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인사는 기억에 남는다. 여고 졸업식날, 교복을 사랑했던 나와 친구들은 다가올 자유의 시간에 대한 기대만큼 우리의 3년이 애틋했다. 겨울과 봄 사이의 2월 말 아침, 나와 친구들은 여느 때처럼 3년간 켜켜이 쌓인 먼지가 내려앉아있는 네이비 재킷과 닳도록 앉아있느라 엉덩이 부분이 반질반질 윤이 나는 초록색 체크 스커트를 입고 만났다.
졸업식의 절차가 구체적으로 생각나지는 않는다. 여전히 교내 잔디에 한 번, 저녁시간에 등나무 벤치 위를 뛰어다니며 잡기놀이하던 저녁, 술래 역할을 했던 친구의 맹수 같던 눈빛 이야기에 또 한 번, 한숨을 쉬며 어른 흉내를 내느라 매일 뽑아먹던 자판기 커피 앞에서 한 번. 우리는 교정에 심어둔 우리의 이야기가 불쑥 튀어나오는 곳마다 멈춰 사진을 찍었다.
마지막의 순간을 붙잡고자 열심히 찍었던 그 사진도 어디 있는지 잘 모르겠다. (물론, 모두 예뻐지기 전이라 예뻐진 후에 이 사진은 대부분 소각되었다는 슬픈 후기가 있다.) 다만, 그날까지도 옆 친구와 함께 팔짱을 끼느라 맞추었던 보폭과 웃음, 여고시절을 향한 우리의 인사는 2월의 햇살에 반사된 교복 스커트와 함께 기억에 남았다.
익숙한 인사도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
늦깎이 공부를 하겠다고 대학원을 다니던 서른의 나는 공부하러 가는 화요일과 목요일마다 뭉게뭉게 들뜨는 마음을 매번 즐겼다. 공식적으로 배우는 사람이 다시 되었다는 것은 일을 하며 소진되었거나 허무로 뚫린 마음에 새살을 채워주었다.
퇴근 후 내 발걸음이 카페와 백화점, 번화가를 걷는 것에서 책상 앞으로 바뀌었고, 인터넷의 연예기사와 자주 가던 친목 커뮤니티의 말랑말랑한 텍스트의 세계에서 원서와 논문으로 빼곡한 세계로 진입하는 일은 꽤나 덜컹거렸다. 그 세계는 도무지 정리되지 않은 어지러운 공사판과 허들의 연속이었다. 그 세계에서 쓰는 단어가 모여 문장과 문단이 만들어지는 낯선 텍스트의 세계. 영어는 영어라서 모르겠고 우리말은 우리말인데도 모르겠는 엄격한 텍스트의 세계로 이사 왔을 때, 나는 모르는 게 많고 멍청한 나와 만나는 게 열렬히 부담스러웠고, 잔잔히 좋았다.
멍청해서 배울 게 많은 내가 좋았다. 경력이 쌓여 하루씩 콧대가 높아지던 내가 하루씩 배움 앞에 겸손해졌다. 퇴근 후, 독서대에 원서와 논문을 얹어두고 한 문장씩 뜯어보면서 무슨 소리인지 어떻게든 알아내고자 애썼던 피로한 밤과 새벽의 시간. 매번 모른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굴욕의 시간을 보내야했던 때마다 내 마르고 낡은 생각에 새살이 돋아나는 게 느껴졌다. 매일의 아름답고 새롭고 힘든 밤과 새벽의 시간은 눈 비비고 일어나 마신 한 잔의 물처럼 달큰했다.
그날도 과제와 팝퀴즈라는 묵직한 책임 앞에 오늘 갑자기 아파야 하나, 갑자기 학교에서 회의가 잡혀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온갖 구실을 만들고만 싶어졌다. 갑자기 가벼운 접촉사고가 나는 것도 괜찮겠지 싶다. 아무래도 이렇게는 발표 못한다.
대학원 수업은 석사 1년 차인 나와 석사 2년 차, 그리고 박사 1년 차 선생님, 그리고 교수님까지 단 넷이 교수님 연구실에서 수업을 한다. 딱 4명이 사이좋게 앉아 티타임을 하면 딱 좋은 아담한 테이블이 전부이다. 도망갈 곳이, 교수님의 눈빛이 닿지 않을 곳이,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은 곳이 어디에도 없다. 퇴로도 명당자리도 없는 전공수업에 이렇게 형편없이 발표준비를 하다니. 지난주에 덜 끝난 동기 선생님 발표가 끝날 게 분명하고, 그러면 오늘은 내 차례인데. 내 모범생 인생에 이렇게까지 질이 떨어지는 숙제를 해본 적이 없다. 모든 이유는 하나이다. 역량부족. 전공에 대한 내 이해가 턱없이 부족한 탓이다.
