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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리 Jun 07. 2019

작가는 신분이 아니라 행위다

이슬아와 패터슨

이 독후감은 다른 북클럽에 놀러가기 위해 쓴 글이다. 선정작은 일간 이슬아 수필집&패터슨. 두 작품이 짝지어져 있는 걸 본 순간 퇴근 후 서점에 가기로 결정했다. 이세상 센스가 아니잖아. 대체 누가 발제했는지 꼭 만나보고 싶다.

두 작품에서 '작가'는 신분이 아니라 행위다. 그 사람이 신춘문예나 공모전에서 수상해 등단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베스트셀러를 보유한 유명인이라서가 아니라, 그저 끊임없이 쓰는 사람이라서 작가다. 시험이나 공모를 통해 한순간에 무명과 유명의 경계선을 넘는 것은 허망하고 때로 부당해 보이기까지 한다. 사람들이 이슬아와 패터슨에 열광한 이유는 그래서다. 외부에서 청탁을 받지 않아도, 다른 생업에 자꾸만 삶의 지분과 정신력과 시간을 빼앗겨도 꾸준히 쓰는 사람. 그게 얼마나 아름다운지 우리는 안다.

영상 속 패터슨은 아름답지만, 그가 현실로 튀어나와 존재하는 것은 좀 많이 어려운 문제다. 이슬아가 본인의 연재를 '일간 아슬아슬'이라 부르며, 연재 후반에 가서는 소진되는 고통을 호소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이슬아는 미혼의 전업작가니 패터슨보다는 더 글쓰는 데 시간을 많이 투자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서는 글쓰기를 생업으로 삼지 않는 패터슨이 더 자유롭게 쓰는 것처럼 보인다. 시 한 편을 쓰는 데 아무리 많은 시간을 들여도, 매일매일 뭔가를 쓰지 않아도 된다. 분량도, 빈도도 정해진 것은 없다. 그의 쓰기에는 어떤 강제력도 개입하지 못한다. 쓰지 않아도 되는데 언제나 끊임없이 쓰기를 택하는 것이 패터슨의 놀라움이다. 우리는 대체로 글을 쓰기 위해 '써야만 하는 상황'으로 우리를 밀어넣는다. 책을 읽기 위해 '읽어야 하는 상황'(예를 들면 트레바리)에 우리를 밀어넣는 것처럼.

일간 이슬아 수필집의 첫 장부터 맨 끝까지 읽으면서 끊임없이 질투했다. 이슬아의 진짜 대단한 점은 매일 썼다는 점이 아니라, 맨날 쓰는데도 그렇게 잘 썼다는 점이다. 나는 그 비결이 작가의 주변인들을 향한 사랑이라고 확신한다. 사소한 행동이나 대화를 기억했다가 고스란히 적어내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본인만의 언어로 풀어낼 줄 아는 섬세한 사랑. 단지 인스타그램 인플루언서나 관종이라는 평가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다정하고 성숙한 인격.

이런 인물상은 패터슨에게서도 나타난다. 승객들의 대화를 미소 띤 얼굴로, 때로는 다소 심각한 얼굴로 귀담아 듣는 패터슨. 늘 뭔가 일을 벌이는 아내가 항상 이해 가지는 않아도, 살짝 헐렁한 태도로 그 모든 걸 받아들이는 패터슨. 컵케이크로 대박이 날 거라고, 컨트리 가수로 성공할 거라고, 끊임없이 설익은 로망을 쏟아내는 아내에게 패터슨은 절대로 찬물을 끼얹지 않는다. 그저, 분명 그렇게 될 거라고, 정말 좋을 거라고 말할 뿐.

나는 올해 초, '한달간 매일 쓰기' 클래스를 들은 적이 있다. 클래스의 마무리 모임 때, 사람들은 쓸 것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그때 선생님이 한 말이 아직도 귓가에 선하다. '나 말고 다른 것에 관심을 준다면 글감은 차고 넘친다'. 주변에 대한 관심과 포용력이야말로 매일 쓸 것이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그러니까, 작가란 계속 쓰는 행위에 의해서만 작가일 수 있고, 계속 쓰려면 주변에 따뜻한 관심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다정하고 성실한 사람이라니, 그건 너무 완벽한 인간이다. 나는 그냥 옆에서 질투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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