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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리 Apr 06. 2020

여행이라는 포도

2020.3.29.

속초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떠나는 여객선은 일요일 오후 2시에 출발해 다음날 오후 2시에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한다. 이코노미 클래스를 탈 경우 편도 22만 2천원. 여기까지 확인하면 DBS크루즈훼리 홈페이지를 닫고 싶어진다. 비행기보다 시간도 오래 걸리고 분명히 더 불편할 텐데 가격은 더 비싸다. 말도 안 돼. 난 툰베리는 못 되겠다.


스웨덴의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는 유엔 기후 정상회의에 연사로 참석하기 위해 영국 플리머스에서 미국 뉴욕까지 태양광 요트를 타고 이동했다. 탄소 배출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어떤 사람들은 정작 태양광 요트의 선원들은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지 않았냐며 툰베리를 비난했지만, 일단 나는 툰베리 덕분에 새로운 것을 알았다. 바로 여행을 위한 ‘이동’ 자체가 환경 파괴가 될 수 있다는 사실. 여행은 이래저래 자연에 득 될 게 없다는 사실.


돈 없는 대학생 시절 내게 여행은 신 포도였다. 빚을 내서라도 여행을 가라, 여행을 가야 시야가 넓어진다, 여행에 쓴 돈은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다… 그러니 너도 어서 떠나라고 등을 토닥이는 말들이 가득했지만 모른척했다. 그래, 분명 좋은 경험이겠지. 하지만 나중에요. 지금은 갈 수도 없고, 딱히 땡기지도 않네요. 뭐 그렇게까지 엄청날 거라는 생각도 안 들고요.


‘여행은 신 포도였다’. 과거형으로 쓴 걸 보면 알겠지만 지금은 신 포도 아니고 단 포도다. 회사 생활의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떠난 몽골 고비 사막에서 난 인정해 버리고야 말았다. 와, 나 여행 엄청 좋아하잖아. 여행 가면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잘 정도로 좋아하는 인간이었잖아. 망망하게 넓은 사막, 그 위로 반짝이는 별빛, 끝없이 펼쳐진 초원, 고요한 오로라 아래 빙하, 당장 전부 보고 싶었다. 사라지기 전에, 어서.


그렇다, 사라지기 전에. 몽골에는 아직 개발의 손길이 닿지 못한 고비사막 같은 곳도 있지만, 이미 번듯한 리조트가 자리잡은 관광지도 있다. 수도와 가장 가까운 관광지인 ‘테를지’에서는 건물을 짓기 위해 땅을 파헤치는 모습을 보았다. 곧 몽골에서도 탁 트인 지평선이나 하늘을 가득 메운 별을 보기 힘들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점점 처음의 모습을 잃어 갈 것이다. 당연한 흐름이었다. 누구나 편리한 수도시설과 견고한 현대식 건물을 원하니까. 관광객인 나 역시 그 흐름에 일조하고 있었다. 여행을 좋아한다는 걸 깨닫던 순간, 그것이 길티 플레저라는 깨달음도 함께 얻었다. 달고 씁쓸한 포도, 여행.


아름다운 자연 때문에 여행을 원하지만, 내 여행이 그 자연을 파괴한다면? 여행 가고 싶은 욕망이 들끓을 때마다 나를 괴롭히는 딜레마였다. 내가 가든 안 가든 자연은 파괴될 텐데, 그냥 빨리 보고 오면 안돼? 이기적인 마음이 쉽게 우위를 점했다. 나부터 살고 보겠다며? 지금 네가 하고 싶은 유일한 게 여행이라며? 결국은 세계여행을 가겠다며 회사도 그만뒀다. 당장은 코로나바이러스라는 초유의 사태로 꼼짝없이 집에만 있지만, 상황이 가라앉는다면 여행을 가고 싶다. 부끄럽지만 아직도 그렇다.


코로나바이러스로 베네치아 운하의 수질이 개선되고 돌고래가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SNS에 돌고 뉴스에 보도됐다. 사실 가짜뉴스였다고 한다. 어쨌든 다들 설득될 만한 이야기였다. 온갖 쓰레기를 만들고 탄소를 배출하던 인간들의 이동이 대폭 줄어들었으니 자연에는 호재겠지. 코로나, 메르스, 사스 모두 인간이 자연을 너무 개발해 야생동물과 접촉한 탓에 나타나는 전염병이라니 이것마저 자연의 경고처럼 느껴진다.


쓰다 보니 이런 느낌이다. 신 포도든 쓴 포도든 네 입에 넣지 말고 당장 땅에 묻어. 그래야 포도나무가 자라나니까. 못 하겠으면 대신 묻어 주지. 넌 부끄럽다고 쓸 여지도 없이, 그냥 여행을 갈 수 없게 될 거야.


아… 진정 그런 건가요, 자연느님.




[참고]


구본권, 「“베네치아 찾은 백조와 돌고래”는 가짜뉴스」, 한겨레, 2020.3.22.

http://www.hani.co.kr/arti/science/future/933668


이재갑, 「[오태훈의 시사본부] “우한 폐렴, 환경파괴로 사람-동물 접촉 늘어난 것이 원인”」, KBS, 2020.1.24

http://news.kbs.co.kr/news/view.do?ncd=4368726&re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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