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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리 Mar 19. 2020

혼자서는 쓸 수 없는 이유

2020.3.18.

글은 혼자서는 쓸 수 없다.


1년의 백수 시절과 3년의 회사원 시절, 그리고 돌고 돌아 다시 백수 시절의 초입에 섰다. 전에는 몰랐지만 지금은 아는 것이 있다면 글은 세상과 뚝 떨어져 나 혼자 애쓴다고 잘 써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언시생 시절, 특히 스터디와 독서실 총무와 막연한 자습만으로 삶이 이뤄져 있던 때에는 자꾸 숨이 콱 막혔다. 읽어도 읽어도 나아가지 않고, 써도 써도 파고들지 못하는 기분이 들었다. 끊임없이 써야 하는데 써낼 것이 없었다. 뭔가 콱 막혀 있던 기분. 지금은 그 원인이 뭐였는지 안다. 글의 원본이 될 내 삶이 따로 없었으므로.


글 이전에 내 삶이 존재해야 한다. 사회와 맞닿아 돌아가는 지점이 있어야 생각이 돌아간다. 그제야 흐르는 생각을 글로 담아낼 수 있다. 사회와 맞닿는 지점은 학교가 될 수도, 회사가 될 수도, 스터디나 모임이 될 수도 있다. 무엇이든 내 삶을 굴러가게 해줄 제1톱니바퀴가 분명 있어야 한다. 글은 혼자서는 쓸 수 없다는 건 그런 의미다.


사회에 나왔을 때 나는 타인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무언가를 받는다. 말일 수도, 행동일 수도, 생각일 수도, 마음일 수도 있다. 그 무언가 없이 쓸 수 있는 것은 보잘것없는 나, 오로지 나에게서 뽑아낸 것뿐이다. 백수 시절에 내가 쓸 수 있던 건 기껏해야 신세한탄이었다. 남의 것을 찾아읽고 쓴 것들은 '나'뿐이지는 않은 글이라 그런지 좀 나았다. 시선이 확장되지 않은 글들은 빈곤했다. 그 시절의 빈곤함을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이 그때 내가 쓴 글들의 유일한 가치였다.


영화 찍을 때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고 공동체 생활도 끔찍하게 싫었어요. 그런데도 왜 계속 했냐면...
그 일 때문에 삶이 그냥 흘러갔기 때문이에요.

이슬아X유진목, 『깨끗한 존경』, 164쪽


그 일 덕분에 삶이 그냥 흘러가는 것. 고여서 썩어가는 것이 아니라 어쨌든 흘러갈 수 있게 해 주는 것. 진정한 의미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는 것. 분명히 삶에는 그런 제1톱니바퀴 하나쯤은 필요하다. 글은 어디까지나 '삶'이라는 원본을 담아내는 투영체다. 삶이 흘러야 글도 흐른다.


회사는 분명 내게 제1톱니바퀴가 되어줬다. 그 사실 덕분에 회사를 좀더 오래 견딜 수 있었다. 분명히 회사에서 보고 듣는 것들은 모두 내 글이 될 수 있었으므로. 출근도, 퇴근도, 사무실 내 책상도, 점심시간도, 연차도 모두 회사에서 파생되는 나의 삶이었으므로. 제1톱니바퀴를 잃는 것이 두려워 퇴사를 한번 더 미루기도 했다.


다시 아무 소속도 호칭도 없는 나로 돌아온 지금. 나는 스스로 내 삶을 돌아가게 해야 한다. 여행이든, 콘텐츠 제작이든, 다음 커리어를 위한 준비든, 무엇이든 내 혼자 힘으로 제1톱니바퀴를 만들어야 한다.


아주 단순한 뼈대부터 짜기 시작한다. 일어나면 달리기를 하고, 달리기가 끝나면 노트북 앞에 앉는 삶. 여기서부터 내 삶을 굴려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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