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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윤 Oct 27. 2024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_신형철[인생의 역사]

상냥한 봄햇살이 딸랑딸랑 빛을 내는 봄의 오후, 아홉 살과 손을 잡고 동네 세차장에 맡긴 차를 찾으러 함께 걸었다. 꼭 잡은 손에는 봄의 다정함이 내렸다가도 반사되기에 충분했다. 나는 바빴고, 아홉 살과 나 사이에 잡은 손 사이엔 팽팽한 긴장과 일방적인 끌어당김 뿐이었다. 아홉 살이 제 검지손가락을 움직여 내 손바닥을 살살 긁는다. 나는 아홉 살의 싫은 내색을 알지만 알지 못한다. 나는 모르기로 했다. 난 실망을 했고 할 말이 많으니까. 내 마음에 가득히 피어오르는 실망은 이제 곧 터지는 일만 남았다.       


    

  “숙제할 때 왜 딴짓하는 거야? 30분이면 할 숙제를 딴짓하느라 1시간이 돼도 못 했잖아.”

  “엄마가 안타까워서 그래. 30분 집중해서 했으면 지금부터 즐겁게 산책하고 집에 가서 쭉 놀 수 있는데, 딴짓 때문에 집에서 다시 또 마무리해야 하잖아.”

  “놀이와 공부를 분리시켜야지.”

  내 잔소리는 옆으로 걸어가며 아래로 쌓인다. 동시에 안다. 내 잔소리는 누구의 마음에도 쌓이지 않음을. 차라리 쌓이지 않음을 다행스럽게 여겨야 할 만큼 아무 쓸모가 없음을.     


      

  나의 잔소리가 옆으로 걸어가며(행, 行) 아래로 쌓이고(연, 聯) 있음에도 시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선명하다. 나는 내 말만 걸어가며 쌓고 있다. 내 말엔 내 실망만 있다. 그 실망을 가장 약한 아홉 살에게 풀어대고 있는 중이다. 나는 반짝이는 봄날 오후의 동네 산책을 기대했으나 잔뜩 실망한 상태인데 내 생각에 이건 다 아홉 살의 딴짓 탓이다.           



  오늘 하루 내내 내 마음에 품었던 기대는 단 하나. 하교한 아홉 살을 만나 봄처럼 따뜻하게 안아주고, 아홉 살이 숙제를 마치면 신나게 손을 잡고 봄의 오후를 걷는 일이었다. 안아주는 것까진 괜찮았다. 1시간이 남았으니 서둘러야 하는데 아홉 살의 걸음엔 직진이 없다. 땅바닥을 보며 마음에 돌멩이를 찾느라 한 걸음 떼기가 어려웠다. 찾은 돌멩이로는 바닥에 그려진 땅따먹기 놀이를 한 번 하느라 이동이 어렵다. 겨우 집으로 들어와 간식으로 재미를 채우고 살살 달래 책상에 앉혔다. 아홉 살의 연필은 제 걸음을 닮았다. 아무래도 저 손에 슬로 기법을 적용시킨 게 틀림없다. 느릿느릿한 연필을 보는 것도 인내심이 필요한데 지우개도 한 번 만지고 종이 모서리도 한번 구부리고, 연필도 두어 번 떨어트리기가 함께였다. 아홉 살에겐 마무리하지 못한 숙제가, 나에게는 화가 남았다.           



  “마늘을 한 접 더 사 오는 것으로 남은 겨울을 준비합니다”(박준_「오늘」)  

  신형철 선생님은 박준 시인을 통해 돌봄을 말했다. 너의 미래를 내가 먼저 한 번 살고 그것을 다시 한번 너와 함께 사는 일이라고. 너의 마음을 아프게 할 말들을 미리 걸러놓는 일이 라고. 너를 돌보는 일이라고, 너를 위한 일이라고 혼자 뿌듯해했던 엄마인 나는 오늘 아홉 살 탓을 했다. 엄마라서 해주는 조언이랍시고 일방적으로 싫은 말을 포개고 또 포개었다. 내가 실망했기 때문에. 내가 기대한 사랑스러운 오후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내 기대를 채워주지 못한 탓을 아홉 살에게 돌렸다.      


