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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윤 Jun 01. 2023

마흔에 부려보는 욕심

  드디어 토요일 아침이다. 월, 화, 수, 목, 금요일 동안 양 끝을 조이고 조여서 팽팽하게 잡아당겼던 실이 톡 끊어지기 직전, 살살 느슨하게 풀어주는 그런 날이다. 토요일 아침은 눈을 뜨는 속도부터 느리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내가 이만하면 되었다 싶을 때 몸을 일으킬 수 있다. 내가 원하는 시간에 일어나 내 속도대로 살 수 있는 사치를 한껏 부리고 나면 이미 아홉 살은 깨어있다.



  나는 아홉 살이 먹을 시리얼, 우유, 삶은 달걀, 소시지, 과일을 준비한다. 과일은 때때로 바뀌지만 나머지는 늘 같다. 먹던 대로. 이제 제 방에서 한창 도미노 만드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아홉 살을 부엌으로 부르기로 한다.

  "주윤! 엄마 커피 내려줘야지요!"

  "네!"

아홉 살은 명랑하게 방에서 총총총 나와 까치발로 설거지 건조대 앞에 서서 내 물컵을 찾는다. 까치발을 서느라 팽팽히 긴장한 아홉 살의 종아리 덕분에 컵을 찾느라 좌우로 움직이는 고갯짓이 가볍다. 귀여운 녀석. 이내 내 컵을 찾아 커피머신에 올려놓고 늘 먹던 대로 mild 버튼을 선택해서 커피를 내려준다. 이 순간을 나는 사랑한다. 매번 가슴이 간질간질한 토요일 아침의 순간을 또 만났음에 감사하다.



  커피까지 준비되었으니 우리의 토요일 아침식사는 우리 둘의 시시한 대화로 시리얼과 삶은 달걀, 소시지, 과일 사이를 채운다. 아홉 살은 이번에 자유 글쓰기를 했는데 정말 웃긴 글을 썼다며 이미 말하기 전에 웃고 있다. 이러면 지는 건데. 훗. 주제는 대통령이 된다면!이었다고 한다. 아홉 살은 제가 아는 모든 B급 유머를 다 쏟아부었던 게 확실했다. 팬티를 머리에 쓰고 다닐 것이고, 오줌으로 만든 호수에서 수영을 하고, 500000시간 동안 학교에 갈 것이라고 했다. 말하는 중간에 자신이 썼던 종이를 가져와 읽으며 연신 배를 잡고 깔깔깔 거렸다. 이렇게 내 앞에 작은 새 한 마리가 경쾌하게 지저귀고 있다. 행복하게.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아홉 살과 동네 도서관으로 길을 나섰다. 아홉 살은 빨강 킥보드를 야무지게 챙겼다. 공원과 함께 있는 동네의 어린이 도서관에서 책 읽고 산책로에서 킥보드를 타는 게 우리의 토요일 코스이다. 이 도서관에서 우린 참 재밌고 읽고 싶은 책을 많이 만났었다. 생각의 면적을 넓혀가는 시간. 오늘은 또 어떤 책을, 어떤 문장을, 어떤 생각을 만날까.



  아홉 살이 골라온 책은 참 신기하다. 가자마자 고른 책은 대게 이미 집에 있는 책이거나 아니면 읽었던 책이다. 나름의 웜업인 걸까? 친숙한 책을 먼저 골라 좌식 테이블에 놓고 읽기 시작한다. 그러다 집에서처럼 바닥에 책을 놓고 읽는다. 이때쯤 되면 엄마의 마음은.....! 내가 읽었으면 하는 책을 찾으러 다니기 시작한다. 역사? 과학? 수학? 인문학? 세계명작? 엄마의 골똘한 고민에 아랑곳없이 아홉 살은 읽었던 책을 다시 읽고 있다. 엄마와 아들의 도서관 동상이몽의 시작이다.

 


  오늘은 이것. 잡지가 어떨까? 최신의 세계가 들어있는 곳. 나는 어린이 과학동아와 초등 독서평설, 그리고 어린이 Time 지를 가져다 아홉 살 앞에 둔다.

