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현
나에게 지현이란 친구가 있었다.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어느날 갑자기 나에게 날아온 메일하나로, 어렵지않게 초등학교 동창들과 만날 수 있게 되었고, 그렇게 우리는 잘 지냈다. 나는 남자들보다도 여자동창들하고 잘 어울리게 되었고, 그녀들이 모일때 마다 나는 단골손님으로 불려가곤 했다.
그 아이는 큰 키에 말랐다. 항상 내가 많이 먹으라고 놀렸던 기억이 있다. 그러면 그는 "많이 먹고 있어~"라고 말하던 그 칼칼한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그는 당시 우리들 가운데서 가장 빨리 결혼도 했고, 아이도 초등학교에 입학을 앞두고 있었다. 남편은 사업을 한다고 했고, 딱정벌레 차를 끌고 아르바이트를 할 정도로, 딱히 근심걱정이 없어 보였다.
하루는 그가 나에게 연락을 해왔다. 아들이 영어유치원을 다니는데, 가정통신문도 영어로 온다는 거다. 그 내용을 잘 이해 못하는, 그리고 그 통신문에 회신을 하기 쉽지 않은 영어실력이었기에, 그는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렇게 약 1년동안 나는 별다른 어려움없이 통신문의 번역과 영작을 해 주었다. 당연히 뭔가 바라는 것도 없었지만, 그는 내 아이가 유치원을 졸업하던 날, 아이옷을 보내주었다.
그는 굉장히 직설적이였다. 내가 뭔가 잘못하는게 있으면, 서슴없이 항상 잘못한다고 말해주었고, 나에 대해서는 뭔가 보이지 않는 안정감도 주는 그런 친구였다. 여성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부족했던 나에게, 그는 좋은 조언자가 되어주기도 하였고, 지금생각해보면, 뭔가를 초월한 듯한 말들과 행동, 당시의 우리들 보다는 훨씬 더 어른스러운 모습이였다.
그러다 어느날, 한동안 모임에 나오지 않던 그가, 모임에 나왔다. 근데 몸이 안 좋아 보였다. 조금 자리에 앉아있더니, 허리가 많이 아프다고, 차에 가서 누워있겠다 했다. 조금 걱정된 나는, 그에게 괜찮냐고 했지만, 그는 좀 누워있으면 괜찮다고 했다.
그리고 몇 달뒤, 다른 친구로 부터, 그의 사망소식을 들었다.
그녀는 어린나이에 암에 걸렸었고, 나름 완치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혼 후 아이를 낳으려고 하자, 의사선생님이 만류했다고 한다. 다만, 그녀는 그녀의 고집으로 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가 내가 영작을 도와준 아이이다. 아이를 낳은 뒤, 그의 몸은 계속 안좋아져, 결국 암이 재발한 것이였다.
그해 겨울초, 그는 친구들이 보고싶다 했었다고 전해들었다. 하지만, 평소 만날때,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내색하지 않았던 그였기에, 마지막까지도 친구들에게 그의 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는 그의 그런 선택이 이해가지 않아 화가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만, 그녀의 어색한 머리스타일을 보고, [너 머리가 가발같아]라고 놀렸던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그건 진짜 가발이였다.
그의 장례식장에 갔다.
내가 여태것 다녀본 장례식장 중에 제일 초라했다. 화환이라고는 내가 회사에 부탁해 보낸 한개 뿐이였다.
그것조차 온전히 놔둘 수 없는, 조금한 병원의 장례식장이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온 사람은, 초등학교 동창생 2~3명이 전부에, 가족과 그 아들이 있었다.
남편은 하는일에 문제가 생겨, 경찰이 입회하에 잠시 장례식장을 방문했다. 필시 뭔가 문제가 있었고, 그러한 상황이 그로 하여금 힘들게 몰고간것이 아닌가, 괜히 화가 났다.
아들은 어미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들은 그 좁은 방을 돌아다니며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초등학교 2학년쯤 되었는데, 나중에 엄마의 모습을 보고 우는 순간에는, 나도 참기 쉽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감을 수 있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너무 기억하기 힘든 순간이였다.
그는 납골당으로 갔고, 나중에 나는 그와 찍은 사진을 가지고 방문했다. 너무 좋은 기억에 감사하고, 너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들린다고 썼다. 그렇게 길지 않았지만, 짧지도 않았던 그와의 기억을, 나는 이렇게라도 잡고 가고 싶다. 그때 그순간, 그 친구는 나에게 참 소중했었지만, 나는 그 소중함을 너무 가벼이 여긴게 아닌가 하고, 아직까지 후회하고 있다.
이렇게라도, 내가 그를 잊지않고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