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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윤 Sep 19. 2022

가을 산책의 유혹에 덥썩 빠지기

  엄마는 가을이면 한 번씩 가고 싶던 곳을 슬쩍 우리 가족에게 말하곤 한다. 그런 곳은 티브이에서 봤는데 좋아 보였다거나 오래전에 한번 다녀왔는데 좋았던 곳들이다. 오늘은 드디어 엄마가 여러 번 말했던 제암산 데크길을 걷기로 했다.

  “가을에 산책했는데 좋더라. 걷기도 좋은데 숲도 좋더라고.”       

가벼운 산책을 앞둔 나는 밑창이 얇은 컨버스를 신고  네이비색 PK원피스를 입고 따라나섰다.



  숲은 첫인상부터 마음에 들었다. 숲을 인도해줄 반듯하게 놓인 진밤색의 데크길은 믿음직스러웠다. 단단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진밤색에 발을 내딛는 순간 나는 이 숲을 믿었다.



  데크는 숲의 가장자리와 맞물려 있었다. 데크와 숲 사이에는 하늘까지 쭉 뻗은 편백나무가 숲인 듯 데크 산책길인 듯 모호한 경계를 이루었다. 숲의 가장자리는 걸을 때마다 풀벌레 소리와 흙냄새가 나른한 편안함을 코 끝에 아늑하게 불어넣어 주었다. 그늘진 숲의 가장자리의 쭉 뻗은 편백나무는 언젠가부터 익숙했던 편백의 향을 그늘의 느긋함에 싣고 더 비릿하게 울려 퍼졌다.



  가끔 숲의 천장이 뚫린 곳을 걸을 땐 온몸에 여름과 가을 사이의 어색한 햇살이 부서져 내렸고 아직은 여름기를 못 뺀 햇살 덕에 땀도 몽글몽글 맺혔다. 그러다 다시 아늑한 숲의 그늘에 들어서면 초록의 가볍고 산뜻한 바람이 이마의 땀을 스윽 닦아 주었다. 음식에 단짠이 최고의 궁합이라면, 여름과 가을 사이의 숲의 햇살과 바람이 만들어주는 가벼운 열기와 시원한 바람의 낯선 조우를 느끼는 것은 이 계절 최고의 호사이다.


           

  “있지. 여기가 맞았나? 기억이 안 나.”

  “응?”

  “아니, 지난번에 왔을 때 이 길이었나? 모르겠네.”

  “가다 보면 나오겠지. 길이 여기밖에 없는 것 같은데.”

  “계단이 이렇게 있었나? 아니, 지난번에도 이 길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데.”

오늘도 기억이 두루뭉실한 엄마는 한 발씩 디딜 때마다 의심이 한 발자국씩 더해간다. 엄마는 더욱 무거워지는 걸음에 이젠 살짝 후회를 얹어보려는 눈치다. 그때 눈치챘어야 했다. 이 의심이 뭍은 말은 곧 지난번에 엄마를 황홀하게 했던 그 조그마한 산책길은 이 길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이미 산책코스의 절반이 코 앞이다. 제암산 데크 산책로의 중간지점은 그 이름도 사랑스러운 해피 500. 해피 500으로 가까이 갈수록 숲의 농도는 더욱 진해진다. 높이와 깊이를 더하는 편백나무 숲에는 그  초록의 향이 진동을 한다. 이를 어쩌나. 그 숲의 유혹에 우린 이미 홀려버린채 벌써 3km를 와버렸으니 말이다. 우리 앞에 남은 3km 숲의 길은 이제 자연스러운 우리의 스토아적 운명인 것을.


           

  맞다. 우리는 숲의 아늑한 유혹에 이미 덥석 손을 잡아버린 지 오래다. 초록은 이미 가을 햇살을 맞아 딸랑거리고 있었고, 게다가 코 끝까지 그 향을 스윽 싣고 다가와 우리를 사로잡았다. 숲의 초잎에 계단을 오를 때만 해도 무겁던 허벅지는 이제 가볍게 들어 올려진다. 여긴 가을 숲이니까. 비록 여름의 해는 왕느림보 거북이처럼 느려서 가을에게 자리를 못 비낀 것이 확실한 날이지만, 그래도 바람은 가을이니까. 아직 여름이 남긴 초록의 황홀과 마른 가을바람을 가진 창의적인 숲은 우리의 두 발들에게도 새로운 창의를 전해주었다. 나는 숲의 기름진 갈색의 땅을 힘껏 누르고 가볍게 튕겨 오르는 걸음까지도 숲인 듯했다. 우리는 숲으로, 가을을 기다리는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해피 500을 지나 돌아오는 데크길의 바닥엔 동그랗게 부풀어진 성질 급한 도토리들이 잔뜩 떨어져 있었다. 처음엔 피해보려 요리조리 발재간을 부려보았으나 숲이 깊어질수록 더 많아지는 도토리를 피해 걷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쯤 되면 어느 정도는 밟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반듯한 아스팔트나 데크길을 걷던 스니커즈 밑창을 사이에 두고 반질반질하게 부푼 도토리가 만든 올록볼록한 부피감이 느껴진다. 그 손톱만 한 플랫 한 밑창을 타고 내 마음까지 간질간질해진다.


