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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리 Jul 05. 2019

지금 우리는 어디지?

라라랜드, 꿈의 좌표를 찾아가는 사람들


꽉 막힌 도로 안 자동차에는 사실 노래하며 꿈꾸는 사람들이 들어앉아 있다. 달리고 싶지만 달리지 못하는, 모두가 대기하고 있을 뿐인 그 모습은 라라랜드-LA 자체를 은유한다. 이 장면에 등장하는 노래 ‘Another day of sun’은 이 영화의 핵심을 그 첫 소절에서부터 밝힌다. 배우의 꿈을 위해 사랑스러웠던 연인과 헤어져 떠날 수밖에 없었던 소녀. 꿈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다 보면 관계는 희생되고 만다.     



계획을 지켜나가는 여자, 확신에 찬 남자


두 남녀는 각자의 길을 가던 중 마주친다. 둘 다 운전 중에도 연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서로의 공통점을 눈치 채지 못한다. 남자의 여자에 대한 첫인상은 연습에 한눈팔다 운전도 제대로 못 하는 진상, 여자의 남자에 대한 첫인상은 갑자기 경적을 울리더니 욕이나 하고 내빼는 싸가지.


세바스찬은 원하는 구절을 다시 듣기 위해 자꾸만 테이프를 뒤로 돌린다. 재즈의 가장 큰 특징은 즉흥 연주다. 매번 달라지는 곡에서 특정한 부분을 찾기 위해서는 그저 무식하게 틀어 보며 헤매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몇 번이고 계속해서 테이프를 돌린다. 집 정리나 연애 등 삶의 안정에 필요하다는 요소들은 뒷전이고 피아노 연습이 제일 중하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자유로움을 사랑하며 재즈에 삶을 송두리째 거는 인간, 세바스찬이다.

미아는 대본을 연습하다가 lunacy을 insanity으로 잘못 외운 것을 알아챈다. 별 차이 없어 보이더라도 정확한 대본을 암기하는 것은 배우에게 중요한 기본이다. 모든 배우와 스텝들이 무사히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애드리브보다는, 이미 짜인 것을 잘 해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생활비도 벌고, 같은 지망생들과 교류하며, 연애도 한다. 삶이 요구하는 조건들을 모두 충족해 내고, 주어진 대본대로 꿈을 이뤄나가고자 노력하는 사람, 미아다.


남들의 눈에 세바스찬은 재즈 클럽을 열겠다는 허황된 꿈을 놓지 않는 한심한 인간이다. 집은 어질러져 있고, 연애를 할 생각도 없다. 외골수라 일자리에서는 자꾸만 잘린다. 6년간 배우의 꿈을 꿔 온 미아는 착실하게 배우 지망생의 길을 걷는다. 카페 일을 병행하며 계속 오디션을 본다. 잘 나가는 형을 둔 남자친구까지 있다.

하지만 ‘Somewhere there's a place where I find who I'm gonna be’ 라고 노래하는 미아는 계획대로 살아가나 무엇이 될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껏 해 온 이 길이 맞는 건지, 재능이 없는데 우겨 온 것은 아닌지, 헛된 꿈을 꿔 온 것은 아닌지, 마음속 깊은 곳에 불안이 숨어 있다. 반면 세바스찬은 흘러가는 대로 살아갈지라도 무엇을 할지, 무엇이 될지 확신하고 있다.


미아에게는 세바스찬을 그가 원하는 좌표까지 이르게 해 줄 계획력이 있다. 세바스찬에게는 미아를 그녀가 원하는 좌표에 닿을 때까지 버티게 밀어 줄 동력, 목표에 대한 확신이 있다.




연인의 자격, 꿈꾸는 자


두 사람의 정체성은 각자의 꿈에 있다. 그래서 둘의 관계는 꿈꾸는 자로서의 서로를 인정하면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미아는 세바스찬의 연주를 듣고 감탄하여 그에게 말을 건다. 세바스찬은 그녀에게 찾아와 어떻게 배우의 길에 발을 들여놓았는지 묻고, 그녀를 신동이라 추켜세운다.

