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4.20.
애틋한 이를 향해 쓰는 글은 대체로 사랑스럽다. 회사를 그만둘 즈음 나는 우연히 편지 형식의 글을 두 번이나 썼는데 둘 다 제법 괜찮다는 평을 들었다. 내가 읽기에도 그랬다. 무엇으로 시작하든 나에게로 모든 잘못을 귀책 하며 끝나는 자의식 넘치는 글보다는 읽을 만했다. 남을 생각하는 모습이 예뻐 보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너무 편하게 귀여운 글을 만드는 꼼수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내 인간관계의 울타리 중심부에는 언제나 상석이 딱 하나 마련되어 있다. 그 상석에 앉는 이들에게는 도무지 공통점이 없어서 나는 언젠가부터 이상형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한 가지 공통점이라면 나는 그들을 먼저 그 자리에 앉힌 기억이 없다는 것. 그들은 대체로, 그냥 어느 순간 거기에 있었다. 나는 관계에 있어서만큼은 마주 보고 자란 나무와만 수분하는 은행나무처럼 식물적이었고 내 기준에 맞는 이를 적극적으로 수배하는 사냥꾼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므로 가까운 사람들을 향한 마음은 언제나 양가적이었다. 왜 나는 종종 네가 못마땅하고 화가 나는데도 그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가. 내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현재보다는 맥락 때문이었기에 현재의 그와 내가 부딪칠지라도 관계를 파기할 이유가 없었다. 현재는 언제든 과거가 되어 사라지기에 그의 현재를 좋아했을 때 그 마음은 손쉽게 흘러가 버리곤 했다. 내가 먼저 누군가를 좋아하는 경우 그것은 달아올랐다 사라지는 팬심으로 기억되는 반면, 지나고 보니 이미 그를 많이 생각하게 된 경우 이것을 후천적인 좋아함이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다만 좋아하게 된 사람들이 있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