     

  자기 중심성은 유아기에 두고 와야 했을 텐데 왜 마흔이 넘는 나는 여전히 이렇게도 자기중심적인가. 내 기대를 타인이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나에게 봄날의 다정한 산책이 온 하루의 기대였다면, 아홉 살에게 온 하루의 기대는 하교 후 집에 오는 길에 만난 봄과 인사하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요즘 한창 땅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살피는 재미에 빠진 아홉 살에게 오늘의 기대는 봄이 내린 오후에 좋아하는 돌멩이 모양을 찾는 일. 그 돌멩이로 땅따먹기 놀이도 하고 엄마 몰래 호주머니에 넣어와서 제 학교 사물함에 넣어놓는 일. 그러느라 아침의 추위가 뭍은 점퍼 안이 뜨듯해질 만큼 온 등에 봄을 묻히는 일. 특유의 느린 걸음마다 재미의 발자국을 남기는 일이 아홉 살의 기대였을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모두 공무도하가의 백수광부의 아내일지 모른다. 임에게 물을 건너지 말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다. 결국 임은 물을 건넌다. 너는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우리는 각자의 기대를 안고 살기에. 무엇보다 나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음을 알지만 여전히 남이 내 생각대로 움직여주길 원하는 이 뻔뻔함은 무엇일까.                


  너도, 나도, 우리의 인생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어쩌면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연 앞에 언제나 나는 매번 새롭게 잊는다. 읽고 감탄하고도, 밑줄을 긋고 인덱스를 붙이면서도 내 삶 앞에서 나는 여전히 제자리를 맴돈다. 나는 언제쯤 오롯이 아홉 살의 기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를 통해 사랑에 임하는 최상의 자세를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살며시 어루만지는 것.” 이 문장에 밑줄을 그으며 나 역시 나의 아홉 살을 떠올렸고 동시에 나를 떠올렸다. 너와 내가 진정으로 존재할 수 있는 마음과 말로 이루어진 시간과 공간을 다짐했다. 하지만 내가 릴케의 시와 신형철 선생님의 생각을 아무리 뿌려보아도 깊이 뿌리내리지 못했다. 내 마음의 토양은 여전히 척박하기 때문이다.           



  나는 시가 어렵고, 시인의 마음이 어렵다. 내 인생의 면적이 그만큼 좁다는 의미와 같아서 참 부끄러워 소리 죽여 겨우 고해성사를 한다. 어쩔 수 없다. 어려우니 계속 읽고 배울 수밖에. 척박한 시의 마음을 성실히 갈고 양분을 줄 수밖에 방법이 없다. 시인의 마음이 눈으로 들어와 마음에 자리 잡는 게 어렵다면 눈으로 보고 곱씹어 마음에 담기도록 읽고 배우는 길 밖에 없다. 이때 시를 마음으로 읽어주는 문장은 컴컴한 밤길 사이사이를 밝혀주는 노란 가로등이 되어준다. 어둠의 걸음에서 만나는 노랗고 따뜻한 빛 덕분에 내 마음에도 겨우 어스름한 빛이 비친다. 신형철 선생님의 인생의 역사는 그렇게 내게 다행이다.         


  

인생은 단호해서 비가역적이다. 되돌릴 수 없다. 이 단호한 사실 앞에 다행인 것은 나는 기록하는 존재가 아닌 기억하는 존재이다. 내 인생의 과정을 연출할 수 있다. 부끄러운 장면은 한없이 부끄럽게 연출하며 반성하고, 아슬아슬하게 기쁜 인생의 순간은 황홀한 장면으로 연출하며 음미할 수 있다. 어쩌면 내가 편집하는 기억이란 인생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그러다가 “운명이 내게 와서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한강 「서시」)하고 묻는다면 나는 얼마간 아무 말 못 하고 내 운명을 바라보게 될까. 그때 내가 어떤 말을 하고 싶을까. 내 오늘을 오늘로 살고, 가끔은 내 오늘을 미래에 선물로 보내며 그렇게 살았다고 나는 말할 수 있을까.      



  글을 쓰며 깨닫는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었다. 오늘을 오늘로, 내일을 돌보며. 내 실망을 아홉 살에게 탓하지 않기로 다시 한번 다짐한다. 아홉 살도 자신의 오늘을 살 수 있도록. 무엇보다 나로부터 제 삶을 지킬 수 있도록 내가 물러서야 함을 또 다짐한다. 내가 가로로 걸어가는 길과 더해지는 연이 시가 될 수 있기를. 그렇게 또 하고 싶은 게 생겼다. 이 책 덕분에.             



  시 덕분에 내가 만든 오늘 오후가 한없이 부끄럽다. 부끄러움을 알게 해주는 시가 있어 그래도 나는 가능성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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