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우리들은 미쳐있었다
2002년 5월.
그 전까지만 해도, 한국국민이나 언론은 하나같이 히딩크감독에게 불안감을 보여왔다.
그가 밑아 온 대표팀은 보잘것없는 성적들로 가득했지만, 그는 항상 당당했고, 국민들의 불안과는 달리, 대표팀은 계속 성장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렇게 월드컵을 바라보고 있던 우리들에게 빨간옷을 입고 모두 밖으로 뛰쳐 나가게 한, 그 시발점이 된 경기가, 개인적으로 그해 5월말에 제주 서귀포에서 열린 잉글랜드와의 평가전이였다고 본다.
그때까지 한국 선수단에 쏟아진 관심은 대부분 [불안감]이였고, 월드컵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엄청났으나, 경기장에 빨간옷을 입고 오진 않았었다. 물론 그 전에 스코틀랜드와의 평가전에서 4:0 대승을 거뒀으나, 사실 스코틀랜드가 그저 그런팀으로 알고 있었고, 그 경기는 예선에서 만날 진짜(?) 유럽팀의 맛보기 정도 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민들은 스코틀랜드 경기 이후 [오~ 꽤 잘하는데] 정도로만 인식되었지, 폭발적인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고 본다.
잉글랜드는 피파랭킹 12위였다. 항상 따라붙는 축구종가라는 타이틀이 있을만큼 화려했으며, 그중에는 베컴과 같은 스타플레이어도 있는 엄청난 팀이였음에 틀림없었다. 당시 한국은 랭킹 40위로 소위 말해 [쨉이 안되는] 상대였다.
그러나 그날 그 경기 이후, 국민들의 엄청난 관심은 [폭발적인 관심]으로 바뀌었다고 본다. 물론, 평가전이였기에 잉글랜드 선수들이 몸을 사렸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월드컵에서의 [단 1승]을 염원하였던 우리들 입장에서는 [뭔가 가능도 한거아냐?]라는 일말의 기대감을 가지게 해주기에 충분했었다.
당시, 언론은 16강진출을 염원했으나, 실질적으로 월드컵에서 1승만해도 [엄청나게 잘했다]라고 칭찬받을 수 있는 그런 분위기였다고 본다. 아쉽게도 그때까지 우리의 월드컵성적은 [4무10패]였기 때문이고, 그게 현실이였다.
[Be the Reds]
어느 디자이너의 폭발적인 감성으로 제작된 이 빨간티셔츠는 아마도 비공식 한국에서 가장많이 팔린 티셔츠가 아닐까 싶다. 그때 당시에는 이 티셔츠의 인기가 하늘을 찔러, 출처도 알 수 없는 가짜티셔츠를 포함해, 거리마다 모두 이 티셔츠를 입고 응원을 했으니, 그 빨간색의 물결은 상대를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어떻게 R에서 12를 떠올렸는지, 그래서 [12번째 선수가 되자]라는 문구를 고안했냈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짝짝짝짝짝~ 대~한민국]이라는, 지금까지도 울려펴지는 그 함성이 같이 했을때의 시너지 효과는, 상대방을 압도하기에 충분하지 않았을까 한다.
그렇게 시작된 폴란드 전. 사람들은 당시 38위의 피파랭킹만 두고 약체다 어떻다 말을 했지만, 당시 치열한 유럽예선을 1위로 올라온 상당히 강팀이였다. 그래서, 실제로 한국언론에서는 폴란드보다는 미국전에서 1승을 거둘것으로 기대와 예상이 있었다. 그러나, 그 미국조차도 피파랭킹만 보면, 잉글랜드 다음으로 높은 13위였으니, 누구하나 만만한 상대가 없는, 상당히 무모한 기대였음에는 틀림없었다.
폴란드전에 황선홍의 논스톱 발리슛은 예술에 가까웠다. 이을용이 가볍게 안쪽으로 올려준 공을, 황선홍은 멈춤없이 왼발로 가볍게 쳐 넣었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연결의 깔끔한 슛이였다.
