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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윤 Sep 15. 2023

나는 그냥 이상한 내가 너무 웃긴다

versus

  “5분 쉬고 할까요?”

  이렇게 나쁜 말을 하고 강의실에 앉아있는 학생들의 얼굴을 찬찬히 스캔한다. ’5분 쉬고 할게요.‘했어야지 ’할까요?‘가 뭐람. 심지어 이제야 2주 차 수업인데 저렇게 빤히 날 쳐다보면 누가 “네!”하고 대답할 수 있단 말인가. 학생들은 이렇다 저렇다 대답을 못하고 눈치를 보고 있다.



  결국 맨 앞에 앉은 학생이 마지못해 말한다.

  “계속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럴까요? 사실 시간이 빠듯하거든요. 최대한 해서 정시에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이쯤 하면 저 사람은 말 못 해서 병이나 났나 싶다. 2 시수 강의는 원래 50분 수업과 10분 쉬는 시간이 국룰이 아닌가. 중간에 안 쉬면 일찍 끝내는 게 커먼 센스, 인지상정이거늘 쉬는 시간 없이 정시에 끝내겠다니. 일주일의 중간인 수요일, 더욱이 가장 피곤한 마지막 강의시간인 4-6시 강의인데, 이렇게 상식에 벗어나다니! 아무래도 몇몇은 지난주 수강정정 기간에 움직이지 않았던 제 손가락 탓을 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몰상식한 스피커가 되어 2시간을 내리 계속 말했다. 더욱이 중간중간에

 “우리는 간혹 자주 보고 들은 단어는 안다고 생각하지요.” 하며

 “인지(cognition)가 뭘까요?”

 “지능을 여러분은 어떻게 정의하고 계세요? “

 “우리는 또 이런 게 더 궁금하고 그렇잖아요. 그렇죠? 그럴까 봐 가볍게 한번 살펴볼게요.”

와 같은 비구조화된 질문에 교재에 없는 내용을 빵빵 날리며 학생들을 빤히 바라보기까지 했다.



  이렇게 오늘도 나는 명강의 근처에도 못 가보고 겨우 수업을 끝냈다. 혼자 아주 잘나 버린 강의를 마치고 남은 건, 허리통증과 쏙 들어가 볼품없어진 핼쑥해진 볼. 폭 패인 볼에 뿌듯함 비슷한 걸 주워 담고 싶은데, 그러려면 허리를 숙여야 되니 그럴 마음도 들지 않는다. 그렇게 터덜터덜 강의실을 나온다.



  차에 앉아 시동을 켜는데 문득 피식 웃음이 난다. 나는 지금 내가 너무 웃긴다. 어디 가서는 주눅이 들어 말 한마디도 못하면서 강의실에서는 2시간을 내리 말하고 오다니. 더욱이 말하고 싶어 죽은 귀신이 붙었는지 5분마저도 알뜰하게 이어 붙인 나. 한 면은 물렁물렁한데 다른 면은 플랫하기 그지없는 이질적인 양면을 캐내고 보니 돌아인가... 싶다.



  내가 가진 여러 자아 중에 확실한 하나를 말하자면 나는 말수가 적은 사람이다. 사실 나는 내가 그런 사람인 줄 몰랐는데, 주변에서 그렇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하고 받아들인 내 자아이다.



  내 전화는 주로 수신용인 데다 걸려오는 전화도 남편과 주윤이, 20년 지기 친구 정도이다. 너무 연락을 안 한 것 같아서 엄마에게 안부전화를 하면 엄마는 무슨 일이냐며, 안부전화도 하고 사람 되었다 하신다. 그 말에 마음이 흠칫 찔리면서도 다음에도 그런 말을 듣는 무뚝뚝한 딸이다. 시어머니께서도 “며느리 어때요?”하는 물음에 “우리 며느리 말도 없고...... “하셨다는 말에는 확실한 사실이어서 ok! 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가족도 이런데 사회적 모임, 특히나 모르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는 더 입을 댈 필요도 없다. 나는 그저 숨 쉬는 사람 1 정도의 공기 같은 존재감을 보유하고 있다.


 

  이렇게 어디 가서는 정말 입도 뻥긋 못하는 내가 강의실에서는 혼자 신나게 떠들고 나오는 게 참 웃기고 살짝 가소롭기도 하다.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만히 눈치만 보는 쫄보인 나를 행여 오늘 강의를 들었던 학생들이 본다면 그들이 얼마나 꼬소하고 통쾌할까.



