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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리 May 19. 2020

말을 살아낸다는 것

20.5.19. 정혜윤, 『아무튼, 메모』 북토크

정혜윤은 너무나 ‘진짜’로 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나에게 중요한 것을 말하지 못한다면 그게 진짜 사는 거냐고.

나는 살아내고 싶은 말들을 썼고 그게 메모고 그게 나의 재료였다고.

메모를 통해 나는 내게 뭐가 중요하고 뭐가 없어도 되는지 알 수 있었다고.


오늘 그의 말들은 내겐 마술이었고 해방이었다.


내 삶에서 해결하지 못한 것들을 과연 써도 될까 망설여 왔다. 그런데 고민할 일이 아니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바로 그것, 내가 앓는 그것을 써야 했다. 내가 바라는 방향을 찾기 위해서 반드시 그래야 했다. 정혜윤에 따르면 글은 과시의 수단도 분출의 수단도 아니고 그저 나의 삶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글쓰기는 흔히들 자아표현이라고 하는데 저는 좀 생각이 달라요. 저한테 글쓰기는 자아 형성, 자아 해방, 자아 이동인 듯해요.
(이슬아, 깨끗한 존경, 이슬아X정혜윤, 41쪽)


언젠가 나는 내 도덕성이 내가 쓰는 글을 따라잡지 못한다고 한탄했다. 내가 바라는 초연한 나를 저 멀리 세워 두고, 기를 쓰고 그 지점까지 손을 뻗지만 닿지 못한다며 비웃었다. 실제의 내가 감히 쓸 자격 없는 말들을 허무하다 여겼다. 그게 아니었다. 원래 글은 그런 것이었다. 내가 살아내고 싶은 말들을 써서 내게 다시 보여주는 것이었다. 너 이렇게 살라고.


쓰는 순간 말은 힘을 얻는다. 나를 다그치고 위로하고 마음을 다잡게 한다. 그러니까 말은 말 그대로 마술이다. 이야기 속에서 현자와 마술사는 종종 같은 존재로 묘사된다. 왜일까, 지혜를 담은 말이 곧 마술 그 자체였기 때문 아닐까. 말은 본질적으로 마술적인 것이기 때문 아닐까. 그렇다면 마술이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뭔가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작용하는 말들의 힘을 이르는 것 아닐까.


소리 내어 말하는 순간 말은 진정 마술적인 힘을 얻는다. 내가 정혜윤의 말을 들으러 가야 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나는 정혜윤이 하는 말들을 꼭 그의 목소리로 들으러 가야만 했다. 마술에 걸려야 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울고 또 쓰던 시간 동안 생각했다. 내가 이 자리에 온 것, 그의 말을 듣고 있는 것, 이 모든 것을 마술이 아니면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정혜윤의 이야기 속에서 ‘진짜’로 산다는 것과 깨끗해진다는 것은 같아 보였다. 마음에 모순이 없고 내가 아닌 무언가를 중요하게 여기는 상태. 내게 무엇이 정말 중요하고 무엇이 없어야 하는지 아는 상태. 그의 진짜 열정 앞에서 두려웠다. 내가 헛된 열정을 좇고 있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나는 아직도 너무 나만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내가 정말 중요하게 여길 것은 무엇인가. 내 삶에 남길 단어는, 내가 말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 꿈은 무엇인가.


현재 진행형인 문제,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문제를 글로 쓰는 것은 태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현재 진행형인 문제를 써야만 바뀔 수 있는 거였다. 올해 내내 내가 마주치는 모든 말들이 내게 이르는 것은 단 하나다. 더는 동생 얘기를 쓰는 일을 미루지 말 것. 써야만 나도 바뀐다. 써야만 이 현실도 바뀐다.


내일부터 나는 진짜 내 삶에서 중요한 것을 쓰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분명 내가 듣고 넘겨 왔던 말들에 맞서야 할 것이다. 내가 모른 척했던 상식들에 부딪힐 것이다. 더는 ‘내가 모두를 설득할 수 없으니까’라며 ‘나는 안 바뀌어 에너지’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했다는 떳떳함. 그것만이 내가 구원받을 길임을 알고 있었고, 항상 그것을 바라 왔으면서 차마 손을 뻗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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