아는지 모르지만, 황선홍은 황새라는 별명의 당대 대표 스트라이커였으나, 미국월드컵이후, 가장 욕많이 먹는 스트라이커 이기도 했다. 특히, 당시 미국월드컵 볼리비아전에서 보인 그의 플레이는, 지금까지도 두고두고 회자가 되는, 아마도 본인에게 가장 부끄러운 경기가 아니였을까 한다. 다만, 지금 손흥민과 같은 걸출한 스트라이커 하나 없었던 그 당시 우리로서는, 한국축구의 기대감이 절망으로 변할때, 골을 기록하지 못하는 스트라이커에게 모든 화살을 쏘는 것으로 화풀이를 했던 것도 사실일 것이다.
순간, 1998 프랑스월드컵 멕시코전에서 하석주가 선제골을 넣고, 조금 있다가 바로 퇴장당하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넣어도 불안한 건, 그만큼 우리축구가 당시 우리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해서가 아닐까. 저 한골만 잘 지키면 되겠다라는 생각을 하다가도, [이러다가 이길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한건, 유상철이 후반에 쐐기를 박은 득점 때문이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평가전은 그저 운이 좋았던 것이 아니였다.
그렇게 경기가 끝나고, 16강에 대한 얘기들이 거의 확신에 차, 기정사실처럼 기사화되었다. 그때까지 월드컵에서 단 한경기도 이기지 못했던 아시아 축구의 강자를 자신했던 한국이, 사상 첫 1승에 16강을 논한다는 건, 외국언론이 봐서는 웃긴 얘기일 수 있다. 하지만, 그때 당시 대한민국의 분위기는, 이미 16강에 다달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다음경기는 미국이였다. 마지막 상대는 피구라는 슈퍼스타가 버티고 있는 포루투칼이였으니, 이길 가능성은 희박할 것이고, 16강을 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미국을 잡아야 했다. 가자! 16강! 이라는 대문짝만한 글들로, 당시 신문지면은 가득차 있었다.
그때 이을용이 패널티킥을 하기 위해 공을 바라볼때까지, 우리는 [이러다 미국도 잡는거 아냐]라는 꿈에 부풀어 있었고, 그가 패널티킥을 실패했을때, 전국민은 한순간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니 있었을 것이다.
그 어마어마한 부담을 안고 뛴 이을용은, 나중에 안정환이 만회골에 가장 많이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 만약 그대로 경기가 졌다면, 그의 미래에 커다란 오점을 안고 사는, 터키리그 진출따위는 그의 경력에 올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포르투칼이다.
사실, 포르투칼은 첫 게임에 고전했으나, 바로 전 폴란드경기를 4:0으로 가볍게 눌러버린 진정한 랭킹 5위의 면모를 과시하며 서서히 페이스를 올리던, 그런 어마무시한 팀이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사기는 이미 오를대로 올라, 천장을 뚫고 하늘로 올라갈 정도 였으며, [설마 우리가 포르투칼을...]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이러다가 포르투칼"도" 잡는거 아냐]라는 출처도 알 수 없는 자신감으로 가득차 있었다.
여기서 루이스피구에 대해 잠깐 집고 넘어가자면, 2000년에 FC바로셀로나에서 레알마드리드CF로 우여곡절<?>끝에 넘어와, 2000년에 발롱도르와 2001년에 FIFA올해에 선수로 뽑힌, 당시 공식적으로 세계 최고의 선수였다. 물론 그 다음해에 약간 주춤했으나, 그를 그렇게 만든 사람이 지네딘 지단이였으니, 조금은 이해할만도 할 정도다.
그렇게 세계축구를 잡솨드신<?> 피구는 당시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송종국의 밀착마크로 생각보다 고전했고, 피구를 포함, 뭔가 포르투칼팀은 짜증이 많이 나 있었다. 그도 그런게, 이런 듣보잡 한국하고 경기하는데, 골을 기록하고 있지 못하는 자신들의 플레이가 맘에 안들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경기는 거칠어지고, 냉정을 잃기 시작했다. 결국, 포르투칼은 두명이 퇴장당하는 악조건이 되었고, 월드컵 역사에도 남을 것 같은 박지성의 가슴 트래핑후 슈퍼골로, 우리들은 16강이라는 말도안되는 결과를 얻었다. 사실, 동점만 되도 16강에 오를 수 있던 랭킹3위의 포르투칼이였지만, 그들의 월드겁은 거기까지 였다.
