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할 일'보다 '중요한 일'을 먼저 하는 기술

by 주윤

“오! 노~! 숙제가 너무 많은 거 아니에요.”

아이는 이미 팔을 아래로 쭉 뻗고는 의자 아래로 내려올 태세다. 영어학원에서 본문에 나왔던 단어 5개를 3번씩 써오는 숙제를 하던 중이었다. 유치원 때부터 쓰기 숙제를 정말 지루해하던 아이의 글씨는 이미 흘러내린다.

“글씨는 말처럼 생각을 전달하는 게 중요해. 글씨도 알아볼 수 있게 또박또박 써야 해. 그리고 의자에 엉덩이 대고 앉아야지.”

“그리고 5개씩 3번 쓰는 건 많지 않잖아.”

“이게 안 많다고요?”

아이가 쓰기 숙제를 하기 싫어한다는 것도 알고 있는 데다 흘러내리는 글씨에 새 학기의 피로가 묻어있는 듯해서 또 아이가 짠하다. 아~사실 엄마에게 아이가 짠해 보이면 지는 건데...

결국 3월의 다짐이었던 아이 실력의 거품을 걷어내고자 야심 차게 구입한 수학 연산 문제집은 꺼내지 못했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이미 작년 3월에도 연산 문제집을 구매했었다. 그때는 주변 엄마들이 다들 집에서 연산 문제집을 풀거나 벌써 연산 학습지를 하고 있다는데, 나만 안 하고 있는 것 같은 조급함에 구입했었다. 그리고 당시 나는 어깨에 힘이 잔뜩 올라갔던 때여서 1학년 후반기 진도에 해당하는 두 자릿수 덧셈 뺄셈 문제집에 사고력 연산 문제집까지 2권이나 사두었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야심 찬 첫날. 2021. 3. 25. 시작의 날이 지닌 다짐은 너무나 확고하고 분명하기에 빨간 색연필로 상단에 날짜를 써두었었다. 그리곤 아마

‘음. 지금 시작해서 하루에 3장씩 풀면, 2주에 1권 풀겠네! 금방이네~’

하고 야심만만했다. 왜 시작엔 늘 마지막을 쉽게, 그리고 아름답게 보는지 모르겠다. 하긴, 그런 낙관성이 있어서 또 무언가를 시작하는 삶을 살 수 있겠지.



그 야심 찼던 3월의 문제집을 문득 열어본 계절은 9월이었나 10월이었나 싶다. 찬 바람이 불면 수험생의 마음도 그렇고 나이 먹어 가는 엄마의 마음도 싱숭생숭한데, 문득 펼쳐본 연산 문제집은 봄에 멈춰있었다.



아이를 낳고,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내 메모리가 삭제된 느낌이야. 근데 단기 기억도 인출이 안돼.” 하곤 했는데, 나는 또 같은 3월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아마 내게 있어 철학계의 아이돌인 니체의 영원회귀는 이런 건 아닐 거야. 설마 또 이렇게 도돌이표를 그리고 있을 줄은 그는 예상했겠지만, 나는 그것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나는 책을 익으며 삶이 반복된다면, 더 나은 삶의 태도를 만들어두고 그 모습으로 회귀하기를 진정으로 바랐다. 그 마음을 담아 책에 밑줄을 긋고 다짐을 써두었던 나를 다시 끄집어 올 순간이 왔음을 직감했다. 나는 지금 내가 발휘하고 있는 게으른 삶의 중력을 거슬러서 한 걸음을 위한 발을 지면에서 떼어야 하는 노력이 필요했다.



그때, 내가 치트키로 삼고 있는 한 가지 삶의 기술과 그 기술이 유효했던 경험이 떠올랐다. 바로 일의 순서 잡기이다.


사회 초년생을 갓 벗어난 시절, 나는 눈앞에 닥친 업무와 나의 개인을 채우는 공부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맞추어야 할까를 고민했다. 그때 나는 업무는 ‘해야 하는 일’, 그리고 내 공부는 ‘중요한 일’로 개념 정리를 했다.