겨우 출발 마지노선까지 발표자료를 인쇄해서 학교로 간다. 반듯하다가도 가끔 울렁거리는 회색의 납작한 아스팔트를 검은색 타이어로 꾹꾹 누르고 미끄러져가는 내 차 앞에 희고 검은 차를 몇 대 정도 추월한다. 저만의 높낮이를 가진 회색의 네모 건물들을 휙휙 지난다. 회색의 도심에까지 눈길을 멈출 여력은 없다. 이렇게 준비가 부족한데 행여 늦기까지 할까 봐 헐떡거리며 익숙한 회색의 도로를 운전해서 교정에 들어선다. 발표에 대한 걱정과 능력에 대한 실망, 서둘러 운전하느라 고르지 못한 숨이 턱까지 차올라서야 내 눈앞에 교정이 열린다.
아...... 이건 반칙이다.
어머머머! 저건 올리브 그린! 오늘 하늘은 내가 좋아하는 스모크 블루가 투명화장을 했나! 다정하게 푸른 하늘에 마그리트가 그려 넣은 것 같은 구름이 명확한 뭉게를 그리고 그 아래 쭉 뻗은 나무의 초록이 햇살을 받아 딸랑딸랑 초록빛이 울려 퍼진다.
안녕! 모든 봄이 내린 교정이 내게 인사한다. 옷장을 열면 나뭇가지가 내 등을 간질이는 나니아의 세계가 여기에 있다. 교문을 들어서자 내가 지나온 무채색의 세계에서 초록과 파랑, 하양이 울려 퍼지는 세계가 열린다. 서른이 되어 녹색이 좋아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나는 학교에서 만난 초록 덕분에 초록이 좋아진 게 분명했다.
어린이의 감정만 고출력인 게 아니다. 어른의 마음도 좋아하는 마음 앞에 12 기통 800마력은 너끈하다. 부아앙~지난밤과 새벽이 어깨에 얹어 둔 피로가 휘발된다. 아니, 과연 피로가 존재했는지 싶다. 발표에 대한 무거운 마음에 담긴 불안과 걱정이 초록 바람에 밀려가고 그 자리에 오늘의 부족한 나를 어떻게 채워가볼까 하는 생각이 담긴다. 부족한 내가 오늘 수업에서 자주 얼굴이 빨개지고, 교수님의 질문 앞에 당황해서 횡설수설하고, 버벅대는 실패를 마주하겠지만, 실패에서 무엇을 배울지 꼼꼼히 실패를 경험해 보는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초록의 교정 덕분에 다행히 도망가지 않고 제시간에 수업이 있는 건물 앞에 도착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무겁게 느껴지는 가방을 한쪽 어깨에 메고, 인쇄물을 손에 챙겨 차에서 나오자 저 앞에 동기 선생님이 보인다. 내가 주차할 때까지 기다리고 계셨나 보다. 차에서 내린 내가 여느 때처럼 "선생님!"하고 낯익은 인사를 하자 그녀는 "어머! 선생님!" 하고 웃으며 오른팔을 하늘까지 쭉 뻗으며 손을 흔든다. 내가 보낸 익숙한 안녕이 빛나는 환영이 되어 돌아왔다. 순간 좌우로 흔들어 아치를 만드는 그녀의 손이 내 마음에 무지개를 띄운다. 가방과 인쇄물에 단단히 묶여있는 내 손 대신 내 입술 양쪽 끝이 하염없이 넘실거린다. 나를 반가워해주는 한 사람, 그녀 덕분에 내 마음에 밝은 전구가 켜진다. 내 하루가 찬란해지는 순간이다.
"발표 준비하느라 고생했죠. 저도 지난주에..." 우리는 여느 때처럼 서로의 힘듦을 나누며 교수님 연구실이 있는 4층 계단을 오른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덕분에 우리는 서로 발걸음에 서로의 안부를 맞추어본다. 걸어가는 내내 들리던 그녀의 다정한 목소리가 울퉁불퉁한 내 마음을 어루만져준다. 학기 내내 함께 올랐을 그 계단이지만 오늘의 계단은 지난주의 계단과 다르다. 나는 그녀 덕분에 새로운 마음 하나 얻고 올라가는 계단이다. 나도 다음 주엔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해야지. 나도 내 주변 사람들을 만날 때 팔을 쭉 뻗어 손을 흔들며 반가움을 표현해야지. 지난주에도 만났지만 오늘 그녀의 안부를 궁금해해야지.
방학 하루 전, 연서가 점심을 먹고 교실에 올라가지 않고 내 주위를 맴돈다. 내가 식판을 치우고 나오자 내 옆에 선다.
"선생님이랑 교실 같이 올라가고 싶어서 기다렸어요."
"아 그랬어? 우리 산책 잠깐 하고 올라갈까?"
우리는 교정 여기저기에 숨겨진 나무들의 이름을 읽는다. 벌써 작은 연두의 동그라미가 달린 애기사과나무를 보고 호들갑을 떤다.
"연서야 이거 봐! 여기 사과 열렸어!"
"연서야, 여기 매실은 많이 떨어졌다. 그래도 열리긴 열리는구나. 우리 학교에 생각보다 과실수가 많다. 그렇지?"
"선생님, 이 은목서랑 금목서는 뭐가 달라요?"
"어머! 은목서랑 금목서도 있어? 아마 가을에 맺히는 색이 다를 거야. 선생님도 잘은 몰라. 근데 가을에 금목서랑 은목서 향이 은은하게 퍼지거든. 그 향은 정말 좋아해. 가을이 기대된다. 그렇지?"