이렇게 16강에 올랐을때, 대한민국의 분위기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모든 뉴스의 헤드라인은 축구였다.
대한민국의 경기가 끝난 다음날에 목이 쉰 사람들이 주변에 허다했고, 당시 대학생들을 위해, 어떤 교수님은 그런 피곤함을 이해해 주시고자 휴강을 하는 진풍경도 있었다. 오히려 [그 교수님 휴강안해준대?]라고 반문하고 다니는 애들이 있을 정도였다.
경기가 끝나도 끝난게 아니였으며, 길거리 응원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응원문화로 인해, 대한민국은 대동단결 하나가 되었던 그런 해이다. 모르는 사람과 어깨동무하며 이밤이 새도록 응원에 노래에 갖가지 퍼포먼스를 하고, 어느치킨집과 맥주집사장님들은 그날 손님들에게 술값을 받지 않았었다. 지나가던 차위에 올라가서 응원을 해도 누구하나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 버스들까지도 응원에 맞춰 크락숀(에어혼)을 울려대던, 경찰차마저 사이렌으로 회답하던, 그야말로 대한민국 전체가 들썩였던 시기였다.
정말 대한민국이 월드컵 하나에 미쳐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그 열기를 표현할 방법이 없다.
I am still hungry
히딩크감독의 다음상대는 아주리(파란색)군단, 빗장수비(카테나치오 시스템)로 유명했던 이탈리아로, 그는 경기를 앞두고 거침없이 말을 쏟아낸다. 그 말 하나하나에 온 국민들은 이상한 기대감으로 가득차게 된다. 할 수 있다!
이탈리아에는 FC인테르밀란에 99년 최고 이적료를 받았던 크리스티안 비에리라는 엄청난 거물이 있었다.
말그대로 거물이였는데, 복싱선수에서 축구선수로 전향했다는 말이 이해되는 다부진 몸이 압도적이였다. 김태영의 콧뼈도 부러뜨린 그의 플레이는, 평소 잔기술없이 오직 힘으로 몰아붙이는 스타일로, 당시 한국선수들의 피지컬(몸상태)로서는 상대하기 상당히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물론, 월드클래스 골키퍼인 부폰도 있었다.
국민들은 [Again 1966]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1966년 당시 1:0으로 북한한테 진 이탈리아를 자극하였지만, 사실 이탈리아 경기때 우리는 많이 밀렸다. 초반의 적극적이였던 움직임은 안정환이 PK찬스를 잃은 실망감때문이였을까, 이전 경기와는 많이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뭔가 체력은 안되면서, 정신적으로 버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후반이 되었고, 히딩크는 이탈리아가 문을 걸어 잠그는 교체를 하자, 후반부에 공격수를 대거 투입시켜 분위기 반전을 바랬었다. 그러나 비에리의 그 한 골을 넘기는 쉽지 않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쉽지만 여기까지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나는 그 참담한 심정에 경기종료 직전에 [에휴~~]하면서 화장실을 갔는데, 갑자기 건물이 요동침을 느꼈다. 설기현의 동점골. 무슨 드라마도 이런 드라마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리고, 연장에 터진 안정환의 골은,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가장 짜릿한 골로 기록되어도 무방할 정도로, 가히 엄청난 것이였다. 반지의 제왕, 안정환을 최고로 만든 장면이다. 그때의 감동을 글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잠시 안정환에 대해 얘기하자면, 지금 TV에서 나와 웃긴얘기하는 안정환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당시 안정환은, [테리우스]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잘 생겼으며, 축구실력또한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이탈리아의 FC페루자에 임대되어 뛰고 있던 안정환으로서는, 연장전 골로 인해 이탈리아의 [국민의 역적]이 되기 충분했을 것이고, 실제 훌리건등에 의한 살해협박이나 여러 재산상의 피해를 보게 된다. 거기에 더해, FC페루자 구단주인 가우치와의 문제로, 본인도 더 이상 이탈리아에서 선수생활은 어렵다고 생각하였다. 그 이후 잉글랜드 리그로의 임대와 이적문제등으로 인해, 엄청난 고초를 겪게 된다.