  "이거 어때? 봐. 주윤이가 좋아하는 과학에 관련된 소식들이 모여있어. 완전 흥미롭겠다. 그치? 우와!"

  "엄마, 여기는 어린이 도서관인데, 왜 엄마가 추천하는 책을 읽어야 해요? 어린이 도서관은 어린이가 보고 싶은 걸 보는 곳이잖아요."

처참한 실패. 잡지는 대여도 안 되는 항목이라 여기서만 읽을 수 있는데. 아쉬운 마음에 그리고 어느 정도는 내 선택의 정당화를 위해 내가 독서평설을 열어본다. 얼마나 유익하겠니!



  

  독서평설에는 세계의 건축물을 소개하는 내용이 있었다. 이번달에는 파르테논신전에 대한 소개였다. 사람들의 시각적 착시까지 계산해서 건축한 파르테논 신전에 담긴 고대 그리스인의 지혜, 조각상의 아름다움, 그리고 파르테논신전이 무기창고로 쓰였던 영욕의 순간들에 대한 내용이었다. 나는 이역만리를 건너 저 멀리에 있는 이름만 들어본 파르테논 신전을 연예인 사진 보듯, 연예인 정보를 보듯 탐닉했다. 그렇게 다시 읽는데, 이젠 첫 문단이 눈에 들어왔다.

  '파르테논신전은 페리클레스가 아테네의 위용을 널리 과시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수천 년을 현존하며 여전히 한 나라의 랜드마트가 되어온 건축물 중에 그렇지 않은 것이 어디 있겠나. 이집트의 피라미드도, 중국의 만리장성도, 프랑스의 베르사유도. 지배자들의 위용을 만들어졌다. 당시 그 건축물을 위해 수천만의 노동계급이 몸이 부서져라 노동을 했을 것이고, 일반 평민들은 집안 살림을 쥐어짜며 세금을 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설계와 그 안의 예술품들을 만들었을 당대의 예술가들은 자신의 역량의 최대치를 그 이상을 끌어내야 했다. 그렇게 시대가 가진 역량과 절실함, 그리고 어쩌면 누군가의 생사를 걸어가며 무리해서 만들어낸 그 인류의 건축물은 여전히 남았다. 일상의 집들을, 아파트를 보겠다고 찾는 사람은 없다. 시대의 노력과 진심의 산물인 랜드마크만이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이렇게 이역만리 나에게까지 전해져 회자되고, 보고 싶다는 로망을 갖게 한다. 그렇게 모든 과정이 무리함이었던 거대한 건축물들은 지금도 살아있다.




무리해야 오래도록 살아남는 것일까. 그래야 사람들이 오래도록 기억하는 것일까.




  평온하고 안온하게 내 삶의 구석구석의 먼지를 세세히 털고, 잘 빨아진 걸레로 살살 닦아 윤을 내며 살아가는 삶이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내가 하고 싶은 만큼의 힘을 주어가며 닦은 내 삶의 윤기에 마음이 든든해지는 하루들이 이어진다. 물론 내가 하고 싶은 만큼 힘을 써서 광을 낸 윤기는 나에겐 너무나 잘 보이지만, 가족들에게만 닿아도 그 윤기는 약간씩 바래진다. 그리고 내 집을 넘어가면 내가 만든 윤기는 보이지 않는다. 그것을 모르지 않는다. 나는 내가 만든 안온함에 스스로 자족하며 살아간다. 다른 사람에겐 보이지 않지만 내 눈과 마음에는 선명한 윤기가 나를 채워주는 집에서 아홉 살과 시리얼, 우유, 커피를 마시며.



  삶의 과정에 랜드마크를 지어가며 사는 삶이 있다. 당시에 내가 가진 역량을 최대치로 끌어낼 뿐만 아니라 어쩌면 무리를 해서라도 성취를 이루어간다. 그 과정에서 몸은 지치고 늘 다잡으려고 노력하느라 마음도 진이 빠져있다. 하지만 그 무리한 과정을 통해 내 역량이 어디까지 뻗어갈 수 있는 것인지 스스로도 놀란다. 그렇게 내 삶에 하늘 높이 우뚝 솓은 랜드마크들이 세워진다. 나를 갈아 넣어 만든 랜드마크에 사람들이 찾아오고, 알아주고, 오래도록 기억된다. 명성은 때로 이렇게 잔인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 역시 내가 뿌듯하게 느껴진다.