점심 먹고 쓱 들어가곤 했던 교정 곳곳에 보물이 숨겨져 있었다는 걸 이제야 발견한다. 한 걸음만 옮겨도 사과에서 매실, 살구, 산수유로 이어지는 보물에 눈이 휘둥그레진 나는 여름의 세찬 햇살을 헤쳐나가며 찾고 또 찾는다.
"네, 선생님. 근데 선생님은 어떤 간식 좋아하세요?"
보물찾기에 여념없는 내게 연서가 묻는다. 이거 썸이니? 이게 플러팅이고 그런거니? 나는 불쑥 부끄러운 썸녀가 되어 연서의 정확한 물음에 얼버무리는 대답을 내놓는다.
"선생님은 다 좋아하지."
"그래도요. 뭐 좋아하세요?"
"선생님은 100살이라 다 좋아해."
연서와 4층 교실을 올라 나는 양치질을 하고 연서는 책가방을 메고 교실을 나선다.
"선생님! 좋은 하루 보내세요! 사랑해요!"
"응! 연서도 좋은 하루 보내!"
연서가 매일 하고 가는 '사랑해요, 선생님!' 한 마디는 들을 때마다 편안하다. 연서의 말에 오늘 하루 우리의 교실은 평화로웠구나 하는 안도감이 든다. 사랑한다는 말은 언제나 예쁜 울림을 갖는다.
청소도 해야 하고, 통지표도 나눠줘야 하고, 방학계획, 물놀이와 방학 생활 안전교육처럼 절대 빼먹으면 안 되는 일들로 가득한 방학식날엔 기억 메모리가 없는 내가 긴장하는 날이다. 하나도 빠트리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시간 체크를 하며 하루를 보내고 우리는 서로 인사를 한다.
"집에 갈 때는 차조심! 길조심! 사람조심! 곧장 집으로! 친구들아 안녕! 선생님 안녕히 계세요!"
여느 때와 같은 하교 인사를 하고 어린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선생님! 건강하게 지내세요!"
"선생님! 방학 잘 보내세요!"
"선생님! 더 잘 커 올게요!"
"선생님! 사랑해요!"
여름방학이라는 즐거움 앞에 나에게도 안부를 남기는 명랑한 어린이의 목소리들이 교실의 공중에 둥둥 떠다닌다. 알록달록한 안녕들이 내 마음에도 쌓인다. 그제야 여름방학식 아침, 출근한 내 책상 위에 청록의 스카치 캔디 하나가 투명 테이프에 단단히 붙어있는 작고 빨간 카드가 눈에 들어온다. 작고 소중한 연서가 내게 보내는 안녕이 담겨있다. 한 학기 동안 공부를 쉽게 알려주어서 고맙다는 말, 선생님이 건강한 여름을 보내셨으면 좋겠다는 말, 더 멋있어져서 돌아오겠다는 연서의 안녕은 한 글자마다 윤슬이 비친 푸른 바다를 닮아 반짝거렸다. 익숙한 글자 하나하나가 개별적으로 잔잔히 빛나 내 마음을 밝혀주었다. 연서의 다정한 인사에 전염된 덕분에 나의 여름도 아름다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익숙한 사람, 익숙한 하루에 안녕을 살피는 일이 얼마나 힘이 되는 일인지 깨닫는다. 어제도 만났고 오늘도 만났지만 우리는 매일 인사를 한다. 나의 열 살이 현관문 비밀번호를 띵띵 띵 누르는 소리가 나면 나는 거실 복도 벽 뒤에 숨는다. 열 살이 아무렇지 않게 들어오면 나는 "짠!"하고 열 살을 놀라게 한다. 열 살은 일부러 손에 들고 있던 분식집 종이컵을 손에서 떨어트리며 놀란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웃으며 안고 함께 거실로 들어온다. 퇴근한 남편에게 열 살은 "아! 빠!"하고 제 명랑한 목소리로 온 거실을 채운다. 나는 설거지를 하거나 열 살 숙제를 봐주다가 "남편 왔어!"하고 목소리를 먼저 건넨다. 그런 목소리가 없는 저녁에 우리는 서운한 마음이 든다.
인사에는 너를 아끼는 마음이 담겨있다. 너를 환영하고, 너의 수고를 알고, 너에게 애정이 있다는 마음을 목소리와 미소, 손에 담는다. 인사를 만날 때 나도 이 세계에서 마음 붙일 따뜻한 곳이 있음을 깨닫는다. 안도감으로 울컥하기도 하고 편안함으로 오늘도 살만했다 여긴다.
지난날 그녀에게, 오늘 연서에게, 우리 어린이들에게 받은 인사가 내게 그랬다. 인사는 잔잔한 햇살처럼 내 마음에 내려 내 하루에 온기를 쥐어주었다. 덕분에 나도 낯선 이에게, 소중한 내 사람들에게 두 팔 높이 흔들며 다정한 인사를 건네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한다. 나도 누군가에게 인사의 다정함을 전염시키는 사람이 되고 싶은 여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