‘해야 하는 일’은 언제나 주어진 일로 응당 정확한 마감 기한이 있기 마련이다. 기한을 맞추지 않으면 타인에게 피해를 줄 뿐만 아니라 타인의 무거운 책망을 감당해야한다. 물론 기한 내에 잘 해내면 타인의 인정을 받게 된다. 타인에게 밑 보이는 것을 싫어했던 나는 자연스레 ‘해야 하는 일’을 우선적으로 처리했고, 때에 따라서 엑스트라 시간을 할애해서라도 어떻게든 기한 내에 해내곤 했다. 이것은 내겐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중요한 일’은 내가 스스로를 채우기 위해 정한 공부나 운동과 같은 일로 기한이 없고, 타인의 눈치도 없다. 그리고 잘 보이지 않는 것 또 하나, 성공했을 때 당장 가시적인 성과도 희미하다. 그러다 보니 ‘해야 하는 일’에 밀려나는 일이 잦다. 그렇게 미루고 미뤄서 시간이 지나 처음의 목표를 잊어버렸을 때, 나의 내면에서는 휘발되는 듯한 가벼운 실망이 훅 불어온다. 하지만 그 실망은 ‘해야 할 일’을 기한 내에 해내고 얻은 성취감으로 일단 덮어둔다.



더욱이 ‘해야 하는 일’을 하느라 소진한 에너지를 채우느라 맛있는 것을 먹고 쇼핑을 하고 친구와 노느라 ‘중요한 일’을 해야 할 시간은 확보할 여력이 없다. 그렇게 ‘중요한 일’은 처음 가졌던 선명한 의지의 빛이 바래간다. 그 과정에서 처음에 느낀 가벼운 실망은 어느샌가 내게 소리 없이 침잠하고 이내 막연히 ‘난 끈기가 부족한가.’했던 생각이 자기 개념으로 자리 잡는다.



중요한 일은 내가 나를 위해 하는 일이 분명하다. 그 당시의 나는 스스로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해야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직장의 업무에만 시간을 할애하다 보면 나만의 개별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를 채우는 공부를 통해 나의 능력을 키워내다 보면 나는 나만의 개별적인 능력과 남과 다른 생각을 얻게 된다. 그러다 보면 나는 직장에서는 나만의 강점을 가진 조직원이 되어 남과 다른 방식으로 일을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는 능력자가 된다. 더욱이 내 개인의 삶에서 나는 나의 길을 계속해서 가게 되는 행운을 쥐고 살아갈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이 들자 고육지책으로 생각한 것이 오늘의 ‘to do list’를 작성한 후, 일의 순서에 있어서 ‘중요한 일’을 ‘해야 할 일’의 앞에 배치하는 것이었다. 아침에 약간 일찍 출근해서 내가 읽기로 했던 논문을 먼저 읽었고, 내가 읽고 싶었던 책을 먼저 읽었고, 하기로 했던 영어공부를 먼저 했다. 그리고 그 후 업무를 시작했다. 물론 업무 시간이 있었기에 나의 ‘중요한 일’의 시간은 충분히 확보되지 못했지만, 나는 매일 아침마다 나의 ‘중요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매일 ‘중요한 일’을 잊지 않을 수 있었고 오후나 저녁에 계속 이어서 할 수 있었다.


아이의 학습에도 '해야 할 일'과 '중요한 일'을 구분하는 것이 필요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의 학습에서 '중요한 일'은 책읽기, 연산, 성취감을 느끼는 경험(학교 숙제 및 학교 참여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해야할 일에는 나의 격려도 포함된다. 초등학교 저학년 형아의 마음에 긍정적인 착각을 만들어 주는 일은 공부를 봐주는 것만큼 엄마에게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해야할 일'은 학원 숙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때 엄마의 과업은 덜 혼내는 것이 된다. 아주 중요하지만 늘 잘 안되므로 늘 기억해야한다.