서로의 꿈을 응원해주는 자. 사실 내 생각에는 이것이야말로 연인관계의 필요조건이다. 나는 소설 속에서 지적인 대화를 나누는 연인들을 보며 사춘기를 보냈고, 「비포 선라이즈」 3부작을 보고는 ‘내일 세상이 망하더라도 지금처럼 계속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대사에 꽂혔다. 가장 학구적이었던 때는 늘 사랑이 동력이었다. 삶의 굵직한 전환점에는 언제나 누군가가 있었다. 내게 사랑은 언제나 꿈과 긴밀히 연결돼 있으면서도 부차적인 것이었다. 어쩌면 내가 커리어를 위해 연애와 결혼을 포기하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해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평론가 허지웅은 그들이 사랑 앞에서 너무 나이스하다, 사람들이 응당 보이곤 하는 찌질함을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왜 그들은 사랑 앞에 그토록 쿨할 수 있었을까. 왜 파리로 떠나는 미아에게 ‘나야, 연기야?’라는 찌질한 물음조차 없이 이별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을까. 그들에게는 꿈을 서로 응원해주는 관계가 훨씬 중요했기 때문이다. 꿈이 사랑을 방해할 때, 사랑은 너무나 쉽게 뒷전으로 밀려난다. 이 관계의 본질이 무엇이었는지 드러나는 장면이다.




꿈을 꾸는 사람들에 대한 오해


그들의 첫 싸움 역시 사랑 때문이라기보다는 꿈 때문이었다. 서로의 꿈 때문에 사랑이 위협받기 시작하는 상황. ‘같이 가자’ ‘리허설이 있어’ ‘다른 곳에서 해도 되잖아’ ‘다른 곳 어디? 네가 있는 곳?’ 미아의 표정은 순간 날카로워진다. 그 날카로움은 어느 새 현재 하는 일이 정말 꿈을 위한 것인지, 아닌지를 규명하기 위한 것으로 바뀌고 만다. 거기서부터 두 연인은 꿈을 꾸는 자로서 서로의 자존심을 상처 입히기 시작한다.

“이제 이게 내 꿈이야.” ‘꿈’을 무시로 바꿔 온 나는 세바스찬의 말에 공감했다. 그런 나를 누군가가 과거의 꿈으로 공격할 때 얼마나 답답하고 한편으로는 갈등했는지. 예측할 수 없는 음악 재즈처럼, 즉흥성이야말로 세바스찬이라는 인물의 본질이다. 동시에 자신이 꿈을 수정하려 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이다. 그것이 옳은 선택인지 이미 갈등하고 있었을 터. 그래서 미아의 지적에 더 발끈했을 거다.

‘뭐든 쳐 봐요’ 오랜만에 들은 그 요구에 세바스찬은 홀린 듯 옛 멜로디를 떠올린다. 미아와 세바스찬의 첫 만남, 전 남자친구를 버리고 세바스찬을 선택해야 한다는 미아의 깨달음을 이끌어낸 멜로디다. 멜로디를 치는 순간 셉은 미아가 옳았음을 깨닫고 그녀에게 달려간다. 사실 외골수였던 세바스찬이 갑자기 남들이 원하는 것에 대해 말할 때부터 무엇이 그에게 옳은 길인지는 분명했다. (‘네’가 이런 걸 원하는 줄 알았다, ‘모든 연주자’들은 이렇게 성공하기를 바란다, ‘이제’ 이게 내 꿈이다)

세바스찬의 위기가 확고했던 꿈의 좌표에 대해서라면, 미아의 위기는 그녀가 살뜰히 지탱해왔던 꿈과 삶의 균형이 무너지며 찾아온다. ‘볼더시티여 안녕’을 준비하며 그녀는 일도 그만두지만, 성적은 좋지 않다. 뒤늦게 찾아온 세바스찬에게 그녀가 하는 말은 ‘대관료도 못 내’. 하지만 경제적 이유보다도 미아를 무너뜨린 건 확신 없음이었다. 꿈의 좌표는 무한히 불확실한 반면, 그녀의 마음과 시간은 유한했다.

꿈을 꾸는 사람들은 확신에 차 있다는 오해를 받는다. 하지만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재능과 노력을 의심할 수밖에 없고, 실은 세상에 확실한 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거꾸로 ‘넌 확고한 꿈이 있지 않았느냐’는 주변의 시선은 그들을 자유롭지 못하게 묶는 굴레가 되기도 한다. 꿈을 꾸는 자로서 서로를 이해하는 것 같던 ‘라라랜드’ 속 두 연인도 서로에게 그러하고 말았다.




우리는 너무 일찍 죽기 때문에


I guess we’re just going to have to wait and see. (La La Land, Sebastian)


‘소설가의 일’에서 김연수는 삶을 낙관할 수 없는 이유를 ‘우리가 너무 일찍 죽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너무 일찍 죽기 때문에 좀더 장기적인 시각으로 삶과 꿈을 보지 못하고, 그래서 초조해한다. 영화 내내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속단과 망각으로 인한 고통에 눈길이 갔다. 노력해도 안 될지 모른다는 고통, 지금 이 길은 옳은 길이 아니지 않냐는 두려움. 이로 인해 미아와 셉은 서로를 다그치고, 괴로워하고, 도망친다.

