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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윤 Mar 30. 2022

번거로운 개운함도 좋아

-자율성의 힘

  이상한 일이다. 나는 방바닥에 떨어진 물건이라든지, 책상에 무심코 놓인 자질구레한 물건과 같이 일상의 사물이 눈에 거슬리지 않는 무덤덤한 사람이다. 그런데 어느 날 별안간 청소의 신이 몸에 내리면 갑자기 냉장고를 청소한다든가 겉에서 보이지 않는 서랍장이나 옷장을 정리하게 된다. 그것도 굉장히 열심히, 진심을 다해서.


  이런 내 즉흥적 정리와 청소 태도는 다소 충동적인 데다 비효율적이기까지 하다. 사실, 방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정리하면 물리적인 깨끗함이 한눈에 쉽게 드러날 텐데, 내 정리의 만족은 냉장고 안과 서랍 안에서 온다. 그렇게 집안의 안쪽을 정리하다 보면 괜히 집 전체가 깔끔해 보이는 착각마저 드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다.           



  냉장고 안의 음식 중에서 유통기한이 지났거나 반찬 통에 담아둔 지 꽤 시간이 지났다고 여겨지는 것은 과감히 버린다. 그렇게 설거지 통에 빈 반찬통을 쌓아하는 과정에서 음식물 쓰레기를 만들어냈다는 죄책감이 들며 먹을 만큼만 구입하고 만들어두기로 다시 한번 다짐한다. 이젠 비워진 냉장고의 음식과 반찬을 내 기준에 따라 분류하기 시작한다. 된장, 고추장과 같은 장류는 맨 아랫칸에 놓는 것을 선호하고, 두 번째 칸은 김치와 각종 반찬을 놓는다. 마지막 가장 높은 칸에는 달걀, 당근과 오이, 병아리콩을 삶아둔 채소 통을 놓는다. 이때 매번 중학교 가정 시간에 냉장고 칸마다 기능과 온도가 다르기 때문에 놓여야 하는 음식의 종류가 다르다는 기억이 어렴풋하게 난다. 평소엔 그렇게 휴대폰 검색을 하는 가벼운 손가락을 지녔음에도 이 순간에는 검색하지 않고, 내 기준에 따른다. 우리 집 냉장고 앞에서 나는 마치 법 위에 있는 듯한 무소불위의 파쇼다.



  옷장 정리에 있어서 나의 기준은 더욱 제멋대로 진행된다. 내가 적합하다고 생각하면 그 서랍은 바로 그 기능을 수행한다. 가장 아래 서랍은 청바지, 그 윗 서랍은 가벼운 여름 니트나 티셔츠 칸이다. 그리고 맨 윗 칸은 아직 비어있다. 사실 청바지 칸의 높이는 얇아서 청바지가 가끔 빼꼼히 밖으로 노출되어 있는 날도 있다. 이런 걸 보면 청바지를 다른 칸으로 옮기는 것이 적절하겠으나, 내 기준에 아직 청바지는 맨 아랫칸이다. 내 청바지들은 이렇게도 융통성 없고 생각을 안 바꾸는 고루한 독재자 주인을 만나서 오늘도 그렇게 빡빡하게 살고 있다. (이렇게 쓰고 보니, 미안해진다.)          



  청바지에 미안하게도 나의 애정은 니트 옷장에 쏠려있음이 명백하다. 배분된 옷장의 크기는 이미 내 마음의 크기를 여실히 보여준다. 니트 옷장은 청바지 옷장의 4~6배쯤 된다. 벽면을 따라서 크게 총 4줄로 나뉜 옷장 중 한 줄 전체는 통 크게 가을과 겨울철 니트에게 배분되어있다.



  나에게 아름다운 계절 가을은 니트와 함께 온다. 니트를 좋아하는 나는 가을이 돌아오면 해마다 근사해 보이는 니트의 색이 다르게 떠오른다. 그리고 나에게 다가온다. 그 매력적인 유혹을 떨쳐버리는 것은 아름다운 계절 가을을 누리는 기쁨을 덜어내는 일이다. 나는 그렇게 매정한 사람이 못된다. 그 덕분에 그 해엔 꼭 그 컬러의 니트를 구입하게 되었다. 그 컬러는 어떤 해엔 그레이, 어떤 해엔 스모크 블루일 때도 있는데 그래도 언제나 구비된 것은 믿고 보는 컬러 블랙이다. ‘옷장에 단 하나의 색이 남는다면 블랙이라고 하지.’ 하며 언제나 모든 니트의 소비에는 든든한 합리화가 있다.



  옷장에서 꺼내어 공중에서 절반 접어 넣어두는 청바지 정리와는 다르게 니트 정리에는 여간 공을 들이는 것이 아니다. 먼저 상의 니트를 꺼내서 바닥에 두고 평편하게 편 다음, 어깨 부분부터 팔 부분까지 가운데로 모이게 접고 나서 직사각형이 된 니트의 몸판을 절반으로 접는다. 그 상태에서 옷걸이에 접힌 몸판 부분을 걸쳐서 옷장 위에 걸린 행거에 걸어둔다. 이 과정에서 나는 그때의 나를 만나기도 한다.



  ‘이 초록 니트는 봄이 와서 사고 싶던 게 입고됐다고 해서 갑자기 기립해서 바로 뛰쳐나가 사 왔었지.’

  ‘이 분홍 니트 원피스는 남편이랑 연애할 때 처음 같이 산 원피스! 그때 예쁘다고 잘 샀다고 했지’

  ‘이 그레이 니트는 남편 몰래 샀던 거. 남편에게는 있던 거라고 했지. 눈썰미 없어서 참 여러모로 편해. 아니! 연애 때는 잘 샀다더니! 이젠 나도 눈치 보는 아줌마네!’  



