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미디어의 기자에서 B2B SaaS 스타트업의 콘텐츠 마케터로 이직했다.
이직 이야기는 길게 썼다가 서랍에 넣어놨고...............
일단은 여기 와서 새로이 알게 된 콘텐츠의 쓸모에 대해 써 볼까 한다.
처음 이 회사 사람들과 티미팅을 할 때 계속 질문했다. 정말 제가 필요하시냐. 정말 콘텐츠가 필요하시냐. 콘텐츠는 매출로 직결되지 않을 텐데 정말 괜찮냐. 아직 적자인 회사에서 이런 '비용'을 감수할 수 있는 거냐.
B2B 세일즈에서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이러이러해서 필요하다, 다들 열심히 설명을 했지만 솔직히 그때는 귀에 잘 안 들어왔다. (죄송해요) 콘텐츠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회사가 좀 많아야지. 진짜 중요하더라도 당장 성과가 뜨뜨미지근하면 그걸 대체 누가 기다려 줄 수 있겠어? 하는 깊은 불신......
근데 들어와 보니까 알겠다. 진짜 좀 중요하다는 걸. 왜 하필 스타트업 미디어에서 기업, 산업 분석 콘텐츠를 쓰던 나를 데려왔는지도 알겠다.
이 회사의 세일즈 전략은 '내가 너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걸 어필하는 거다. 나랑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당신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고, 우리는 기업들의 고민과 솔루션을 꿰고 있으니 가까이만 지내도 도움이 될 거라는 메시지.
고객이 된 이후에도 적극적으로 돕는다는 스탠스. 고객사들이 잘 생존하고 성장해야 계속 우리 프로덕트를 쓸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고객과 함께 성장한다는 걸 모토로 삼는다. 어쩐지 이커머스 플랫폼들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B2B SaaS도 일종의 플랫폼 맞지, 하는 생각을 여기 와서 처음으로 했다.
재밌게도 나는 이들과 거의 똑같은 스탠스를 취하는 회사들을 취재해 왔다. 바로 VC. VC들도 스타트업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걸 굉장히 어필한다. 신생이고 규모가 작은 VC일수록 더더욱. 도움을 줄 수 있어야 스타트업들이 투자를 받고 싶어할 거고, 도움을 줘야 포트폴리오사들이 성장해서 투자 수익이 날 테니까. 항상 VC가 B2B 비즈니스를 하는 회사들이라고 생각해 오긴 했는데, 이렇게까지 비슷할 줄은 몰랐다. (참고로 VC들도 자기들이 플랫폼이라고 한다)
어느 VC의 대표님을 인터뷰할 때 '빠르게 성장하는 스타트업에 도움을 주려면 우리도 똑같이 빠르게 성장해야 가능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것마저 똑같다. 성장을 하려면(고객사를 늘리는 성장) 성장을 해야 하는(도움을 줄 수 있는 고객사의 범위를 확장하기 위한 성장) 특이한 구조인 셈이다.
콘텐츠가 필요한 것도 '고객을 잘 도와줘야 성장할 수 있는' B2B 비즈니스의 속성 때문이다. 고객들이 읽고 도움이 될만한 콘텐츠를 만들면 '내가 너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를 보여줄 수 있으니까. 실제로 세일즈 미팅에 따라가거나 콜을 들어 보면 기존 고객들의 성공사례 콘텐츠를 엄청 잘 활용한다. 솔직히 '성공사례는 너무 홍보잖아...?'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기업들의 사례를 절실하게 궁금해하는 기업들이 진짜로 많은 걸 보고 좀 놀랐다.
그러니까 내가 써야 하는 건 그냥 비즈니스에 도움이 되는 콘텐츠 그 자체.
그런데 재밌게도 이전 회사에서 쓰던 것도 비즈니스에 도움이 되는 콘텐츠였다.
(물론 이 회사에서 만드는 콘텐츠들이 당장은 '기승전-우리 프로덕트 좋아요'이긴 하지만, 그 약간의 홍보 뉘앙스도 다 뺀 뭔가를 해보고 싶어하는 곳이다. 그래서 온 거고.)
이전 회사에서는 우리의 콘텐츠를 '의사결정권자들이 많이 본다' 정도로 이해했는데, B2B적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한 것 같다. 생각해 보면 거시적인 비즈니스 트렌드나 기업들의 생리를 분석하는 건 개인의 삶에는 당장 크게 도움이 안 된다. 다 기업을 잘 운영하기 위해 알아야 하는 것들이지. 예를 들어 '월 1000만원 버는 법'이 B2C적 콘텐츠라면, '자기계발 시장의 월천팔이 트렌드 분석'은 B2B적 콘텐츠랄까. 보다 거시적인 관점과 깊이를 지향하는 콘텐츠는 B2B적 콘텐츠로 흘러가게 되는 것 같다.
물론 언론사에서 글을 쓸 때와는 기본적인 메커니즘이 아예 달라서 적응 중이기는 하지만, 내가 전혀 몰랐던 '글'의 쓸모를 안다는 것은 너무 기쁜 일이다. 새로운 세계가 추가되고 시야가 확장되는 기분.
그리고 그 세계들 중 어디에도 국한되지 않는 '경계 위의 글'을 쓰는 게 목표다. 언제나 그랬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