다른 선수들은 앞다투어 유럽으로 진출했던 것에 비해, 그는 계약문제등이 발목을 잡았고, 최고의 몸값을 누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전 FC페루자의 FIFA제소로 인한 벌금30여억원을 안고 귀국, 일본 연예인 기획사를 통해 시미즈S펄스로 임대된다. 월드컵의 최고의 스타임에도 불구하고, 그 역사적인 골로 말미암아 본인은 최악의 한해를 보내게 된, 아픔이 많은 사람이기도 하다.
"Pride of Asia"
그리고 맞이한 스페인전. 피파랭킹 8위로 당시 5위였던 포루투칼도 이긴 한국이 충분히 도전해 볼만 하다는 말도 안되는 신문기사들이 쏟아져 나왔고, 방송들은 연일 스페인을 분석하며, 그들의 약점을 찾으려 노력했다. 슈퍼스타 라울이 부상으로 경기에 못나오는 것이 엄청난 기회라는 등....참 의미없는 것이였으니, 이미 한국의 체력은 바닥이였고, 스페인의 기세는 어머어마 했다.
개인적으로, 월드컵동안 가장 밀린 경기가 아니였나 싶다. 딱히 뭔가 느낌으로, [스페인은 이길 수 없는 상대]라고 정해놓은 것 같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움직임들이 있었다. 마치, 한국과 동남아국가의 경기를 보는 느낌이랄까, 수비에 집중하다가, 한두번의 공격으로 승부를 보자는, 그런 계획인듯 하였다.
관중은 아시아의 자존심이라는 카드섹션을 보여가며 선수를 동요했지만, 스페인 함대은 어마어마했다. 우리의 수비는 허무하게 허물어졌으며, 그들의 골운이 없었지, 경기 전체적으로 보면 상대가 안되는 게임이였다.
그러나 선수들은 하나둘씩 호응에 반응하며 견뎌냈고, 승부차기 끝에 홍명보의 마지막골로 승리하게 된다.
이 정도 되면, 이제 소리지를 힘도 없어질 것 같지만, 질러도 질러도 지치지 않는 목소리와 뛰어도 힘들지 않는 다리만 있다면, 그날 저녁, 사람들은 광장으로 쏟아져 나와 모두가 함께하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여기서 내가 생각하는 선수는 호아킨 산체스로, 스페인에서 패널티킥을 실축한 선수, 그래서 얼굴 한가득 아쉬움을 보이던, 나름 측은하게 보이던 선수이다. 그러나, 그렇게 [실축한 선수]라고 볼 선수는 아니다. 당시 스페인의 레알베티스라는 중위권정도에 소속된 선수였으나, 그 오른쪽 윙어 실력만큼은 가히 스페인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선수였다. 경기중에서 한국선수 2~3명은 너끈히 제치는 엄청난 순발력을 보여주며, 오른쪽에서는 거의 한국선수들을 가지고 놀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의 엄청난 테크닉을 보여줬다.
"꿈★은 이루어진다"
경기가 끝나고서 하는 의미없는 얘기지만, 난 여기까지가 딱 좋았다고 본다. 만약 그 해 우리가 미쳐서, 독일을 꺽고 결승전에 가고, 브라질을 꺾고 월드컵 우승을 했다면 좋았을까 한다. 물론 좋았겠지만, 우리만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또한, 올라가는게 있으면, 당연히 떨어져야 함에도, 혹, 대중언론이나 선수들은 더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지 않았을까, 떨어져야 하는 타이밍을 놓친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독일전과의 4강은 대한민국의 심장, 서울에서 치뤄졌다. 그 열기가 어떠했는지는, 지금까지의 나열된 얘기들로 짐작은 되었을 것이라 본다. 가히 다들 정신줄놓고 경기장과 광장을 매웠었다. 그런 엄청난 행진은 경기전부터 달아올라, 국가전체가 올스톱되어 축구경기 하나에 집중한 그런 날이였다. 정말 역사적인 날이였다.
6만5천명.
서울월드컵스타디움을 가득매운 빨간색의 함성이 [대~한민국]을 외쳤다고 생각해보자. 그 소리가 북쪽까지 다다르지 않았을까? 평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 말도안되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 얼마나 소리를 지르고 응원을 해 왔을까를 생각해보면, 정말 3.1운동을 할때의 국민들의 마음속 염원이 이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감히 비교해보았다. 정말, 그날 서울은 축구에 미쳐있었다.