  처음엔 늘 그렇듯 생각계의 클래식,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처럼 안온한 삶과 랜드마크를 지어가는 삶 중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리고 나는 늘 엄마아빠 둘 다 좋다는 아홉 살의 꾸준한 대답처럼 두 삶 모두 갖고 싶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나는 내가 어디까지 커갈 수 있는지 궁금하다. 내가 잘하고 진심으로 했던 일에 대해 인정을 받으면 마음이 들뜨며 보상을 받는다는 생각에 뿌듯해한다. 처음엔 어렵다고 두려워했던 일을 통해 내 역량을 키워나갔던 경험도 있다. 무엇보다 나는 내가 지금보다 더 잘 쓰이길 원한다. 동시에 나는 토요일 아침, 내가 일어나고 싶은 시간에 일어나 느슨하게 시작하는 아침을 사랑한다. 아무래도 난 마흔에 욕심쟁이가 된 듯하다.




그렇다면 이미 생겨난 욕심, 제대로 부려보려면 질문을 바꿔볼 필요가 있다.

  '두 삶의 균형을 어떻게 맞출 것인가'



  일주일에는 시작이 힘겨운 월요일도 있고, 피곤하지만 버텨야 하는 수요일도 있고, 더 이상 안될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줄을 팽팽하게 당겨내야 하는 목요일도 있다. 그렇게 때론 무리 없이, 때론 무리해 가며 나를 사용하는 날들에서 나는 무언가를 배우고, 익히고, 산출한다. 그 과정에서 나는 진심이길 바란다. 피로한 마음이 내 역량을 가리지 않길 바란다. 이번 랜드마크에 진심을 다해서 한 번 더 내 역량의 실핏줄이 더 멀리 뻗쳐가길 바란다.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내 역량을 발견했으면 한다. 새로운 나를 만나기 위해 나는 해봐야 한다. 나는 변하고 싶기에 도전해야 한다. 새로운 일이 생기면 고민보다 해보겠는 마음을 앞에 두어야 한다.  겁이 많아 두려움 앞에서 우왕좌왕하는 나에게 고민은, 일의 시작보다 과정에 진심을 기울여야 한다. 나는 새로운 나를 늘 만나고 싶다. 기회 앞에서 나는 말할 것이다.

'해볼게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해요.'



  그런 평일을 보내면 토요일과 일요일도 오는 게 삶이다. 참 다행스러운 공정함이다. 토요일과 일요일이 오는 삶은 공정함을 넘어서 정의롭게까지 느껴진다. 나는 나를 살뜰히 돌본다. 예쁜 그릇에 음식을 조금씩 담아 향이 좋은 와인을 마셔주고, 녹색의 숲을 걷는다. 소파에 널브러져서 컵라면을 먹거나 맥주를 마시며 티브이를 본다. 그러다 우리 셋 함께 산책을 나가기도 한다. 다정한 햇살이 내려 내 잔잔한 마음에 윤슬을 반짝이게 하는 시간을 나는 조르바처럼 누린다. 온 마음을 다해. 내가 가진 가장 깨끗한 헝겊에 물을 적절히 적시고 내 마음 곳곳을 정성스레 닦아준다. 그렇게 내 손으로 내 마음에 윤을 내어준다.



  내 삶의 랜드마크와 보통의 내 삶에 개별적인 진심을 들여 사는 삶. 랜드마크의 높이와 내 보통의 삶의 높이는 다르겠지만, 그 다름이 맞다. 각 삶은 개별적이기에 하나의 높이라는 하나의 잣대로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월요일이 있으면 토요일이 있고,  기둥모양, 벽돌모양, 곡선과 직선이 모여야 건축물이 이루어진다. 결국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를 추구하는 삶도, 안온함을 음미하는 삶도 내 삶의 행복이다.



  마흔이 되어 욕심쟁이가 되었다. 부리기는 쉬워도 채우기는 어려운 게 욕심이었다. 그래도 그 덕에 망설이기보다 도전해보려는 용기는 덤으로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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