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심리
문득 찬장 문에 노란 물방울 기름 무늬가 보여버렸다. 분명 어제도, 일주일 전에도 있었을 테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선명하게 눈에 새겨져 버린 그 기름 무늬. 별안간 살림의 신이 내려버리셨다. 어쩔 수 없다. 운명에 따를 수밖에. 친구에게 받은 기름때가 싹싹 지워진다는 물티슈 뚜껑을 드디어 열었다. 이름도 청소박사. 직관적이고 노골적인 이름부터 마음에 쏙 든다. 하얗고 뽀얀 청소박사 한 장을 뽑아 부엌으로 향한다. 믿을만한 무기를 들고 가는 나의 의기양양함은 부엌보다 크다.
크림색 하이그로시 찬장 문에 반사된 여름빛에 힘입어 오른손에 청소박사 한 장을 꽉 쥔다. 티슈 안에 손톱을 세워가며 노란 물방울 기름 무늬를 닦는다. 어머나. 지저스. 이건 기적! 손이 지나가는 곳마다 노란 물방울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강하게 달라붙은 노랑이는 손톱을 세우고 좀 세게 문질러주자 노랑이는 여지없이 탈락한다. 하이그로시 만세. 청소박사 만만세! 이렇게 눈에 보이는 성과라니! 내 노동을 눈으로 감각하는 희열! 역대 최고 더위라는 오늘, 내 마음엔 우주 최고 에어컨에서 푸른 바람이 시원하게 나온다. 보송보송해지는 마음에 감격의 생기가 돈다.
작은 성공에 힘입어 이젠 넓은 세계로 간다. 청소기를 들고 나와 부엌과 거실 곳곳을 누빈다. 회베이지 바닥에 가지런히 정련된 마루 선을 따라 청소기 꾹꾹 누르며 밀어준다. 기원은 모르나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을 눈곱 같은 먼지가 세수하듯 청소기 속으로 사라진다. 오호라! 이렇게 즉각적이라고? 신이 나서 밀대를 들고 나온다. 밀대에 걸레를 붙이고 역시나 꾹꾹 눌러가며 바닥을 민다. 회베이지 바닥에 반질반질 윤기가 올라온다. 발바닥에 매끈한 찰기가 닿는다. 그동안 꺼끌꺼끌한 발바닥이 밀려나고 지금 내 발바닥과 마룻바닥 사이에 고슬고슬 윤기가 감각된다.
내 손이 지나간 크림색 하이글로시와 회베이지 바닥에 윤기가 스며 여름의 햇살이 은은한 광을 내며 비친다. 하이그로시 찬장에 닿은 손가락 끝과 마룻바닥에 닿는 발바닥에는 보송보송하고 매끈한 감촉의 산뜻한 여운이 남는다. 내 노동의 결과가 즉각적으로 내 눈과 손, 발바닥에 감각된다. 나는 집안일이 주는 즉각적인 성취와 성공에 들뜬다. 청소기와 밀대가 닿았던 식탁 아래, 의자 아래가 윤기가 나듯 내 노동으로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효능감에 비친 내 마음 구석구석은 윤슬에 반짝인다.
나의 업인 배우고 가르치는 일은 느리고 더디다. 개인의 기질과 능력은 힘이 세기 때문이다. 배운다는 것은 내가 선천적으로 가진 강점을 키우는 일과 함께 약점을 키우는 일도 포함된다. 강점을 키우는 일은 자주 신이 난다. 딱히 더 연습한 게 없는데 나는 달리기를 잘해버렸다. 달리기를 할 때마다 칭찬과 주목을 받으니 또 하고 싶다. 계속하다 보니 더 잘하게 되고,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또 연습한다. 자연스레 쌓인 성공경험에 자신감이 두터워지는 건 덤이다.
약점을 키우는 일은 반대다. 약점을 키우는 일은 생각과 태도의 방향을 바꾸어야 하기도 하고, 아예 없던 생각과 태도를 태동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마치 집에 내어져 있는 남향 창을 보고 봄바람의 내음을 맡고, 여름의 초록에 에너지를 받기도 하고, 가을의 마른 낭만과 겨울의 순한 마음을 간직하며 잘 살아온 사람에게 별안간 서라운드 조망을 위해 동쪽과 서쪽에도 창을 내세요. 하는 것과 같다. 대부분은 이렇게 응답할 것이다.