독일의 중심에 서 있는 선수는, 준결승까지 1점만을 내준 올리버 칸 콜키퍼였다. 올리버 칸은 명실상부 당대 최고의 골키퍼였으며, FC바이에르 뮌헨에서 14년간을 선수생활 한,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전설이다.
그런 골키퍼에 비해, 선수들 전체적으로 촘촘한 짜임새는 없어 보였다. 그에 한국과 같은 빠른 발을 가진 선수들이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것이라 보는 시각도 있었다. 건방진 생각임에 충분하지만, 그 당시에는 조금의 약점이라도 찾아내서 공략하자는, 국민 전체가 국가대표 감독이 된 것 마냥, 축구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들이 많았었다.
한국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선수는 차두리와 이천수였다. 차두리의 패스로 이천수가 전반에 날린 논스톱 꺽여 들어가는 슛은, 칸이기에 막을 수 있었다고 본다. 지금봐도, 그게 들어갔으면, 경기 전체 양상이 우리한테 돌아올 수도 있겠구나 싶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였던거 같다. 어차피 체력전이니, 초반에 몰아치면서 독일을 흔들 심상이였던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독일이 자기 페이스를 찾아, 기본적으로 우리는 밀리는 경기를 했다. 당시 대학교 2학년의 슈퍼전차같은 차두리의 돌파와 이천수가 빠른 움직임이 눈에 띄는 경기였지만, 마지막 박지성이 날린 절호의 슛이 하늘로 떠 오르는 순간, 한국은 공과 함께 이제 내려올 준비를 해야만 했다.
그렇게, 그해 불타 올랐던 시간은 점점 마지막으로 흘러갔다.
불이 타오르는 정도가 아닌, 영혼까지 불타 없어질 것 같던 혼신을 다한 응원과 함성은 점차 잦아 들었지만,
터키와의 경기가 끝난 후, 양 선수들의 어깨동무를 하고 그라운드를 누비던 그 모습은, 내가 생각하는 역대 축구징면 중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되었있다. 결국, 스포츠의 결말은 화합인 것이였다.
지금 생각해도, 또 지금 그때의 경기를 보아도, 이 감동은 없어지질 않는다.
월드컵 4강진출은, 대한민국 축구역사를 몇 단계 진보시켜 놓고, 박지성, 이영표를 비롯 많은 선수들이 더 넓은 축구무대로 나갈 수 있게 교두보를 만들어 주었음에 틀림없다. 그러한 교두보는, 지금의 손흥민을 포함해 많은 선수들이 해외에서 활약하게 하는데, 지대한 역활을 했다고 본다. 나는 그들과 동시대에 태어나, 이런 역사의 현장을 같이했다는 것에 큰 감사를 느낀다.
다만, 지금의 축구선수들에게서 느끼는 감정은 그때와 많이 달라 실망하는 부분도 많이 있고, 축구는 발전하고, 선수들도 해외파의 비중이 많아져, 수준이 많이 올라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피파랭킹은 41위(2002년 당시는 40위)에 머물러있는 한국축구가, 그 원동력 혹은 헝그리정신을 잃어버린건 아닌지, 아쉬운 마음이 든다.
또한, 지금도 월드컵 하면, 16강, 심지어는 8강도 목표로 삼곤 하지만, 그러한 기록들보다도 2002년의 대한민국의 감동을 다시 느낄 수 있는 그런 분위기를 간절히 바라기도 한다. 그런 모습은 선수들과 그들을 응원하는 국민들이 한마음 하나가 됐을때 가능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다시 그런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2002년의 감동은 대한민국 축구가 기록한 4강신화보다도, 국민을 하나로 모은 단결에 있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끝으로, 최근 병마와 싸우고 있는, 당시 월드컵의 영웅인 유상철 인천감독의 건강을 진심으로 바라며, 최근 암으로 운명을 달리한 2002년 당시 히딩크와 함께 한국을 이끈 핌베어벡 코치의 영면을 기원한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진은 인터넷검색에서 찾았는데, 문제되면 삭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