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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리 Mar 19. 2020

말하던 날

2018.6.4.

청국장 하나와 두부찌개 하나를 주문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나, 올해에는 퇴사하려고."
"응?"
"어, 그러니까, 올해를 넘기지 않으려고. 마음먹은 지야 오래됐고 타이밍의 문제였는데, 2년 넘기는 건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아."

엄마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네가 알아서 잘하겠지, 애도 아닌데, 했다.


갑자기 자기 고등학생 때 얘기를 했다. 선생님이 꼭 인문고 가라고 했는데, 외할아버지도 반대하고, 외할머니도 하도 돈타령을 하는 바람에 상고를 갔다고. 나중에 돌아가시기 몇 년 전에야 외할아버지가 '너 똑똑해서 인문고 갔으면 잘했을 텐데, 못 보내 줘서 미안하다'라고 하는 말을 듣고 너무 화가 났다고.


"그래서 내가 더 너 공부 공부하고 이것저것 시켰던 걸 거야. 그래도 덕분에 네가 가진 건 좀 많지 않니?"


평생 듣기 싫었던 말이었는데 갑자기 이 사람이 아는 방식이 그것뿐이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그동안 안 하던 이야기도 했다. 엄마 아빠가 너한테 멘토가 되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네가 많이 힘든 게 당연하다, 내가 뭘 많이 아는 것도 아니고 회사를 다닌 것도 아니고 주변에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라 너에게 도움이 못 돼줘서 그게 미안하다. 아빠도 그런 면에서 도움 줄 사람이 아니고. 누구누구는 엄마 아빠에게 도움도 조언도 많이 받는데, 너도 그런 상황이면 훨씬 나았을 텐데, 하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 탓해 봤자 변하지 않는 것을 탓하는 건 소모적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엉뚱한 데 대고 분노하는 것도 질색이다. 학창 시절 그만치 사교육 받고 대학 때까지 용돈 받고 살았던 걸로도 충분했다. 아니 부채감마저 있었다. 근데 내 생각과 엄마의 생각은 별개였다. 어쩔 수 없이 그랬다.


상관관계가 뚜렷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두서없이 듣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 엄마가 보기에도 그곳이 너에게 좋은 곳은 아닌 것 같고, 너는 하고 싶은 것도 있으니, 억지로 다니지 마라. 여행도 좀 다니고, 생각도 좀 해봐라.


아 나는 엄마의 반대를 항상 의식하며 살아왔구나. 실제로는 어떨지 모르는 것을 항상 신경 쓰고 있었구나. 아직도 아직도 그렇구나. 휴지로 눈물을 찍어내며, 내가 엄마 반응이 생각했던 거랑 달라서 놀랐나 봐, 했다. 엄마가 겸연쩍게 웃었다. 내가 널 맨날 혼냈으니까.

전세 역전이다. 엄마랑 줄다리기를 하는 판을 예상했는데 엄마가 이쪽으로 와서 같이 줄을 당기는 형국이다. 놀라서 빨리 반대편으로 이동해 줄을 당겨야 할 판이다.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데, 우습게도 그렇다. 새삼 나는 평생 이 사람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사실을 긍정적으로 보든 부정적으로 보든 어쨌든. 아주 절대적으로 그러하다.


201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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