'제가요? 왜요? 굳이?'
귀찮다는 것이다. 서라운드 뷰가 아니어도 내 삶은 괜찮아왔다는 뜻이다. 남향에 난 창이 주는 익숙한 뷰와 생활은 확실한 만족을 준다. 창을 더 내면 더 추울 수도, 더울 수도 있다. 아무래도 지금보다 훨씬 나은 결과를 준다는 보장도 없는데 벽을 뚫고 창을 내느라 들이는 소음과 수고는 번거롭다. 지금 내가 가진 것만으로도 문제 되는 게 없다. 그래서 자주 묻는다.
"수학 왜 공부해야 해요?"
"책은 왜 읽어야 해요?"
"단어 많이 외우면 시험 잘 보는데 원서까지 읽어야 해요? 왜요?"
물론 비교적 순응적이고 온건한 나는 주로 타협하는 학생에 속한다. '이건 시험에 안 나올 거야. 이렇게 어려운데.' 그렇게 낯가림을 하다가 지나간 낯선 글자들. 만날 운명이면 늘 다시 만나게 되어있다고 했던가. 우린 만난다. 시험지에서. 분명 오른쪽 페이지 세네 번째 줄에 그 글자가 있었고, 그 글자 옆에 그려진 그림도, 내가 해둔 분홍색 필기도 기억이 난다. 단 한 가지. 그 명사만 기억나지 않는다. 미음(ㅁ)이랑 비읍(ㅂ)으로 만들어진 글자였던 것 같다. 마치 고무장갑을 끼고 달걀껍데기를 까는 이 찝찝한 기분. 시험이 끝나고 오류 없이 한 번에 그 페이지를 폈을 때 매직아이처럼 그 낱말이 내 망막에 정면충돌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짧은 한 마디. '아.....!' 동시에 깊은 자괴감. 세상 멍청한 학생이 된 나는 시험이 끝났을 때 나는 비로소 그 낱말과 친분을 얻는다. 무용지물, 에잇!
공부는 했는데 시험을 잘 보는 것도 아니고, 내 점수가 팍 튀는 것도, 등수가 오르는 것도 아니다. 공부를 안 했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왜 이리 공부는 더딜까. 왜 늘 내 능력을 의심하게 할까. 자존감 사냥꾼인 공부 앞에서 나는 도망가거나 패배를 인정하곤 한다. 새벽이 내린 시간까지 통계를 돌리고 또 돌려보는데도 유의한 값이 나오지 않는다. 잠재변수를 바꾸어보고 측정변인을 바꾸어본다. 매직아이를 바라며 측정변인의 상관값들을 노려본다. 세상이 나에겐 로또인 게 틀림없다. 내 예측대로 된 게 없다. 주식은 늘 비쌀 때 사서 쌀 때 팔았고, 내가 세운 가설은 통계 앞에 무의미한 결과만 내놓는다. 깔끔하게. 여지없이. 깊은 밤, 반복적인 패배 앞에 몽롱해진 통계 기계가 된 나는 '될 때까지 하면 된다.'라고 하셨던 교수님 말씀의 끄트머리를 겨우 잡고 통계를 다시 돌리고 또 돌린다. 이렇게 해보고 또 저렇게 해보고 요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이 정도면 이판사판이다.
