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을 기억하며
비가 많이 내렸다. 그날은 천둥번개와 함께, 그렇게 비가 모질게도 내렸다.
새벽쯤 되었을 것이다.
문득 밖에서 나는 소리에 나가보니, 엄마가 냉장고에 등을 기대 앉아, [비가온다..어떻하니..]하고 흐느껴운다.
반쯤 정신나간 표정에, 그렇게 허공에 대고 엄마가 흐느끼는 모습은, 이미 20년이 훌쩍지난 지금도 고통으로 남아 있다. 그때, 나는 그 고통을 헤아릴 수 있었을까. 아마도 내가 엄마였다면, 나는 살아도 산게 아니었을 것이다.
그날은 여느때와 다름없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간식을 먹은 후, 독서실로 향하던, 지극히도 평범한 하루였다.
독서실로 향하던 그 시장골목 어귀에서, 사람들이 웅성였다. [건물이 무너졌대]. 딱히 귀를 두지 않았던 것은, 그러한 사건사고가 나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안하기 때문이였을 것이다.
[백화점이 무너졌대]
순간 가는 걸음을 멈췄다. 내 귀에, 그 백화점의 이름이 들어오자, 나는 가던길을 멈추고 엄마아빠를 찾으러 다시 집으로 갔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핸드폰이 있던 시절도 아니니, TV나 라디오로 소식을 전하지 않는 이상, 정보가 빠르게 들어오지 않았던 터였다. TV 3사는 2일간을 다른방송은 전부 하지 않은채, 백화점 붕괴만을 뉴스속보로 내고 있었다.
그렇게 힘든 시간은 흘렀다. 나와 내 동생은 형을 잃었지만, 우리 부모는 아들을 잃었다.
그 깊이의 차이는 차마 헤아릴 수가 없다는 것은, 지금 내가 자식을 낳아 기르다보니 알게 된, 그래서 부모님에게 제일 미안하고 죄송스러운 감정일 것이다.
[오빠가 발견됐대.......]
새벽 5~6시정도 되었던것 같다. 중학생이였던 여동생이 나지막히 내 귓가에 속삭이며 방을 나갔다.
형과 방을 같이 쓰던 나는, 형의 책상을 보고 있다.
내가 기억하는 형과의 마지막은 이런 대화였다. 사고 전날,
[너도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교가야 이런거 할 수 있다]라고 말하던, 이제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을 맞이한 형이였다. 나에게는 무척이나 엄했지만, 그해를 맞이하기 직전, 그와 나는 작은 식탁에 앉아, 그의 꿈에 대해 들었었다. [나는 부모님과 너희 가족과 나의 가족이 함께 사는 집을 만들겠다]고 했었다. 그리고, 먹고 난 그릇을 씻는데, 그는 [차가운물 보다, 뜨거운물이 설거지에는 좋다]라고 말하던 기억이 난다. 이 말은 지금도 설거지 할때마다 떠오른다.
우리 마음약한 엄마는, 그 사고당일, 형과 함께 지하철역을 걸어갔다.
그리고는 형이 그랬다. [이번에는 수석장학금을 못받을거 같아. ]라고 말이다. 딱히 집안사정이 어려운것은 아니였지만, 공부에 취미가 붙은건지, 대학1학년때 차석과 수석을 해서 장학금을 받던 형이였다.
엄마는 신경쓰지 말라고 했지만, 그말을 하고, 백화점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러가는 형의 모습이 지금도 뼛속 깊이 남아 있을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못해 쓰리기까지 한다.
형이 사고로 떠난 이후, 그 사정을 알리없는 학교에서 성적표가 날아왔다. 과 수석이였다.
그 성적표는 아직도 있다. 나에게 만지지 말라고 항상 꾸짖던 CD플레이어와 당시 공부했던 책과 플로피디스크, 형의 물건을 모아 버리던 곳에서, 여동생이 마지막까지 챙겨온 12장의 사진이 그에 대한 이생의 전부인 것이다.
사람은 언젠가 떠나지만, 그 떠남에 있어, 부모보다 먼저 떠나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남은 사람들의 아픔과, 그 아픔으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은, 그 정도가 절대 작아지지 않고, 오히려 더 커져, 평생 치유되지 않고 계속 남아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