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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리 May 05. 2020

글의 압력

2020.5.5.

사람들은 내가 항상 미친 듯이 뭔가를 하는 워커홀릭인 줄 알지만 사실 나는 자주 느슨해진다. 기력도 없고 의욕도 없을 때는 나에게 아주 자비로워 버린다. 아무것도 안 할 때는 조용하고 뭔가를 할 때는 시끄럽기 때문에 다들 시끄러울 때만 기억하는 것 같다. 지난 며칠은 아주 조용히 지냈다.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고 가끔 메일이나 몇 통 쓰면서. 조용히 지낸 이유는 글을 더 잘 쓰고 싶어서다. 진짜다.


하루는 일기를 쓰려고 보니 쓸 만한 얘기가 없었다. 쓸 만한 얘기는 이미 그때그때 인스타그램에 올려 버린 뒤였다. 허, 이게 뭐지. 인스타그램을 많이 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나는 SNS가 인생의 낭비라는 말에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낭비로 쓰는 사람에게 낭비겠지. 그보다는 너무 많은 것을 실시간으로 옮겨 담아 버리는 데서 문제를 느꼈다. 글의 압력이랄까, 텐션이랄까, 밀도랄까, 그런 뭔가를 잃어버린 기분. 


차오를 때까지 기다렸다는 게 지금까지 오래 글을 쓸 수 있게 하는 거 같아요. 경험이 누적돼서 그것이 속에서 웅성거려야 해요. (박완서, 『박완서의 말』, 마음산책, 2018)


최근 이슬아 서평집 『너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어』를 읽다가 유독 이 대목이 마음에 남았다. 그동안 내게 모자랐던 게 이거였다. 속에서 차올라서 웅성거리도록 두는 것. 속에서 익어가도록 두는 것.


기록은 중요하다. 그때그때 기록해둔 일기는 구체적인 글을 쓸 때 든든한 자료가 된다. 하지만 SNS는 기록에서 더 나아가 바로 '발행'까지 해버리게 되는 곳이다. 여기에 써서 올린 것을 나중에 다시 활용할 때는 아무래도 우려먹는 기분이 든다. '게시' 버튼을 누르는 순간 그 텍스트는 일기나 초고가 아닌 '글'이 되어버리고 만다. 아주 모자라고 엉성하고 짧은 글. 그러니까 단순히 글자를 늘어놓은 활자 뭉치와 글(아주 엉망이든 뛰어나든)을 구분 짓는 것은 독자의 유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내가 바로바로 기록하고 발행하는 것에 목맸던 데에도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나는 언제나 내게 관대하다) 회사를 다녀서였을 거다. 회사라는 현실은 개인적인 글을 쓸 때도, 업무적인 글을 쓸 때도 '빠르게' 쓰고 끝내도록 나를 압박했다.


회사는 끊임없이 내게 쓸 거리를 제공했지만, 뭘 길게 생각하고 이어 나가기에는 방해 요소가 너무 많았다. 출근길에 울리는 전화벨, 카톡 아이콘에 꽃처럼 맺힌 빨간 동그라미 속 숫자, 메일함에 쏟아지는 Re:로 시작되는 볼드체 제목들, 석경 씨, 나를 부르는 목소리, 목소리, 목소리들. 오늘의 생각이 흘러가면 내일 아침에는 돌아오지 않을 확률이 컸다. 내일도 새로운 사건과 대화와 피로가 내 머리를 꽉 채울 테니까. 약속이 없고 조금이라도 덜 피곤한 밤이면 허겁지겁 하루의 잔상을 기록하기 바빴다.


회사에서 SNS를 관리할 때는 게시물의 완성도보다 적시성이 중요했다. 시작과 진행과 마감을 알리는 목적으로 쓰였던 수많은 텍스트들. 현장에서 짐을 옮기고 업체와 연락하고 여기서 저기로 뛰어다니는 틈틈이 쳐낸 것들. 해치우듯 써낸 것들. 오피셜 계정을 운영하는 자아는 그렇게까지 입체적일 이유가 없었고, 중요한 정보를 넣은 후 문제 되지 않을 만한 인사말과 이모티콘을 넣는 걸로 충분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니 쓰고 싶은 것은 많았는데 어쩐지 쓰다 보면 글이 힘없이 흐느적거려서 계속 쓸 수가 없었다. 설명과 묘사를 채워 넣는다는 생각이 들면 쓰는 일이 지루하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지금이야말로 속으로 꼭꼭 뭉쳐볼 때였다. 쓰고 싶은 것이 글 한 편을 꽉 채울 정도로 가득 웅성거리도록 생각을 하고 일상을 보내고 남의 것을 읽고. 쓰고픈 것을 참아 압력을 만든다. 글을 쓸 압력. 내 글을 찰지고 진하게 만들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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