우와와!!! 드디어 회귀계수의 값이. 05 미만을 보인다! 내 논문에 드디어 작은 별이 윗 첨자로 달릴 수 있는 순간이 왔다. 깊은 밤, 온 우주의 별을 다 가져와도 내 모니터에 그 별이 더 빛난다. 내 어깨의 피로가 휘발되며 눈앞을 가리던 뿌연 안개가 걷힌다. 호기롭게 그래프를 그리기 위해 함수를 계산하고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검토를 한다. 응?! 왜 이러지? 첫 번째 계산한 값과 두 번째 계산한 값이 다르다. 사실 이젠 왜 그런지 궁금하지도 않다. 내가 어디선가 잘못한 게 확실하니까. 나는 또 한 번 겸손해진다. 너무 자주 겸손해지는 게 문제일 뿐이다. 다시 세 번째 계산을 해본다. 두 번째 계산과 값이 같다. 다행이다. 최종 값을 입력하고는 그래프 명령어를 돌린다. 불과 몇 초만에 매끈한 선형의 그래프가 나온다. 읽고, 가설을 세우고, 설문을 진행하고, 스크리닝과 코딩, 자료정렬의 과정 후에 반복된 실패까지. 아무렇지 않게 순수한 이 선을 얻기 위해 나는 참 자주 틀렸고, 헤맸고, 그런 나를 수습하느라 내가 참 애썼다. 내 생각을 받아주는 워드와 노트북도 참 고생이 많다. 애들이라고 멋진 사람들의 노트북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냐 싶다. 겸손은 워드와 노트북에 대한 미안함까지 내린다.
새벽이 내린 밤, 그래도 무언가를 했다는 자그마한 별을 눈과 마음, 무엇보다 논문 표에 담고 노트북을 끄고 안방으로 조용히 들어왔다. 남편과 아이는 이미 깊은 잠에 빠졌다.
"부인, 몇 시야?"
"응? 지금 2시쯤?"
나는 일부러 30-40여분을 줄인다. 괜히 그러고 싶은 마음이다. 너무 시간을 많이 썼다고 말하고 싶지 않은 은밀한 이 기분을 나는 설명할 수 없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세네 명의 어린이들이 인사를 한다. 고학년 어린이들의 얼굴엔 이미 피로가 앉았다. 밤새 학원 숙제를 하기도 하고, 과학관 프로젝트를 하기도 한단다. 어린이도 나도 깊은 지난밤의 시간을 접고 오늘 아침, 등교를 했다.
등교(登校). 학교로 가는 오르막. 매 걸음마다 딱딱한 땅을 디뎌 다리의 근육에 힘을 싣고 내 체중으로 무릎과 허리를 누르고, 앞으로 올라야 한다. 숨이 차고 다리가 아프다는 걸 알지만 오른다. 그렇게 오르면 매일 낯선 배움이 기다린다. 지금도 많이 배운 것 같은데, 지금 배운 것만으로도 괜찮은 것 같은데. 낯선 배움 앞에 나는 또 틀리고 실수할 텐데. 그 준비된 배움과 실패 앞에 우리는 매일 선다. 배움의 향연이 동네 곳곳마다 네모난 박스의 교실에서 이루어진다.
조회시간, 여느 때와 달리 교탁에 걸터앉는다. 1교시 숫자들의 규칙과 향연은 잠시 접어둔다. 정해진 숫자들의 질서 대신 우린 주말 지낸 이야기를 한다.
"아빠가 새 차를 사셔서 처음으로 타고 놀러 가서 맛집 다녀왔어요."
"오~~~ 무슨 차야, 무슨 차?"
"응~카니발이야."
"맞아요, 선생님 카니발 좋아요, 저희 집도 그래요."
"아빠들에게 선생님이 노래 하나 추천할게. 커피 소년 노래 중에 아빠는 카니발이라는 노래가 있어. 아빠들이 이 노래 들으면 눈물이 찔금 날 거야. 들려드려. 이때 살짝 놀리듯이 들려드리는 게 포인트야. 알겠지? 석민이는 뭐 했니?"
"학원숙제 했어요. 근데 엄마가 약속 있다고 나가셔서 게임했어요."
"저는 엄마랑 아빠가 주말에 분명히 약속 있어서 두 분이 나가신다고 했는데, 안 나가시더라고요......"
"저는 엄마가 아침에 동물농장 보러 가자고 해서 신나게 따라갔는데, 아파트 지하 헬스장에서 동물농장 보면서 러닝 하는 거였어요. 정말 속았어요."
"선생님은 뭐 하셨어요?'
"선생님? 공부했지."
"엥? 선생님이 무슨 공부를 해요?"
