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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리 Aug 03. 2024

역삼 콘텐츠 북클럽 첫 모임 후기

'글쓰기에 미래는 있는가' 빌렘 플루서

드디어 첫 모임을 진행한 '역삼 콘텐츠 북클럽'.

첫 책은 빌렘 플루서라는 미디어 학자의 '글쓰기에 미래는 있는가'라는 책이었다.

다녀와서 후기를 쓰다 보니 생각보다 길어져서 브런치에도 아카이빙.




1. 책이 되게 안 읽히고 빡셌는데 다들 잘 읽어와 주셨다. 심지어 나보다 재밌게 읽은 분도 있는 듯. 여기서 약간 들떴던 거 같다.

2. 첫 질문은 '챗GPT 이전과 이후의 글쓰기는 어떻게 달라질까?'. 나는 책을 읽고 나서 각명문자와 표면문자, 타이핑 문자, 그 다음의 문자는 어쩌면 '프롬프트'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근데 진짜 그렇게 될까? 챗GPT 이후의 글쓰기가 정말 그전과 달라질까? 그냥 호들갑일까?

모임에서도 이야기가 나왔지만 글 좀 쓴다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챗GPT를 작업에 안 쓴다. 그냥 갖다 쓸 퀄리티의 결과물은 안 나오고, 굳이 초고를 뽑아서 고치는 게 더 번거로우니까. 기술이 더 발전한다면 얘기가 달라질지도 모르지만, AI의 성능이 꼭 지금보다 더 좋아지기만 할 거란 보장은 없다.

즉, '상위권에는 영향이 없다'. 잘 쓰고픈 욕구와 필력과 실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끌과 정을 쥐어주든, 펜을 쥐어주든, 타자기를 쥐어주든, AI를 쥐어주든 좋은 글이 나온다. (그렇다면 문제는 중위권 이하에서 발생하는 현상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꽤 재밌었던 이야기로는, 개발자 블로그 쪽에서는 이미 20% 정도의 본인 소스에 챗GPT로 나머지 80%를 더해서 글을 쏟아내는 흐름이 있다고 한다. 이렇게 될수록 어떤 좋은 경험을 갖고 있느냐가 차별화 요인이 되는 것 같다고. 경험은 챗GPT로 메울 수 없는 것이니까.

3. 앞으로의 시대에는 '고전'이 더이상 등장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개별 콘텐츠가 점점 가벼워지고 휘발성이 커질수록 몇십 년, 몇백 년 뒤까지 읽히는 콘텐츠가 나올 가능성은 낮아지는 것이 아닌가.

여기에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반론이 있었다.
(1) 우리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큰 임팩트를 남기는 텍스트는 출현하지 못할 것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그랬고, 이 현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오히려 '취향의 파편화' 트렌드다. 
(2) 앞으로도 '고전' 혹은 시대를 상징하는 콘텐츠, 두고두고 인용되는 콘텐츠는 계속 등장할 거다. 다만 그런 콘텐츠의 생존율은 언제나 낮았을 거고. 이제는 콘텐츠의 형태도 더 다양해지고 있을 뿐.

4. 그렇다면 과연 미래에는 글쓰기를 대체할 수 있는 다른 기록 수단/형태가 생길 것인가.

사실 나는 글이 대중적인 미디어의 지위에서는 밀려났어도, 지금까지 인간의 지적 연구 결과들을 축적하는 데에는 필수였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영상, 혹은 AI와 관련된 무언가가 아예 그 포지션을 대체할 수도 있을까?

생각지 못한 답이 크게 두 가지 있었는데.
(1) 지식 정보를 전달하는 데에는 말이 글보다 효율적일 때도 있다. 글에 '정보 압축력'이 있다면 말에는 '전달력'이 있달까. 생각해 보면 사람들은 굳이 인터넷 강의나 수업으로 지식을 습득하곤 한다. (글이 최고라고 생각한 글 꼰대 반성해)
(2) 일종의 '기록용 AI' 같은 것이 등장해서 모든 형태의 데이터들을 입력해 놓고, 필요할 때 필요한 부분만 물어보게 된다면. 기록&사고&검색의 형태 자체가 아예 달라질 수 있겠다는 상상.

5. 그래서 이 시대에 텍스트 콘텐츠 비즈니스란 어떻게 가능한가. 오히려 오프라인 유료 콘텐츠, 그러니까 책만이 살아남지 않을까. 숱한 디지털 텍스트 콘텐츠 비즈니스 중에 그래서 기성 출판사를 넘어선 곳이 있는가. 아무리 출판업계도 위기라지만 그걸 넘은 곳이 있는가. (출판업계인도 오늘 모임에 참석할 뻔했는데 너무 아쉽다...!!!!!!) 

현실적으로 광고 비즈니스로 넘어가게 되는데 광고 콘텐츠로 선을 지킨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뭣보다... 쓰고 싶은 글로 비즈니스하려고 하니까 어렵고 안 되는 게 아니겠는가.

라는 이야기로 마무리를 하게 되는 바람에 끝이 씁쓸했다 ㅋㅋㅋㅋㅋㅋㅋ (이게 모임 내용 복기가 되네..)

6. 다들 말씀을 잘 하셔서 재밌었는데 내가 계획했던 한 시간 반으로는 택도 없었다. 세 시간 이야기함. 콘텐츠쟁이들을 모셔놓고 한 시간 반이라니. 끊어야 하는데 너무나 재미있었다.

7. 다음 모임 때에는 다들 뭘 좀 남겨서 가져가실 수 있도록 이런저런 장치를 만들어 봐야겠다는 생각.

8. 모임 때 못 꺼낸 화두는, AI 생산&매체 다변화의 시대에 결국 궁극의&최후의 콘텐츠는 개별 인간 그 자체뿐인 것 같다는 이야기. 우리는 모두 콘텐츠이자 인플루언서이고, 텍스트와 비디오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자기 자신을 더 작은 단위의 콘텐츠로 재생산하는 시대다... 라는 생각을 항상 한다.

9. 발제문을 쓸 때 나는 '글=콘텐츠=오래 남아야만&영향력이 커야만 가치있다'라고 생각했던 거 같은데, 저 등호는 다 틀렸다. 모든 글이 콘텐츠가 아니고, 모든 콘텐츠가 글인 것도 아니다. 모든 글이 오래오래 남기 위해서만 쓰이는 것도 아니고, 그저 소통을 위해 쓰이기도 하지. 한동안 '소통'이라는 맥락을 너무 잊어버리고 글 써온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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