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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경 Sep 13. 2022

나약한 존재 인간의 '자신이 지구의 정복자라는 착각'

에드워드 O' 윌슨 : '인간 존재의 의미'

* 출근하며 쓴 글이라 다소 두서없이 읽힐 수 있습니다.


 최근의 나는 26년이라는 짧은 지난 인생동안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수많은 생각과 고민에 잠겨 있다. 돌이켜보면 대학 입시, 학점, 인간관계 관리, 취업 등 여러 요소에 정신없이 치어살며 눈 앞의 고민 외에 다른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비로소 지금, 그 고민을 할 때가 온 것이다.


최근 주된 고민의 주제는 '인간 존재의 의미와 본질, 그리고 나약함'이다. 처음 이 고민을 하게 된 것은 불과 한 달 반 전,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E' O' 윌슨) 교수님의 저서 '인간 존재의 의미'를 읽고 나서부터였다. 책의 서론만 읽고도 가슴이 뛰고 인생이 뒤바뀐 경험이 있는가? 나는 이 책을 읽고 생애 처음으로 그런 감정을 느꼈다.


 이 책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나약한지, 그러나 타 생명체와의 차별화를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하는 지를 서술한다. 인간은 육식 생활로 인해 뇌 용량과 크기가 거대해지며 고도화 된 지능을 획득했고, 기술 발전을 이룩하며 생태계 최상위포식자로 자리잡았다. 고도화된 문명은 '인간성'이라는 개별 단어를 만들어내면서까지 타 생물체를 같은 생명이 아닌, 우리보다 미개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폄하한다.


 사회를 이루고 협력해 살아가는 것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개미조차도 이룩한 집단적 행태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사회적 행위인 것으로 착각한다. 인간은 탐사선을 통해 달로, 태양계의 다른 행성으로 가며 지구를 넘어 우주까지 정복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인류 발명품 상 최대로 지구를 멀리 벗어난 보이저1호 또한 우주의 단위에서는 0.0000001픽셀도 움직이지 않은 셈이다.


 최근 IPCC에서 경고하는 이상기후 위기, 지구온난화는 인간의 이기적인 산물의 집결체다. 특히 작년부터 이상적인 가뭄, 폭우, 화재 등이 전세계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다. 누군가는 '지구가 멸망하는 것이 아니냐'고 걱정스레 얘기한다. 그러나 사실 정확히는 지구가 아니라 인간이 멸망하는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해 경기침체가 발생했는데, 매연과 스모그로 인해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산 봉우리가 불과 그 짧은 사이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인간은 지구에 이만큼 해악이다. 인류가 멸망한다면 자연은 곧 원래의 모습을 되찾고 푸르른 일상을 회복할 것이라는 과학자들의 예이 있기도 했다. 결국 지구온난화는 인간이 격화시킨, 그리고 인간이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국내의 유명한 생물학자인 최재천 교수님은 우리를 미지근한 물 안의 개구리로 비유한다. 뜨거운 물에 들어간 개구리는 열기에 놀라 금방 도망가기에 생존한다. 그러나 미지근한 물 안의 개구리는 자신이 서서히 익는 줄도 모르고 그 안에 있다가 죽어버린다. 개구리의 하찮은 지능때문이 아니냐고 비웃으며 넘기기에는 기후변화 문제를 대하는 우리 현재 모습이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인간은 이만큼 나약한 생명체다. 지구의 정복자도 아니거니와, 의료기술이 없으면 평균 38년까지밖에 살 수 없고 도구나 과학기술이 없으면 타 생명체와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이는 내게 최근까지 많은 고통을 안겨주었다. 인간은 우주 단위에서는 원자, 아니. 쿼크 단위보다도 작을 생명체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시공간조차도 상대적인 것이며 절대 지배할 수 없다. 우리가 살아있는 시간은 우주 역사상으로는 1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다. 거기에 지구의 자연은 회복을 위해 우리가 멸망하기를 원한다(정확히는 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대체 인간 존재의 의미는 무엇이며, 우리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나는 대체 왜 살아가고 있는가?


 한 편으로 인간이 생각보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은 심심찮은 위로를 안겨준다. 내가 지금 시기하고 다투는 사람들, 불안해하는 감정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위로 말이다. 즉, 나는 내가 원하는대로 마음 편히 살아도 되는 영향력 없는 개체이다. 그러니 주변에 너무 큰 신경을 쓰거나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이것은 '그럼 대체 왜 열심히 살아야하는가?'의 고민을 낳는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챙기던 학업, 인간관계, 높은 포부와 비전들이 모두 덧없게만 느껴진다. 먹는 것도, 노는 것도, 자는 것도 기쁘지 않고 그저 태어난 김에 생명을 연명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꿈을 꾸었다. 자연을 사랑하는 생물학자 한 명이 있었다. 그에게 자연이 묻는다. '네가 정말로 우리를 사랑한다면 우리를 위해 죽어줘. 인간이 없어야 우리는 행복해.' 마치 트롤리딜레마와도 같은 자연의 부탁을 들은 생물학자의 심정은 과연 어땠을까? 그리고 그 다음 내린 결단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 다음 꿈은 물리학자의 꿈이었다. 그 꿈에서 물리학자는 네가 인식하는 시공간의 단위는 모두 상대적인 것이며, 너는 죽을 때까지 파동-입자의 이중성을 이해하지 못할 멍청한 존재라며 비웃음을 당했다.


 마지막 꿈은 천문학자의 꿈이었다. 거기에서 우주는 그가 발명한 보이저호가 태양계를 벗어났다는 사실을 듣고 비웃으며 어차피 단 1픽셀의 범위도 벗어나지 못한 미약한 미동이 아니냐고 따끔하게 말했다.


 나는 지금 큰 기로에 서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대단하고 큰 것이라 생각하며 살았던 지난 26년의 생각이 모두 착각이고, 나는 벗어나려해도 인간이라는 한계에 묶여 우주의 픽셀단위로 살다 죽을 것임을 인지해버렸다.


이 사실을 나보다 진작에 눈치 챈 현명한 생물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들은 그럼에도 열심히 연구에 몰두하며 더 나은 미래를 그리고 있다. 여건이 허락한다면 그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어찌하면 그렇게 생활할 수 있느냐고. 그리고 지금의 나는 어떤 마음의 결단을 내려야하느냐고.


 이는 절대 생의 의지가 없음을 드러내는 글은 아님을 명확히 밝힌다. 나 자신의, 더 나아가 인간 존재의 의미를 태어나 처음으로 진지하게 고찰하는 과정이다. 이제 그 고민을 할 때가 되었다.


 우리가 걸어가면서 그렇게 우습게 여겼던 개미 한 마리의 목숨, 한 개미의 집단만큼이나 나약하고 힘이 없는 존재인 인간. 그렇다면 그 나약한 존재의 의의에는 가치가 없는 것일까? 인간 본연의 한계를 인정하고 살기에 우리는 너무 특별한 존재라는 환상에 젖어 살았다. 그래서 더 괴로운 것일지도 모른다. 앞으로 내가 어떤 해답을 찾을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당장은 이런 고민들에 하루하루 힘들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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