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가 되는 이야기
“이해는 안 되는데, 존중은 해.” 많은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다. 나 또한 이 말을 습관적으로 내뱉지만, 솔직히 말하면 내 마음속에서는 이 말이 거꾸로 작용할 때가 많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나는 때때로 “이해는 되는데, 존중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취한다.
이해는 이성의 영역에 속한다. 어떤 사람의 행동이 잘못되었더라도, 우리는 그 사람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분석하고 파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범죄자의 심리를 연구하는 범죄심리학은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려는 시도다. 이는 범죄를 정당화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의 사고방식을 분석하고 예측하여 예방책을 마련하기 위함이다. 어떤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는 과정과 동기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행동을 존중할 수는 없다. 결국, 범죄자는 감옥에 가야 한다.
여기에서 존중과 이해의 차이가 드러난다. 이해는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한다면, 존중은 감정적이고 윤리적이며 때때로 종교적 가치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인간 사회에는 도덕과 법이 존재하며, 이는 단순한 본능이 아니라 인간만이 가진 사회적 합의에 기반한다. 동물들은 생존을 위해 서로를 해칠 수 있지만, 그들에게 감옥은 없다. 그러나 인간은 다르다. 인간의 생명이 소중하다는 믿음, 서로를 함부로 해쳐서는 안 된다는 규범은 논리적 이유보다는 우리가 사회적으로 공유한 가치관에 가깝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하는 대부분의 행동은 이해될 수 있다. 충분히 공부하고 연구하면, 인간의 행동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행동이 존중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인간답게 살기로 약속한 존재이기에, 어떤 행동들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존중은 인간이 만든 윤리적 기준 속에서 선택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모든 이해가 존중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해는 인간관계에서 필수적이지만, 존중이 결여된 이해는 관계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상대방의 행동을 이해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을 받아들이고 존중해야 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서로의 의견과 가치관을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이 곧 동의하거나 존중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동물이 아니라 인간이기에 어떤 행동을 존중하지 않기로 선택할 수도 있다. 나는 누군가의 의견에 동의하지 못할 때, “이해는 하지만 존중하지 않는다”는 말이 필요할 것 같다. 이해와 존중은 결코 같은 것이 아니며, 때로는 존중하지 않는 것이 더 인간다운 선택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