"선생님도 공부를 해. 잘 가르치려면 잘 배워야 하잖아. 선생님도 그렇지만 많은 연구자들이 공들여서 이론을 만들고 잘 가르치기 위한 방법을 연구해. 왜일까? 너희의 배움이 참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야. 너희의 배움은 참 가치 있고 중요한 일이라서 많은 사람들이 평생을 들여 배움이 잘 일어나기 위한 내용과 방법에 공을 들이고 연구하고 있어. 선생님이 공부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너희가 매일 크듯이 선생님도 커야지. 읽고 배우는 일은 평생 해야 하는 일인 것 같아. 자, 그러면 우리 가치 있는 공부를 시작해 볼까?"
우리가 나누는 대화가 쌓일수록 지난밤의 피로가 걷힌다. 어쩌면 우리 교실의 일출은 지금부터일지 모른다.
배운다는 건 모르는 것을 아는 과정이라서 반복적인 실패에 나를 노출하는 일이다.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다. 멘탈 꽉 잡아야 하고, 또 잡아야 한다. 오늘 풀어서 틀린 문제는 내일 풀어도 또 틀린다. 심지어 어제의 오답을 오늘 똑같이 써내기도 한다. 배운다는 건 내 생각의 물길에 새 방향을 내야 하는 일이기에, 내 생각의 창을 두고 옆 면에 새로운 창을 내고 낯선 프레임을 가져야 하는 것이기에 녹록지 않다. 힘든 일이 맞다.
성과가 바로 보이지도 않는다. 과연 이게 맞나,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오늘의 문제를 풀고, 오늘의 글을 읽고, 오늘의 글을 써야 한다. 기다려야 한다. 나의 몸도 마음도 한껏 웅크리고 기다려야 한다. 시간이 쌓여야 내 성과가 겨우 보일락 말락 한다. 손가락만 움직이면 짜릿한 도파민이 쉽게 흐르는 세상에서 기다리라니. 매일 모르는 것 앞에서 무지한 나를 발견하라니. 당연히 학교에 오는 일은 꽤나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럼에도 매일 학교에 오는 우리는 모두 지난밤의 수고를 등에 업고 오늘의 막을 열어젖힌 히어로들이다. 매일 새롭게 네모의 교실에서 일어나는 배움의 향연에 자신을 맡기는 우리는 매일의 실패에 대응하는 어벤저스가 맞다.
새로운 창을 내보자고 제안할 때 그 손을 기꺼이 잡는 사람들이 있다. 번거롭겠지만 기회가 된다면 해보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은 서라운드뷰를 보았거나 우연한 기회에 경험해 본 사람이 가질 수 있다. 번거로움과 귀찮음보다 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클 때 우리는 자발적으로 움직인다. 그때 내 프레임이 새로운 방향을 내고 새로운 뷰와 바람과 햇빛을 얻는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보다 약간 먼저 살아본 낡은 학생이자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내 역할을 여기에서 찾는다. 학생들이 아직 경험해보지 않은 세상을 소개해주는 것. 내가 보여주는 여러 카드 중에서 자신의 마음을 흔드는 카드 한 장을 마음에 담는 경험을 주는 것. 여력이 된다면 배움으로 내가 좋은 어른이 되어 배움의 의미를 내 태도를 통해 보여주는 것. 이게 내 일이지 싶다.
여전히 배우고 가르치는 내 일은 눈으로, 손으로, 발바닥으로 감각할 수 있는 성과를 내게 허락하지 않는다. 더욱이 절망스러운 것은 내가 보여준 경험과 세상의 카드와 그에 맞는 학생의 생각 역시 로또와 같아서 여간해서 서로 같은 숫자를 적어내는 법이 거의 없다. 어떤 햑생은 나를 지나 다른 선생님과 다른 세상을 만났을 때야 경험해 보고픈 카드를 만날 수도 있다. 이것까지 감수하는 것이 나의 일이다. 다만, 내가 많이 배워야 더 넓고 깊은 생각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확실하다. 학생의 삶에 지나가는 한 사람으로서 어쩌다 한 명이라도 내가 보여준 세상과 생각에 영감을 받았다면 그걸로 장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