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리 Apr 15. 2020

기자포기: 어느 기자 지망생의 일 년

2020.4.15.


2016년, 기자 지망생 시절의 일기를 모아 책으로 만들었다. 제목은 '기자포기'.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지을 생각은 없었는데 지인들이 만장일치로 '기자포기'를 택했다. 요즘은 이렇게 자극적인 게 먹힌다나.


Y는 이렇게 말했다. '기자포기 좋네, 자포자기 같고'. 그 말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책 뒷면에 제목을 거꾸로 써 봤다. 명조체로 쓴 제목을 뒤집었을 때는 확실히 '자포자기'처럼 읽히는 착시효과가 있었으나, 나중에 손글씨로 바꾸면서 효과가 좀 떨어졌다. 그럼에도 손글씨의 느낌이 좋아서 '기자포기'도, 뒤집기도 유지.


제목이 뒤표지에 있는 이유는 앞표지 사진이 맘에 들어서. 가리고 싶지 않았다. 앞표지 사진은 2016년, 친구들과 속초에 가서 찍은 내 사진이다.


뒤표지에 기입된 제목



처음 이 기록을 모았던 이유는 딱 하나였다. 내가 쓰는 사람이라는 증명이 필요해서. 2년 전, 나는 써야 한다는 기억만 남은 회사원이었고 뭐라도 눈에 보이는 게 필요했다.


한글 프로그램으로 편집해 사무실에서 출력하고 서랍 속 낚싯줄로 엮은 조잡한 출력물이 이 책의 전신. 출력물 두 부 중 한 부는 옛 스터디 멤버 중 유일하게 언시*를 계속하고 있던 G에게, 한 부는 서울에서의 취준을 잠시 중단하고 본가로 내려갈 예정이던 하우스메이트 J에게 줘버렸다.


*언론고시: 언론사 입사를 준비하는 일. 언론사 입사가 고시만큼 어렵다고 해서 사용하는 말이다. 좋아하는 말은 아니지만, 편의상 사용하곤 했다.



제목도 대충 지었다. ‘모음’



두 번 다 충동적이었다. 이 기록이 저 사람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 뭘 알려줄 수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나 말고 다른 사람도 이렇게 나약하고 우울하구나 하는 느낌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덜 외롭게 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어쭙잖은 말 몇 마디보다 이 종이 한 묶음이 더 나을 것 같아서.


이상하게도 내 생각이 맞았다. 잘 읽었냐는 내 질문에 G는 '그날 집에 가자마자 다 읽었다'라고 답하더니, 훗날 비슷한 형식으로 자신의 기록도 엮어 내게 답례했다. J는 '당연하지, 한 장씩 아껴서 읽고 있다'라고 했다. 그는 내가 모호하게 썼던 글의 의미조차 귀신같이 알고 있었다.



좌측 ‘2016.zip’이 그때 만들었던 가제본.



몇 년간 미루던 독립출판 워크숍을 신청한 건 이 기록 덕분이기도 했다. 몽골 여행이든 언시생 일기든 둘 중 하나라도 만들면 되겠지. 가제본 제작 때까지만 해도 두 책을 동시에 발행하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결국은 몽골 여행기만 끝까지 제작해 입고했고, 언시생 일기는 보류.


언시생 일기를 다시 다듬기 시작한 건 최근 '사막에 누워 별을 봐야지' 북토크를 한 직후다. '사누별'에서 손을 떼도 되겠구나, 실감한 직후에 바로 작업을 시작한 셈이다.


한번 마음먹고 인디자인을 켜자 작업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일단 가제본 수준까지 완성된 원고가 있었다. 게다가 사진이 들어가지 않으니 손이 훨씬 덜 들었다.(사진이 들어가는 풀컬러 책이 얼마나 손이 많이 드는지 새삼)


내가 할 일은 레이아웃을 짜고, 공개할 것과 공개하지 않을 것을 선택하고, 필요한 설명을 살짝 덧붙이는 정도. 과장 좀 덧붙여서 원고 검토에 삼일, 인디자인에 올리는 데 하루, 표지 만드는 데 하루 걸렸다. 그 후에는 샘플을 뽑아 검토하고 수정하기를 반복.


맨 처음에 이 기록을 모아 읽었을 때에는 취준생 특유의 우울함에 마음이 쿵 내려앉았는데, 그 후 일이 년 동안은 오히려 감흥이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들여다보니, 놀랍게도, 너무 귀여웠다. 이것이 시간이 주는 특권인가. 편집하는 내내 마음껏 4년 전의 나를 놀려먹었다.


평범한 회사원이 될 기회를 놓쳐서 여기까지 떠밀려 왔어영? 당장 반년 뒤에 그 평범한 회사원이 되시는데요? 한심해 보였던 건 아니다. 단지 그렇게 초조하고 간절해하는 마음이 있었다니 예쁘고 귀엽고 그립고... 나를 상대로 한 꼰대짓이라니 참 신개념 허튼짓이다.



G와 J 덕분에 '사누별' 때보다는 훨씬 편한 마음으로 책을 완성하고 내놓았다. 취준과는 이제 먼 길을 돌아돌아 멀어진 내 지인들이 이 책을 사겠다며 연락해서 문제지... 이번에는 정말 편하게 내놓는 거니까 안 사줘도 된다고 그렇게 어필했는데 왜. 그냥 나를 너무 좋아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련다. 다 내가 너무 귀여운 탓이지.


새 책을 만들었다며 축하를 많이 받았다. 뭐든 두 번째를 했다는 건 좋은 일이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거니까. 하지만 묘하게 민망하다. 새 것을 만든 게 아니라, 예전의 것을 그저 다듬어 내놓았을 뿐이라, 축하를 받기에는 조금 모자란 기분이다. 대신 사누별 때보다는 한결 책과 나를 분리할 수 있게 됐다.


월요일부터 입고 문의를 넣었다. 책방 네 군데에서 받아 주시기로 했다. 회신이 빨리 오면 좋겠다.


부디 필요한 사람에게 가렴.




입고처는 아래 링크로.

https://linktr.ee/eveningwriter

매거진의 이전글 마감의 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