꿈꾸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 길만 죽 팠는데 재능이 없다면 어떻게 하지, 겁먹곤 한다. 나도 그랬다. 지금 생각은 좀 다르다. 재능은 허상에 가깝고, 그냥 오래 성실히 버틴 놈이 남는다고 생각한다. 다만 기한 없는 노오력에게 마음을 농락당하지 않으려면 드림로드를 걸으면서도 삶을 유지할 조건이 있어야 한다. 물론 운과 타이밍과 기타 등등이 결국 죽어라 안 맞아서 살아생전 꿈 언저리만 맴돌다 죽지도 모른다. 그래도 실망하지 않기는 어렵지만, 미리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너무 쉽게 절망하지 않고 너무 쉽게 낙관하지 않으며 담담하게 하고 싶은 것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

그렇게 길게 보면 영화 속 두 연인도 초조해하며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있었을까. 우리들은 좀더 긴 수명과 시간감각, 인내를 갖지 못해서 그렇게 힘들어하고, ‘돌이킬 수 없는’ 선택들을 하고 마는지도 모른다.

짧은 삶, 초조함, 비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뭔가를 믿고 사랑한다. 생각보다 더 희망을 갖고 싶어 한다. 계속 살아서 돈을 벌든 숨을 쉬든 뭔가를 지속하고 있다는 자체가, 아직 살고 싶어 한다는 증거다. 소설가 김연수가 ‘왜 어떤 이들은 죽을 것임을 알면서도 그 길로 걸어가는지’라는 불가사의를 동력으로 글을 썼듯. 라라랜드의 두 연인이 서로를 회의 너머 믿음으로 밀어준 결과 각각의 꿈을 이뤘듯.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죽음의 길을 갈 때,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는 쪽을 택할 때, 꿈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꿈이 좌절됐다는 것을 깨달았으면서도 꿈에 대해서 한번 더 말할 때, 우는 얼굴로 어둠 속에 서서 뭔가 다른 좋은 생각을 하며 억지로 미소를 지을 때, 바로 그때 이 우주가 달라진다는 말. (김연수, ‘소설가의 말’ 중에서)


People love what other people are passionate about. You remind people of what they’ve forgotten. (La La Land, Mia)




이별의 필연성


5년 뒤의 각자에게는 서로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 있다. 클럽의 이름은 미아가 지어 준 이름인 ‘셉스’다. 영화 내내 세바스찬에게 미아 말고 다른 연인은 없는 걸로 보인다. 미아는 길이 막히자 바로 차를 돌려 가는 사람이 됐다. 첫 장면에서 길을 막고 있는 자신의 차를 피해 갔던 세바스찬처럼.

마지막 장면에서 미아와 세바스찬은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다. 혹시 있었을 일들을 상상하는 그 영상을 암묵적으로 공유한 두 사람의 표정은 모두 씁쓸하다. 당연하다. 사랑이 끝나 헤어진 게 아니라 꿈이 그들에게 허락한 사랑의 시간이 끝나 헤어졌을 뿐이니까.

결국 이건 꿈으로 가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좌표를 확인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영화 속에서 가장 중요한 건 언제나 where이다. 이 영화의 방점이 사랑보다 꿈에 찍혀 있다고 생각할 때, 꿈은 무엇보다도 장소로 표현된다. 꿈을 위해 세바스찬과 미아는 보이지, 파리 등으로 계속해서 이동한다. ‘Someone in the crowd’가 중요한 이유는 그가 나를 ‘내가 원하는 어딘가(where you wanna go)’, ‘저 높은 어딘가(lift you off the ground)’로 데려다 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City of stars'에서 모두가 사랑을 꿈꾸는 이유는 그 사랑이 ‘나는 여기(here) 있으니 당신은 괜찮을 것이다’라며 나를 응원해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사랑이 끝날 수밖에 없던 이유는 달콤한 사랑 속에서 이대로 머물고 싶어지는 건 ‘위험’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꿈의 좌표로 이동하는 대신 지금 여기에서의 설렘만을 추구하게 되는 위험한 상태다.

미아가 세바스찬에게 반복해서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지?(where are we?)’하고 물을 때, 그 사랑과 꿈의 좌표는 꿈이라는 x값에 의해 변한다. 사랑은 부차적으로 산출되는 종속변수 y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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