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윤 Sep 10. 2023

여름과 가을사이의 계절, 그 야릇한 시소 타기

  이불을 두 다리로 꼬집어 쥔 채 아침을 맞았다. 어! 이 낯선 느낌. 여름을 담은 얇은 리넨 이불과 내 몸 사이에 옅은 공기 층이 느껴진다. 이불과 내 배 사이에 고슬고슬한 가벼운 바람이 지나간다. 이건 이불이 내 몸에 스며들 만큼 무겁던 습아일체의 여름 공기가 아니다. 질적으로 다른 이 공기, 가을이 틀림없다. 하루 만에 이불과 나 사이의 기분 좋은 틈 사이로 가을이 노크를 한다.



   아침저녁에 발견되는 가을 냄새에 한껏 반가워 호들갑을 떤다. 가을이 왔다고 설레발을 치며 긴소매 옷을 입고 나갔다가 오후가 되면 여전히 힘이 센 여름의 햇살에 땀이 삐질 난다. 그래도 이 계절의 오후엔 기가 죽지 않는다. 무거운 여름의 자리에 가벼운 바람이 불어 내 고개를 하늘로 밀어 올린다. 시리도록 파란 하늘이 보이며 안심이 된다. 가을이 맞다.



  여름과 가을 사이. 여름의 낮을 지나면 가을의 입구인 저녁이 기다려주는 이 야릇한 시소의 계절을 좋아한다. 옷장에서 이 찰나의 계절을 기다리는 옷들을 꺼내 입으며 나는 이 시기를 음미한다. 규격화된 벽돌들 사이에 건축가의 재미 한 끗이랄까. 이 찰나의 계절에만 허락된 옷은 지금이어야만 한다. 다른 때는 불가능한, 여름과 가을 사이에만 허락된 옷은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긴 팔에 반바지를 입는다. 벌써 장난꾸러기 미소를 짓는다. 나 위는 가을이고, 아래는 여름이야! 여름 내 벗어두었던 양말에 운동화도 신는다. 나는 언제라도 갑자기 걷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분명한 건, 내 걸음은 명랑할 것이라는 것.



  어느 날은 목이 올라오는 스모크 그린 민소매 니트에 통이 후들후들 넓은 크림색 바지를 꺼내 입는다. 폴라에 민소매라니. 남편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지만, 내게는 이 계절의 상징이다. 이 찰나의 계절을 음미하는 나만의 아주 작은 표식이랄까. 이 계절이 아니면 절대로 불가능한, 지금이 골든타임이다. 오늘이어야만 하니 절로 마음이 급하다.



  광택이 나는 카멜 색상의 실켓 티셔츠에 화이트 면바지를 입는다. 행여나 여름이네! 오해할까 봐 실크 스카프를 목에 두른다. 아침엔 목에 정직하게 감았다가 오후가 되면 삼각으로 접어 어깨에 얹어놓을 심산이다. 오늘을 위해 미리 준비해 둔 가을을 닮은 스카프. 레오파드 몇 마리, 베이지에 연한 카멜을 담은 억새, 청록의 책장 칸칸에 꽂힌 아이보리, 네이비, 카멜의 책들. 그 위엔 스모크 블루 하늘이 툭 놓여있다. 내가 좋아하는 프린트들 모음들! 나는 보는 순간 저항없이 사랑에 빠졌다. 가을을 닮은 실크의 시원한 감촉이 목에 닿는다. 목과 스카프 사이의 기분 좋은 틈 사이로 가을바람이 와닿는다. 우아해진 듯한 느낌은 이 다정한 계절이 내게 주는 덤이다.



  열심히 일하는 오후도 나의 삶이고 생각만 해도 들뜨는 퇴근 후 저녁도 나의 삶이다. 여름의 오후도 나의 하루이고, 가을이 오신 이침 저녁도 나의 하루이다. 언제나 우리의 삶은 이렇게 질적으로 다른 순간들의 모음집이었다.



  다만, 치열하게 일하던 오후엔 저녁이 차마 생각조차 나지 않는데, 저녁이 되면 오후의 안쓰러운 내가 생각이 나곤 한다. 여름의 한가운데에서는 가을이 온다는 것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지만, 가을의 초입에는 여름의 날들이 새록새록 생각난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가을은 틈을 주는 계절이어서 그런가 보다. 이 계절엔 이불과 몸, 스카프와 목 사이엔 틈이 있다. 이불이 나이고 내가 이불인 듯 격렬히 밀착되었던 치열한 여름, 또는 오후엔 나를 살펴줄 여력이 없었다. 그러다 저녁을 닮은 가을은 나를 이불에서, 일에서 0.1cm 정도 떨어트려준다. 그 사이로 가을바람이 분다.


  

  이 다정한 가을이 오셨으니 충실히 누리는 것은 숙명이고, 내 삶의 기쁨이다. 긴팔에 반바지를 입고, 오후엔 아이스라테를 저녁엔 따뜻한 물을 마신다. 민소매 폴라니트를 입고, 오후엔 쇼팽의 폴로네제를 저녁엔 김동률 님의 감미로운 목소리,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듣는다. 반팔에 스카프를 두르고 오후엔 쇼비뇽블랑을 저녁엔 피노누아를 마신다.



  다만, 따뜻한 물과 라흐마니노프, 피노누아의 면적이 사각사각 넓어진다. 나는 기쁘게 흠뻑 받아들인다. 그렇게 틈이 없이 격렬했던 내 오후를, 어쩌면 내 올해를 너그러운 시선으로 바라봐주기 시작한다. 그렇게 가을이 온다.




  

매거진의 이전글 가을 산책의 유혹에 덥썩 빠지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