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리 Dec 31. 2020

연말정산

2020년을 보내며

끓는 물을 텀블러에 붓고 녹차 티백을 넣었다. 한 김 식은 녹차를 마시고 귤을 까먹으며 키보드를 두드리는 2020년 마지막 날.


요즘은 미래를 계획하지 않는다. 지금 나에게 미래는 계획하기보다는 짐작하는 것이다. ‘뭘 해야지’보다는 ‘뭘 하겠지’가 됐달까. 계획하지 않음. 과연 좋은 일인가? 나는 내 미래를 애써 개척하기보다는 관성에 맡겨 두는 게으른 사람이 된 걸까? 아니면 내가 그토록 원하던 어떤 ‘궤도’에 드디어 진입해서, 이제는 힘을 덜 들이고도 내가 원하는 방향의 삶에 다가갈 수 있게 된 걸까? 둘 다 맞을 수도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둘 다 틀리게 될 수도 있다.


올해는 내가 20대가 된 이후 가장 우울하지 않은 해였다. 퇴사 덕분인지도 모른다. 지난 3년간 나를 가장 괴롭힌 건 퇴사하고 싶다는 생각이었으니까. 예전에 정희진의 강의에서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하는 상황이 가장 괴롭고 둘 중 어느 하나라도 선택하면 덜 괴롭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 나는 정희진의 말을 회사를 받아들이거나 퇴사를 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덜 괴로워진다는 말로 받아들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회사를 받아들이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선택지였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내게 남은 선택지는 ‘퇴사를 고민하는 것’과 ‘퇴사하는 것’뿐이었다.


직장도 수입도 없는 백수였지만 내가 밉지 않았다. 올 한 해만큼은 죽을 쑤든 밥을 해 먹든 내 꺼라고 여기기로 했다. 여행을 가려던 계획이 전염병으로 틀어졌지만 새로운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집에서 책을 만들고 운동을 하고 국에 밥을 말아먹으며 지냈다. 이게 가능했던 건 전적으로 나를 믿고 거둬 준 부모님 덕분이다. 외로움에 시달리지 않은 건 지속적인 안부로 내가 고정적 사회생활을 하지 않는다는 걸 잊게 해 준 주변 사람들 덕분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 느슨하게 지내본 건 처음이었다. 20대 이후는 말할 것도 없고, 돌이켜 보면 10대 시절에도 나는 항상 처절한 목표가 있었다. 아니, 그때가 가장 혹독했다. 시험 한 문제 틀렸다고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몸살에 시달리곤 했지. 어휴.


‘고요한 해를 돌았다’라고 적었다가 지웠다. 끔찍했던 해를 안전한 곳에서 보냈다. 이런 종류의 운은 감사할 것이 아니라 조심해야 할 눈가리개다. 올해는 성과를 나열하며 마무리하고 싶지 않다. 올해 쓴 것을 모아 정리하려는 시도도 그만두었다.


그저 다음의 나를 짐작해본다. 한동안 쓰지 않았던 나는 다시 바쁘게 뭔가를 만들고 보여주게 될 텐데, 앞으로 내가 쓰는 글은 이전과는 다를 것이다. 그런 예감이 든다. 참, 구체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은 글이다. 이 글에는 믿음만 있다. 내가 그러할 것이라는 믿음.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거라는 믿음.


찬물로 다시 우려낸 녹차를 마저 마셨다. 귤 두 개분의 껍데기가 수첩 위에 널브러져 있다. 손에 큼직한 비닐 꾸러미를 든 채 일찍 퇴근한 아빠는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동생은 제 방에서 게임을 하고 있다. 곧 엄마가 돌아올 시간이다.

다들 언 글루미 뉴 이어.

매거진의 이전글 인간관계의 보조바퀴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