  나는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면서 그때의 나를 만나기도 하고 그 옷을 지금도 입는 나를 오버랩시키기도 하는 딴생각의 세계로 빠지기도 한다. 그렇게 여러 니트를 같은 방법으로 정리하여 비슷한 색감으로 걸어둔다. 마침내 컬러별로 섹션을 나누어 가지런히 걸어둔 니트들의 색을 보고 있노라면 니트의 포근한 질감에 물들어져 있는 파스텔빛 컬러의 베리에이션에 혼자 감동에 빠진다. 주인의 취향을 담아 원색 대신 톤 다운이 되어있는 색이 대부분인데 그래서인지 다른 색감들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져있다.       


    

  남편이 내가 새 옷을 사면 “옷장에 있던 거 아니야?” 하고 말하는 이유를 이제 알겠다. 선호하는 색감이 있고, 라인이 있다 보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 나의 그 취향들이 모인 단정한 옷장이 썩 마음에 든다. (그리고 그러다 보니, 남편 눈을 피해 구입한 옷들을 적재적소에 숨길 수 있어 편리하기도 하다.)      


    

  내 취향이 담긴 옷장을 내 마음과 기준에 따라 정리를 하고, 이에 더해 뿌듯함까지 얻게 된 오후는 참 기분이 좋다. 내 의지와 내 생각을 오롯이 담은 나의 노동에 의해 내 생각이 그대로 구현되는 작은 세상을 얻었음을 두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내가 내 생각에 귀 기울여주는 그 시간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행복을 경험하는 데에는 많은 요인이 있겠지만, 그중에서 ‘자율성’이라는 가장 중요한 욕구가 있다. 내가 나다워지며, 내 생각과 의지가 세상에 구현되기를 바라는 욕구가 그것이다. 내 생각을 담은 언어를 전달할 수 있고, 내 의지가 담긴 행동을 할 수 있고, 내가 내 삶의 사소하면서도 중요한 결정을 해나갈 수 있는 욕구의 충족은 행복을 경험하는 데에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나에게도 자율성은 아주 중요했다. 이것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많은 화와 불쾌의 경험, 황당해서 ‘이게 뭐지?’했던 경험을 되짚어보는 시간이 필요했다. 화창한 일요일에 영화관에 가고 싶은데 교실에 붙잡혀 있어야 했던 고 3의 어느 봄날, 직장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는 순간에 나는 답답했다. 내게 무례한 사람에게 내가 그 말을 했어야 했는데 못했던 순간에 나는 화가 났다. 내가 시할아버지 댁을 가느냐 마느냐에 대해 나를 뺀 남편, 시부모님, 삼촌이 찬반 의견을 내던 첫 명절의 그 상황에서 난 ‘내가 가는 것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의견을 내는 데 왜 나는 의견을 내지 않고 있는가!’ 하고 난 이 상황이 꽤 이상하다 생각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이런 상황들은 나의 자율성을 침해했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가 특히 자율성이 중요한 사람임을 알게 된 이후 남편에게

“난 주윤 패스를 가장 싫어해. 난 그러면 은근하고 길게 기분이 나쁘거나 진짜 화가 나!”

라고 분명히 말해두었다. 그 이후 남편은 나와 함께 해야 하는 일에는 미리 의견을 묻는다. 남편이 먼저 물어보면 나는 ‘yes’로 답하는 빈도가 높다. 어떤 번거로운 일이라도 내가 결정했으니 괜찮아진다.     


     

  내가 사용하는 내밀한 공간인 옷장 안과 냉장고 안을 내 기준에 따라 정리하는 일도 그렇다. 설거지해야 할 그릇이 싱크대에 산더미로 쌓이고, 냉장고 안을 닦고 정리하는 일은 참 번거로운 일이다. 옷장의 옷을 다 꺼내서 옷을 다시 접고 걸어두는 일도 그렇다. 그리고 사실 서랍 안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그 옆 서랍까지 정리해야 하는 대참사가 일어나기도 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노동의 시간과 결과는 참 상쾌하다.      



  내가 보기에 남편에게 그런 일은 캠핑인 것 같다. 텐트를 치고, 여러 캠핑 장비를 설치하고, 요리를 하고 뒷 처리를 하는 그 캠핑의 땀과 노동속에서 그의 발걸음은 자유롭고 가볍다. 한 마디로 그는 행복해보인다. 스스로 하기로 했으니까. 내 기준으로 정리하니까. 그리고 내 결정의 결과가 내 노동에 의해 만들어지니까.

    


  누구에게나 자신의 의지를 반영한 결정에 따른 번거로움과 노동에도 행복할 수 있는, 그 단어도 자유로운 자율성이 보장된 순간을 꽉 쥐어보는 것은 가치있다. 내가 내 삶과 행동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안에서 나의 번거로운 노동의 걸음은 가볍고 유연하며 내 삶의 리듬을 따른다. 그 경험은 나를 기쁘게 한다.


  누군가 세상에서 가장 약한 존재는,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내 보통의 일상 공간에서 내 목소리와 내 행동의 리듬으로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내겐 냉장고와 서랍 정리가 그렇다.


  또 언제 내게 청소의 신이 내릴지 알 수는 없지만 나는 그 순간에도 번거로운 개운함을 느낄 것이 분명하다. 나는 경험이 준 확신이 있다. 그래서 그 순간이 오면, 내 결정에 따른 자연스러운 행동의 리듬에 맞추어가는 과정에서 내 의지가 구현되는 순간을 꽉 쥐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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