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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윤 Oct 07. 2023

사랑이 닿은 아침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아침이다. 물론 눈은 떴다. 다만 허리를 일으켜 세우기가, 아니 이불밖으로 나갈 수 없다. 맵고 시린 공기의 세계에 겁 많은 작은 코가 살짝 닿았다. 비상! 이불 밖엔 가을 아침이 한창이다.



  아는 맛이 무섭듯 아는 추위는 나를 더욱 꼼짝 못 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나는 이불을 헤치고 나가야 하는 k-직장인이기에 다리 한쪽을 이불 밖으로 살며시 염탐을 보낸다. 확실한 패배. 이불 밖은 이미 서늘한 가을 아침이  점령했다. 이건 지는 게임이다.



  세상에 나갈 온기가 고프다. 나는 내 옆에 누운 주윤이의 보드라운 팔에 잔뜩 움츠린 내 팔을 감아 바짝 붙었다. 주윤이의 말랑말랑한 살과 은은한 온기, 그리고 주윤이의 숨을 담은 김이 느껴진다. 나는 혹여 하룻밤을 묵힌 나의 날숨이 주윤이에게 닿아 곤히 잠든 주윤이의 신선한 잠을 깨어버릴까 싶어 주윤이 머리 위에 놓인 내 고개를 허공으로 돌린다.



  은은하고 묵직한 급속 충전을 하니 그제야 이불을 박차고 나갈 힘이 생긴다. 이제야 세상을 향해 절대로 열어질 수 없을 것만 같던 눈꺼풀을 젖힐 힘이 생긴다. 여전히 미약하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느린 속도만 겨우 낼 수 있었지만.



  아...! 나는 또 한 번 철저히 졌다. 내 세상은 두려움으로 가득했고, 나는 어느 곳에도 의지할 구석 없음에도 불구하고 타협없는 세상으로 나아가야 하는 내 처지에 대한 연민과 서글픔을 담아 간신히 눈을 떴는데.......   


  주윤이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나른한 편안함이 담긴 눈으로 나를 보며 천천히 미소를 짓는다.



  아홉 살이 마흔의 내 힘겨운 아침에 비춰주는 따스한 눈길과 미소에 나는 눈물이 난다. 이 아홉 살은 어떻게 이런 미소를 가졌는지, 부스스한 눈빛의 따스한 여운은 어떻게 이러한지......



  k-맘이이어서 설거지를 하고 라이딩을 하고 쌀을 씻고, 매일 무얼 먹을지 고민한다 우스갯소리를 하던 내가 초라해진다. 퇴근을 했지만, 그 대단한 강의까지 투잡을 한 나 이지만, k-맘으로서 냉동 사골국을 끓이고, 달걀말이에 주윤이가 좋아하는 치즈를 넣는다며 으스대었을 내가 쪼그라든다.



  나는 그 대단한 역할을 하고 있노라 으스대며 주윤이에게 온기만으로 가득한 눈빛을 보내주었는가. 내 마음에 도저히 담을 수가 없이 넘쳐흘러 주윤에게 닿을 수밖에 없던 마음을 주윤이에게 건네주었는가.



  나는 가을아침의 시린 냉기가 아닌 주윤의 너그러운 사랑의 눈빛에 졌다. 더욱 거세지는 겨울에도, 그리고 봄이든 여름이든 그 어떤 따뜻한 계절이 와도 나는 오늘을 기억할 수밖에 없다. 이미 새겨진 마음은 닳지 않음을 안다. 시간의 흐름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날이 대부분이겠지만, 나는 오늘 아침을 내 삶의 중심축으로 삼을 것이 분명하다.



  세상이 두려운 아침, 내 아홉 살이 나를 사랑을 담아 바라봐주었다. 아무 말 없이 눈으로 입으로 미소를 담아주었다. 내 삶에 가장 묵직한 행복의 능선을 나는 보았고, 가졌고, 기억하고 있다. 사랑이 닿았고, 나는 그것이 눈물나게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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