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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윤 Jun 29. 2023

여름 완두콩이 건네는 충분한 기쁨

  뭐, 꼭 필요해서 사는 건 아니라고 굳게 믿는다. 가지고 싶으니까 사는 거지. 티셔츠가 없어서 사는 게 아니다. 흰 티에 검정과 진한 네이비 프린팅 사이에 장난스레 찍힌 빨강 나염의 유머러스함 때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항복. 흰 티셔츠 하나를 추가했다기보다는, 뭐랄까 그 티셔츠는 내 옷장에서는 유일한 무늬를 가진 흰 티셔츠 아닌가. 갖고 싶으니까. 가지면 기분이 좋으니까.



  거창한 게 아닐수록 더 괜찮다. 누가 봐도 비싸고 반짝거리는 것들을 사기 위해서는 많은 이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생일이나 기념일, 승진, 서른 또는 마흔의 나를 스스로 축하해 주기 정도는 근거가 달려야 한다. 그럴싸한 명분 없이 덥석 고가의 물건을 살 수는 없는 일이다. 사실, 과연 명분의 유무만이 문제일까? 가장 중요한 건 통장잔고다. 그래서 나와 그들은 늘 낯을 가리고 어색하다.



  나도 친한 것들이 있다. 매달 400g씩 사두는 원두 덕분에 내 하루는 잔잔하게 시작된다. 매일 아침, 늘 마시는 내 머그를 올려놓고, 버튼을 누르는 간결한 움직임 하나면 머신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70도 정도의 적당한 온도의 커피를 내어놓는다. 지난달엔 블랙커넌트와 플럼, 라임 향이 근사했던 케냐였다면, 이번 달엔 라벤더와 피치, 라임향이 은은한 원두로 같은 에티오피아의 원두를 만난다.



  커피뿐만이 아니다. 나에게만은 작고 반짝이는 것들. 깔별로 살 수 있는 여름 티셔츠, 늘 손 닿는 곳에 있지만 너무 친해지면 안 되어서 매일 참아야만 하는 냉장고 속 맥주들. 그렇게 대단하고 거창하지 않은 것들은 내 하루에 잔잔하고 은은하게 스며들어 내 하루가 오늘도 썩 괜찮다는 향을 입힌다. 마음껏 고르고, 살 수 있고, 양도 충분해서 나를 자주 만족시켜 주는 것들과 나는 친하다.



  오늘 나를 만족시켜 준 것은 까만 커피콩이 아닌, 또 다른 콩이다. 바로바로 초여름을 담은 연둣빛 완두콩!



 아침이면 동네 채소가게에서 오늘 들어온 물건 알림이 올라온다. 매일의 일상이 늘 그렇듯 커피를 마시며 오늘 올라온 채소 알림을 익숙하게 보는데, 오늘은 역시나 어제와 다른 날이 맞다. 어머! 이게 뭐야! 띵! 하고 올라온 알림에는 땡글땡글하고 올망졸망한 연두색 완두콩 사진이 알콩달콩 올라와있는 게 아닌가! 분명하다. 이 완두콩들은 나를 보고 해사하게 웃고 있다. 나 여기 있지요! 하면서. 이 작고 반짝이는 것이라면....!



  이건 사야 해! 예쁘니까! 갖고 싶으니까!  



  깨물어주고 싶게 귀여운 연둣빛 완두콩을 샀으니 오늘, 이 여름날 내 할 일은 다 한 것 같았다. 신나게 집에 들고 와 먹을 만큼만 꺼내놓고 행여 남은 연두들이 더울까 냉장고에 살짝 넣어주었다. 그리곤 자두, 블루베리를 꺼내어 내가 좋아하는 손바닥만 한 나뭇잎 모양 접시에 담고, 삶은 완두콩을 송송송 넣어주었다. 자주색 껍질과 연주황 속살의 자두, 깊은 네이비 블루베리에 담긴 여름의 원숙함에 풋연둣빛의 완두가 들어가다니! 이 어색한 색감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모습에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이미 내 마음엔 새콤함과 고소함의 언밸런스가 가져오는 장난스러움이 번졌다. 보고만 있어도 예쁜 아이들.



  당연히 오늘 저녁은 흰쌀밥이다. 나는 완두가 있으니까. 완두 하면, 흰쌀밥에 하트무늬 하는 거니까. 태어나서 한 번도 해보진 않았지만, 오늘 해볼 거니까. 다행히 나는 지난주에 밥솥을 수리받고 와서 오늘 흰 살밥의 윤기는 남다르다. 마치 오늘의 흰쌀밥을 위해 불쑥 무거운 밥솥을 들고 센터를 찾았던 것만 같다.  이쯤이면 운명인가 싶다.



  세 밥그릇에 반짝이는 흰쌀밥을 봉긋하게 담았다. 세 그릇에 연둣빛 완두로 한 땀 한 땀 수를 놓았다. 아우! 정말 예쁘기도 하지. 흰쌀밥도 웃고, 완두도 웃는다. 어라! 그런데 이 예쁘고 귀한 완두가 많이 남는다. 아줌마 마음에 이러면 절대 안 되지.



  남편에게 많은 사랑을 주기로 다짐한다. 완두 하트 테두리 안에 완두콩을 빽빽하게 채워 넣는다. 이게 처음 하니 좀 찌그러지긴 했지만 결코 남편에 대한 내 사랑이 찌그러진 건 아니... 겠지? 물론 아이에게도 많은 사랑을 주고 싶으나 콩을 안 좋아하는 아이에게는 어쩔 수 없이 테두리 완두 하트만을 줄 수밖에. 원래 아빠는, 남편은 다 잘 먹는 사람 아니던가.



 식탁 앞에 앉은 남편이 아들의 밥 위에 수놓아진 연두의 완두콩 하트와 자신의 밥 위에 쏟아진 완두의 하트를 보고 "이게 뭐야?" 한들, 뭐 어떻게 해. 사랑이 많은 거지 뭐. 내 밥 위 사랑도 잔뜩인데 뭐. 같이 나이 먹어가니 완두도 잔뜩 사랑도 잔뜩 먹는 거지 뭐. 그렇지? 하고 풋-하고 웃으며 우리 셋 숟가락을 든다.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완두콩 하나로 오늘 저녁 식탁은 어제저녁 식탁과는 달랐다. 땡글땡글한 풋 연두에 여름을 담고, 재미를 담고, 장난을 담는다. 덕분에 오늘도 내 마음에 단단한 마음이 담긴다. 충분한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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