고, 뭐 하나라도 내 손으로 끝내 보고 싶다는 이유였다.


퇴사를 미룰 때마다 패배감이 들었다. 이렇게 싫은데도 더 다녀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니 놀랍기까지 했다. 그래도 내가 내린 결정이니까 늘어난 회사에서의 시간에 최선을 다했다. 특히 지난 한 해는 회사 일과 개인적인 사이드 프로젝트로 빈틈없이 꽉 채웠다. 일년 더 남을 가치가 있었냐고? 충분히. 그리고 이제 더는 여기서 하고 싶은 것이 없다.




퇴사하기 위해 팀장님, 본부장님과 몇 차례의 면담을 해야 했다. 내 머릿속에서는 퇴사해야 하는 이유가 정말 뚜렷하고 명쾌한데, 남들에게 잘 설명이 될까 걱정도 됐다. 그런데 생각보다 더 말이 잘 나왔다. 저는 이 곳에서 더 바라는 게 없습니다. 처우든, 업무든.


처우. 그것은 회사에서 뜨거운 감자였다. 특히 최근 임금 문제로 경영진에게 공개 메일을 보내고 위원회 소집을 요구하고 있는 내 동기들에게는. 하지만 사실 나는 입사 직후 내규를 살펴보고 나서부터 연봉 상승과 승진을 기대하지 않았다. 오르지 않는 것은 아니나 동기부여가 될 만큼 많이 오를 수는 없는 구조였다. 연차 순서대로, 회사에서 주는 대로 받아야 하는 곳이었다.


당연했다. 이곳은 돈 버는 회사가 아니었으니까. 나의 일은 돈을 벌어오는 것이 아니라, 돈을 투명하고 효율적으로 쓰는 일이었다. 매출 스트레스가 없는 대신 혹독한 감사를 각오해야 했다. 정시퇴근과 워라밸이 지켜지는 대신 인센티브나 연봉협상도 없었다. 물론 내부에서 총인건비를 나누는 기준이 불공정하다면 조정해야 한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여기서 내가 받을 수 있는 돈은 그게 그거였다.


초년생 때에야 어디든 처우가 크게 다르지 않으니 괜찮지만, 연차가 쌓였을 때는 좀 얘기가 달라진다. 나의 3년은 오히려 ‘더 다녀야 하는 이유’를 찾는 시간이기도 했다. 나는 돈보다 일이 우선이라, 업무에 정말 만족했다면 나가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업무에 대해 생각해 볼수록 나가야 한다는 결론만 명확해졌다.


업무. 1년 차 때 가장 불만이었던 건 '업무가 언제 바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1년 차 때 벌써 세 팀을 돌았다. 분명 대표 면담이나 본부장 면담 때마다 현재 업무를 최소한 올해 끝날 때까지는 하고 싶다고 얘기했음에도. 나는 3년간 여섯 분의 팀장님을 만나고 네 번의 부서 이동을 겪었는데, 우습게도 이 정도면 매우 운이 좋은 케이스다.


인사이동은 필수다, 오케이. 그렇다면 왜 정례화하지 않는가? 예측할 수 없이 업무가 바뀌니 일에 집중할 수가 없는 건데? 항상 불만이었다. 윗분들이 불만을 물어보면 항상 인사이동 얘기를 했다. 이대로면 전문성도 지속성도 없다고. 담당자가 자주 바뀌니 사업도 휘청거리지 않느냐고.


3년 차쯤 되자 이 문제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인사이동을 정례화하면 만족할 수 있나? 어쨌든 이동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데? 이 회사는 '부서가 계속 바뀐다'는 명제를 받아들인 채 다녀야 하는 곳이었다. 그렇다면 장기적으로 내가 될 수 있는 것은 홍보나 인사, 패션 같은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었다. 그저 '행정 전문가'가 될 수 있을 뿐이었다.(그나마 내가 흑화하지 않고, 일 욕심과 자존감을 잃지 않으며 노력한다는 최상의 시나리오를 가정했을 때에만)


그렇다고 해서 이곳이 형편없는 직장이 되는 건 아니다. 행정 전문가가 어때서? 행정은 중요하다. 세금을 잘 쓰는 건 중요하다. 나는 여전히 국가가 사람들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도와야 한다고 믿는다. 세상엔 많은 행정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다만, 내가 원하는 미래는 아니었다.


사족이지만, 공공기관일수록 신입 공채보다는 경력직 채용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미 업계에서 직접 일해 본 경험이 있고, 그동안 경험을 바탕으로 깨달은 것을 행정적으로 풀어 보고 싶은 사람.


물론 어떤 이유를 늘어놓든... 회사에 있으면서 이직하라는 충고 앞에서는 할 말이 없다. 이만큼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말이 어디 있을까. 회사 생활을 버텨 이직을 성공해내거나 사이드잡을 키워 나가는 사람들은 정말 멋지다. 사실 그 길이 가장 용기 있고 대단한 길이라 생각한다. 자신을 굳게 믿어야 선택할 수 있는 길이다. 그저 내가 그 정도로 성숙하고 단단하지는 못했다고 말할 수밖에. 어쨌든 나는 이 길을 끝내고 다른 길을 가야 했다. 언제까지나 준비만 할 수는 없었다.




퇴사 선언 후 가장 많이 들은 얘기가 ‘용기 있다’였다. 용기라는 말이 정말 낯설었다. 나는 전혀 용기를 낸 게 아니었다. 용기를 내어 퇴사한 거라면 많이 두렵지 않았을까. 일년 전에 퇴사했다면 용기를 냈다는 말이 맞았을 거다. 머리로는 더 다녀야 하는 이유를 알고 있지만 너무너무 싫어서 그만두는 거였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저 고민 끝에 결론이 났을 뿐이다. 내겐 이게 당연한 방향이고, 때가 됐다. 퇴사라기보다는 졸업을 한 기분이다.


첫 회사야말로 내겐 도피처였다. 3년 전의 나는 기자가 될 자신이 없었다. 일상을 포기하며 나를 갈아 일할 자신이 없었다. 당장의 자책에서 나를 보호하고 싶었다. 일단은 정시퇴근 보장되는 일자리를 빨리 얻어 나를 보살피고 싶었다. 어정쩡한 도피를 했던 셈이다. 인생은 어디로 흐를지 모른다 운운하면서. 내가 절대 만족하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


그러니까 이번에는 절대 어정쩡한 탈주로 끝나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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