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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리 Jul 22. 2019

불행의 곁에서 마음을 지켜내는

원도, 경찰관 속에서

나도, 언니에게 보내는 편지.


내가 보지 않는 처참한 것들을 모조리 대신 접하는 언니의 글에 감히 좋다거나 슬프다거나 하는 코멘트를 달 수가 없어. 다만 왜 힘든 사람들의 곁에 있어주는 사람들은 또 다른 힘든 사람들일 뿐일까를 생각해. 왜 어떤 이들은 처참한 것들 한가운데서 살아가야만 하는지를 생각해. 도망도 극복도 이루지 못하고 죄다 모른 체하고 살아가는 내 거짓말 같은 일상을 생각해.




《경찰관 속으로》는 어느 경찰관의 기록이다. 책은 크게 3부로 나뉘어 있는데, 각 부의 제목은 '산 사람', '죽은 사람', '그리고 남은 사람'이다. 삶과 죽음, 옳음과 그름, 유죄와 무죄를 고민하게 되는 이야기들의 한가운데에서 경찰관으로 살아온 3년을 풀어놓았다. 그 이야기들은 이런 말로만 수식이 가능하다.


끔찍하다는 말로 설명이 될까?
언니, 끔찍하다는 말보다 더 끔찍한 단어를 알아?
알면 가르쳐줘.
난 내가 본 광경을 도저히 글로 표현할 수 없거든.
원도, 《경찰관 속으로》21쪽


책을 읽으며 어릴 적 본 어느 일본 만화를 떠올렸다. 만화에 등장하는 세계는 밝고 유쾌한 마녀의 나라와 어둡고 추운 '오글'의 나라로 나뉜다. 만화의 악역은 오글들이다. 하지만 만화 후반에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진다. 지금껏 마녀의 나라를 다스려 온 사람들은 온갖 어둡고 더러운 것들을 다 오글의 나라에 갖다 버려왔고, 그래서 마녀의 나라가 그토록 즐겁고 달콤한 것만 가득한 세계일 수 있었다는 진실. 나는 이 분리된 세계 이야기가 그 어떤 사회학자의 우화보다도 아프다.

인생에 불행이 아예 없을 수 없다면, 적당히 견딜 수 있을 정도로 닥치기라도 한다면 좋을 텐데. 이상하게도 타인의 불행을 자주 목도하고 함께하는 이들은 으레 자신만의 불행을 이미 버티고 있는 사람들이다. 어둡고 춥고 더러운 것들은 그것끼리, 밝고 즐겁고 좋은 것들은 그것끼리 모인다. 서로가 서로를 끌어들이는 자석이라도 되는 것처럼.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의 옆에, 아픈 사람은 아픈 사람의 옆에, 이방인은 이방인의 옆에. 개인의 사회경제적 위치는 그의 거주지, 소속처, 활동반경, 인간관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일상에 불행이 넘쳐흐르는 걸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다른 불행한 이에게 손 내밀기보다는 하루빨리 나부터 이곳에서 탈출하고자 마음먹게 된다. 약자가 약자를 혐오하고 배제하고 거부하는 비극은 여기서 온다.

한때 나는 기자가 되길 바랐다. 사회에 대한 입바른 글을 쓰면서 월급쟁이 노릇을 할 수 있다는 기대로 언론사 공채를 준비했다. 공부를 하며 먹물들의 미감에는 묘한 구석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론 따위 초월하는 생활의 묵묵함과 밥벌이의 처절함을 구체적으로 기록해낸  이야기에 기자들은 박수를 쳤다.


사람들이 잘 접하려 들지 않는 세상의 가장 어두운 구석을 가시화해야 하는 게 기자의 임무라고 생각할 때, 그런 습성은 당연하고 마땅했다. 나 역시 그런 글들에 아낌없이 밑줄을 긋고 필사를 하는 인간이었다. 그러나 마음속엔 늘 찜찜함이 있었다. 저런 삶을 신성하게 떠받드는 주제에, 내가 하겠다는 일은 (그에 비하면) 입이나 털고 한가롭게 사회학 담론을 논하고 기자님 소리 듣는 일이 아닌가?

짧은 인턴 기간 동안 의문은 깊어졌다. 불특정 다수를 인터뷰해야 하는 코너를 단독으로 맡으며 나는 길거리에서 사람들을 붙들어 즉석 인터뷰를 하곤 했다. 한 번은 끊임없이 핸드폰 알람이 울리는 퀵 기사님을 붙들었다. 택시 문에 톡 맞으면 죽는 일이라며, 인생 망한 사람들이나 이 일 하는 거라고 어떤 독기도 없이 말하는 그의 태도에 감히 더 질문을 던지지 못했다.


2016년 여름 최악의 폭염, 당장 숨이 막힐 것 같은 구두닦이 컨테이너 안에서 나는 더 원하는 게 없고 하느님이 빨리 데려가시기만을 기다린다고 말하는 구두닦이 할아버지 앞에서 감히 건넬 말이 없었다. 그들의 말을 손쉽게 신문 지면에 옮길 생각을 하는 나는 언젠가 꼭 벌을 받을 것 같았다.

심장이 멎은 사람들을 무시로 본다는 소방대 구급요원, 아침에 여는 곳이 뼈해장국집뿐이라 그곳에서 아침에 회식으로 술 한 잔 하고 집에 들어가다 눈총을 받았다는 3교대 근무 간호사, 추운 겨울 한강 다리 한가운데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야 했던 대리기사. 새벽에도 길거리를 헤매며 땅바닥에 앉아 그런 이야기를 듣는 나라고 그들보다 결코 사정이 나은 건 아니었다. 그래서 더 괴로웠다. 이 우중충한 이야기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힘든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살아가겠다고, 자소서에 너무나 쉽게 쳐 넣었던 그 말이 얼마나 멋모르는 말이었는지 체감했다. 충분한 시간과 검토 없이 그들의 이야기를 함부로 노출시켜야 하는 일, 노출시키게 해달라고 앞뒤 없이 조르는 일, 그런 일을 하며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불행을 극복할 그릇과 여력은 한 해 두 해, 아주 천천히 자라나는데 불행이 쌓여가는 속도는 늘 그보다 빠르다. 가난한 집에는 예상치 못하게 누군가가 갑자기 큰 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치거나 그것도 아니면, 어쨌든 돈과 시간과 여력이 있었더라면 예방할 수 있었을 일들이 닥친다.


불행에 오래 노출되면 사람은 마음을 소진한다. 더 이상 폭력적인 존재, 피해받는 존재, 혹은 그 둘 다인 존재들을 이해하거나 돕기보다는 마음을 닫고 도망치게 된다. 누구에게나 자기 자신을 우선적으로 보호할 본능과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경찰관 속으로》에는 끝까지 마음을 잃지 않으려는 사투가 있다. 그 앞에서 나는 건넬 말 없이 무능하다. 그저 곁에 있고 싶다는 마음만 보탠다.


내가 초심을 잃어가는 기록,
내가 그동안 쌓아 올린 나만의 정의감이
손바닥 속 모래알처럼 점점 흩어지는 것에 대한 관찰기,
다른 사람도 아닌 언니에게만 털어놓을 수 있는 양심의 자책.

원도, 《경찰관 속으로》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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