학원은 각기 나름의 개별성을 가진 곳이어서 해당 학원의 학습에만 매진하다가 중요한 기본을 놓치다 보면 학생의 학습력이 그 학원에 맞추어진 고인물이 되기 십상이다. 학원을 옮길 때마다 레벨 후려치기를 당한다는 사례를 보면, 물론 어느 정도 불안감을 심어주는 학원의 영업비결이기도 하겠지만 각 학원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학습의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학원은 단기적인 성과를 보여줘야 하는 곳이므로, 특정 영역에 초점을 맞추어 운영하는 것이 당연한 곳이다. 수학의 경우 A학원은 현행 심화를 중요하게 여기고 B학원은 선행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A학원에서 잘하던 아이가 B학원에 가면 좋지 않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런 사례를 보고, 나는 그 해당 시기에 길러야 할 학습을 꾸준히 해서 기본 학습력을 길러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다다랐다. 그 과정에서 아이가 부족한 부분을 보이면 그 부분을 중점적으로 지도하는 학원을 알아보고 선택하여 보완해주는 것이 중심을 잡는 학원 학습이 아닐까 하는 식으로 학원 선택에 대한 방향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나는 단순하게 시작했다. 아이와 연산의 중요성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가 좋아하는 과학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그 많은 과정에 담긴 수학의 힘에 대해서, 그리고 그 기본인 연산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엄마가 왜 다시 이렇게 쉬운 연산 책을 샀는지 말해주었다.

“우리는 이 중요한 연산의 기본부터 해볼 거야. 이번에는 우리 주윤이가 보완해야 할 속도를 키워보자. 그러다 보면 별거 아니네~하는 생각도 들 거야.”



그리곤 우리의 집 공부 시간에 그동안 앞자리에 버티고 있던 ‘해야 할 일’이었던 학원 숙제를 제쳐두고 우리의 ‘중요한 일’인 연산 책부터 시작했다. 한 자릿수 덧셈이어서 어떤 날은 아주 가볍게 해내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손에 귀찮음을 잔뜩 묻혀가며 시간을 질질 끌며 하는 날도 있다. 하지만 아이는 연산의 중요함을 알고 있고, 중요한 일이 가져올 이점을 이해한다.



그날 이후, 우리는 연산 책을 밀리지 않았다. 숙제를 먼저 했던 첫 주를 뒤로한 3월의 마지막 3주 동안 동안 아이는 1권의 연산 책을 차근차근 끝냈다. 물론 ‘해야 할 일’인 학원 숙제도 빠짐없이 해냈다. ‘해야 할 일’의 힘은 어마어마하니까.



첫 연산 책을 기한 내에 끝낸 후, 나는 감격에 겨웠다. 그리곤 혼자서 또 의미부여를 잔뜩 해보았다. 작은 의미는 이번 경험으로 인해 내 아이에게 성취감이, 그리고 자신감이 길러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보다 큰 의미는 학교와 학원 숙제와 같이 누가 시켜서 하는 공부가 아니라 집에서 자율적으로 목표를 세워서 꾸준히 하는 집 공부를 해본 경험이 훗날 자신이 스스로 하고 싶은 공부가 생겼을 때 자신감과 동기라는 심리적 자본이 되어주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1학년 엄마는 이렇게 의미가 작으면서도 참 거창하다. 앞으로 할 일이 많은데, 겨우 1개 성공하고는 이렇게 의기양양하다. 아이가 1학년이면 엄마도 1학년이라더니 그 말이 참 맞지 싶다. 그래도 그러한 패기가 있어 지금의 일을 계속할 수 있다. 그리고 다음의 일도 도전할 수 있다.



그래서 나와 아이는 우리의 치트키! 오늘도 ‘해야 할 일’보다는 ‘중요한 일’을 먼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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