            

  “여기야 여기. 난 원래 이만큼만 왔었지.”

  “엄마! 여긴 완전 초입이잖아. 우리 올라올 때 집라인 봤었잖아.”

  “그래? 난 못 봤지. 나는 지난번에 여기까지만 올라왔다가 갔는데, 오늘 길을 잘 못 들어서 지금 6km를 걸었잖아.”



  가을의 제암산 숲을 한 바퀴 돌아 다시 출입구로 도착하자 엄마는 발이 아팠다며 신발을 잠시 벗었다. 양말도 신지 않고 스니커즈를 신고 걸었던 우리 엄마. 발등이 신발 안쪽에 쓸려 약간 불그스름하다. 정작 엄마가 걷고자 했던 길은 초입 언저리에 있는 10분 내외 코스였던 것이다. 소소한 산책을 계획한 엄마는 맨발에 스니커즈였고, 나는 원피스에 컨버스였다. 어이없게도 길을 잃어버린 엄마는 우리에게 6km 산책을 하게 했다. 우리는 가을이라더니 여름 같은 햇살과 더위에 당하고, 잠깐이라더니 6km에 당했다.  



  생각해보니, 작년 가을 이맘때쯤도 그랬다. 엄마는 우리에게 신안 병풍도에 맨드라미 축제를 보러 가자고 했다. 정작 우리는 빨갛고 노란 불이 켜진 선명한 맨드라미보다는 그 옆에서 자연스럽게 물결치는 하양, 분홍, 연자주빛 코스모스 꽃밭에 반했었다.



  그리고 그때도 조금만 걷는다더니, 우리는 어쩌다보니 대기점도, 소기점도, 소악도, 진섬, 딴섬까지 다섯 개의 섬에 걸친 순례자의 섬을 돌고야 말았었다. 푸른 남해 바다 위에 조그맣게 떠있는 다섯 개의 섬에 은은하게 놓인 12개의 서로 다른 의미와 외양을 가진 예배당은 하나를 만나는 순간들은 어김없이 다음 예배당을 기대하는 발을 징검다리처럼 놓았다.



  예배당과 예배당 사이에는 작은 섬의 푸른 바다와 초록의 밭, 그리고 시원한 바람이 아늑했다. 점심은 물론이고 간식 하나 없이 들어간 섬에서 우리는 다음을 기대하고 현재의 걸음을 음미하며 온 가을의 오후를 걸었다.



  그리고 며칠을 이야기했다. 그곳이 참 좋았다고. 우리의 어이없는 걸음이 좋은 곳을 데려갔었더라고.


           

  엄마, 남편, 나, 우리 집 여덟 살. 우리는 눈앞의 풍경의 유혹에 쉽게 흔들린다. 정확히 말하면 ‘한 번 가볼까?’ 한 마디를 남기고 유혹에 넙죽 넘어간다. 그렇게 가볍게 내디딘 한 발자국이 그다음 걸음을 가져오는 흐름에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이렇게 욕심많은 두 발을 가졌으나 계획성과 대책은 없는 넷이 가을에 나서면 늘 예상보다 오래 걷고, 그래서 배고프다.


      

  그래 놓고, 좋았다고 말한다. 게다가 다음에 또 와야겠다고 말한다. 그렇게 우리는 마음에 가을의 발걸음 한 챕터를 또 수집한다. 이따금씩 회색의 일상 속에서 위로가 필요할 때나 그날과 닮은 햇살과 바람을 만나는 어느 날, 호주머니에서 그 대책 없던 가을날을 꺼내본다. 그리고 알사탕처럼 입안에 굴려보면 그날의 기분과 향이 함께 온다.           



  우리의 걸음은 지난가을에도, 이번 가을에도 준비는 없었고, 발바닥의 얼얼함과 가을 산책의 황홀함이 가득한 여운은 길었다. 어이없이 수집된 가을산책은 또 다음 발걸음을 떠올린다. 여름과 가을 사이의 어설픈 계절을 닮은 우리 넷의 대책 없는 걸음은 다음 가을엔 어떤 걷기를 가져올까.


           

  가을하늘아래 우린 계획없이 두루뭉실한 사람들이라 아직 상상을 할 수 조차 없지만, 분명한 한 가지. 아마도 우리 넷은 환한 가을빛이 내리는 어느 날의 유혹에 선뜻 손을 잡을 게 분명하다. 우리는 그날에도 간식도, 점심도 없이 작은 산책을 하러 나섰다가 가을의 풍경에 선뜻 우리를 맡기고 몇 시간을 걸으며 그날의 가을을 수집할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우리가 가을을 향해 흠뻑 들어가는 걸음은 우리에겐 자연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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