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성주의자들은 지식이란 시대의 권력자들이 합의한 산물이라 말한다. 절대 진리나 지식은 없다는 것이다. 옳다고 믿는 규율이나 법은 나와 다른 절대자가 절대적으로 제시한 것이 아닌 나와 같은 사람들이 합의한 결과에 불과하다. 불쑥 불편함이 와락 다가와 손사래를 치며 아니야 절대 진리가 있지 하는 게 당연한 반응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이다. 사실이지만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불편한 사실.
역사적 경험들은 간혹 그 사실을 증명한다. 지구를 우주의 중심으로 보았던 시대의 진리 앞에 지동설을 주장했던 과학자들은 거짓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보았으니까. 하지만 시대의 진리 앞에 자신을 여러 번 의심했을 것이다. 결국 지구는 돌았다. 과학뿐만이 아니다. 시대의 진리이고 규율이고 규칙이며 우리가 모두 지켜야만 하는 법도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곤 한다. 대한민국에서 호주제가 사라진 것이 그러한 예이고, 나라와 지역에 따라 동성결혼과 마약이 합법이 되고 불법이 되는 시대에 우리는 산다.
경험은 나에게 효율을 가져다주었다. 마흔이 넘는 시간 동안 내가 겪은 성공, 시행착오, 실패는 주름살 하나하나에 켜켜이 쌓여있다. 덕분에 나는 나에게 어울리는 색과 핏의 옷을 실패 없이 고를 수 있고, 상대에게 범한 작은 실수라도 미안하다는 말과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하는 사람이 되었다. 새 학기가 되면 확실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야 학생들이 혼란스럽지 않게 공부를 할 수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방 생활 10년 차인 지금, 여전히 할 수 있는 요리는 열 손가락을 넘지 않지만 능숙한 칼질을 얻은 만큼 준비시간은 줄었고, 살짝 맛의 오각형 어디쯤은 가늠할 수는 있게 되었다. 익숙지 않던 아이폰 사용도 이제는 손가락만 있어도 살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살면서 얻게 되는 경험과 직관은 많은 순간 나를 도왔다.
익숙한 기술을 자동화하는 것은 우리 뇌 발달의 특징이자 장점이다. 어느 활동에 능숙해지면 뇌는 에너지를 덜 쓴다. 용량이 한정적인데 매번 곱셈구구를 외우고, 자전거 타기를 새롭게 배워야 한다면? 반복되는 타자기를 매번 보고 쳐야 한다면? 아마 하루는 48시간이 모자랐을 수 있다. 기능을 자동화시켜서 효율을 높이는 것은 그 영역의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전문가의 자세를 갖추었음을 의미한다. 얼마 전 티브이에서 백종원 씨가 냉장고에 어떤 식재료가 있는지 파악한 후 뚝딱뚝딱 10여 가지 반찬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았다. 하루에 반찬 한 개도 하기가 어렵고 많은 시간이 걸리는 나는 그의 아무렇지 않게 움직이는 몸과 머리에 존경심이 뿜어져 나왔다. 어려운 수학 문제를 많이 풀어본 사람은 시간과 노력을 덜 들여도 어려운 문제를 풀어내는 것도 그렇다. 경험과 익숙함은 효율이 높아서 적은 에너지로 많은 일을 신속하게 해주는 효자이다. 덕분에 알뜰하게 저축해 둔 에너지를 다른 영역에 발휘하며 살아간다.
경험과 직관이 가져다준 효율을 믿고 나는 덜 관찰한다. 자주 보았으니 안다고 생각한다. 혹은 경험으로 오염된 눈으로 대상을 본다. 이것은 보고도 보지 않은 것이다. 나 역시 내가 쓴 글을 읽고 또 보아도 찾을 수 없는 오탈자를 새로운 눈으로 보는 사람은 보자마자 찾아버리는 순간이 잦다. 그때의 망연자실. 익숙함은 이렇게 눈을 게으르게 하고 보이는 대로가 아닌 아는 대로 읽게 한다.
직관, 경험, 판단을 거둬내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다. 대니얼 카너먼의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도 저절로 작동하는 시스템 1의 자동적 판단을 억제하고 의식적으로 조정되는 시스템 2의 작동을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함을 밝혔다. 낯선 눈으로 익숙한 대상을 바라보는 노력을 해야 하고, 내 생각을 지지해 주는 정보만을 선택해서 주의집중하지 않아야 한다. 또는 내 경험을 과신한 채 상황을 보지 않고 판단하는 성급함은 자주 내 발등을 찍게 한다.
자연스러움을 거슬러 올라가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익숙함을 걷어내고 낯선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어쩌면 우리 뇌 활동을 거스르는 일이 맞다. 그래서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나는 안다. 세상엔 공짜가 없어서 내가 들인 노력은 언제나 어떤 식으로든 나에게 돌아온다. 편견과 경험에 속단하지 않고 신선한 눈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그 노력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해 준다. 이때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겸손이 함께일 때 비로소 알게 된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룰루밀러도 말한다. 분기학에 의하면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확고히 믿었던 신념이 실은 거짓이었다는 것. 당대의 학자의 판단과 합의가 존재하지 않는 어류를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게 했다는 것은 그녀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충격이었다.
“다른 세계는 있지만, 이 세계 안에 있다.”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볼 때 다른 세계가 열린다. 세상이 정해준 지식을 의심해 보는 것은 나의 눈에서 온다. 내 귀에서 온다. 먼 옛날 코페르니쿠스가 그러했고, 빠마한 아내의 머리 스타일을 알아봐 주고, 어젯밤 맥주를 잔뜩 먹고 잔 아내가 한 달 전과 같은 치마를 입었을 때 배가 볼록 나왔음을 알아챈 남편의 낯선 시선이 그러했다.
오늘의 나뭇잎의 색과 모양은 오늘뿐이다. 내일 또 다른 햇살이 비칠 때 같은 자리에 있던 나뭇잎은 더 이상 어제와 같지 않다. 낯선 눈으로 세상을 볼 때 그렇게 있는 그대로의 오늘을 오롯하게 알아채며 살아간다. 매일 새롭게, 신기하게, 그래서 짠내 나고 재미나고 신선한 오늘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