  집으로 가는 길, 운전 중 엑셀과 브레이크를 번갈아 누를 때마다 이질적인 양면으로 살았던 나(self)들이 떠올랐다. 참 요상하고 이상해서 하나씩 건져 올려진 나를 볼 때마다 피식 웃음이 절로 난다.



  어릴 적 앨범 속 나는 유독 깁스한 사진이 많다. 고무줄로 동네를 평정하려는 야욕으로 하늘 높이 다리를 올리느라 미끄러진 탓이다. 오른팔 뼈가 붙자마자 또 부러트린 왼팔 뼈는 각각 ㄴ자, 왼팔은 ㅣ자 깁스를 증거로 남겼다. 하지만 사진 속 왈가닥 어린이는 막상 학교에 가면 옆 짝꿍도 안 들릴 개미 목소리로 발표하는 부끄럼쟁이 소녀였다. 참 잔망스럽기도 하다.



  소리도 없고 게다가 느리기까지 한 내 걸음은 급해서 타들어갈 것 같은 분주한 내 마음을 스텔스기처럼 감쪽같이 속였다. 내가 아무리 마음이 급하다 해도 주변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아주 의뭉스러운 사람이다.



  긴 머리 웨이브를 늘어뜨리고 이에 걸맞은 꽃무늬 시폰 원피스에 힐을 신은 이십 대 아가씨였던 나는, 상남자의 차 지프를 거칠게 몰며 문을 쾅 닫고 내리곤 했다.   “네 차는 늘 나를 당황시켜.”

그런 내 모습을 보고 했던 친구의 말에 나는 이렇게 화답했다.

  “근데 나 고속도로는 안 가봤잖아.”

참 요망한 사람이다.



  나의 이질적 양면들은 그렇게 나를 잔망스럽고, 의뭉스럽고, 요망한 사람으로 살게 했다. 활발함과 부끄러움, 느림과 급함, 여성스러움과 공격적인 나. 그래서 이상한 나.



  이들은 각자의 각을 뾰족하게 세워가며 나를 울퉁불퉁하게 구성하고 있다. 문득 든 생각은, 다만, 뽀죡함들이 있어 내 삶의 다양성이 지켜지는 게 아닐까. 그래서 내가 살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숲도, 생태계도 그 명맥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개체의 다양성이다. 단일종으로 구성된 숲과 생태계는 오백 억 가지 위협이 몰려오는 세상에 맞서기엔 약하다. 누가 봐도 빛이 나는 종뿐만 아니라 못생기고 주목받지 못하고 감추고 싶은 종들이 함께일 때 그 숲은 건강할 수 있다.



  나도 그렇다. 내 마음의 숲에도 번듯하게 두 팔 벌려 하늘로 솟은 굳은 나도,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아 힘껏 감추고 싶은 그늘지고 축축한 나도 있다. 살랑이는 바람 따라 몸을 젖히는 가볍고 유연한 나도, 꼿꼿하게 그자리에서 좀처럼 타협하지 않는 단단한 나도 있다. 친절하고 상냥하게 노래하는 나도, 매섭게 노려보며 으르렁 거리는 나도 있다. 너그럽게 잔잔히 머무는 푸른 나도, 도무지 옆을 보지 못하고 좁은 골짜기로 급히 흐르는 나도 있다.



이 뾰족한 나(self)들은 매일이 다른 하늘과 그럼에도 나를 받쳐주는 양질의 토양에 두 발을 딛고 자잘하거나 묵직한 풍파를 겪어왔다. 각자에 적합한 문제에는 개별적으로, 때론 힘을 합쳐 그때의 나는 문제를 겪어냈다. 그렇게 내 숲은 나만의 풍경이 되어간다.



  새로운 경험이 쌓일때마다 나는 새로운 나를 또 발견할 것이다. 같은 책도 읽는 시기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듯, 같은 경험도 이십대의 나와 사십대의 나는 다르게 반응하고 기억할 게 분명하다. 그 덕분에 내 숲은 점점 울창해져 가겠지.


  

  살아가는 동안 나는 또 얼마나 다른 나를 발견하게 될까. 나를 발견하는 일이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재미난 일이 맞다. 내가 발견한 낯선 나를 마주할 때마다 늘 내가 이상해 보여서 웃음을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어쩌면 새로운, 그래서 이상한 나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가 있어 오늘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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