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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윤 Oct 27. 2024

우리가 서로 우정하기를_[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흐린 날이다. 주광성 동물인 나는 흐린 날에 취약하다. 그렇지 않아도 일조시수와 햇살의 밀도가 낮은 겨울날에 해가 구름에 가린 날이라면 일단 그 하루의 아침은 접고 간다. 아침부터 시작되는 단념의 마음을 일으켜 세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저 눈을 끔벅끔벅 떴다가 감았다가 한다. 구스가 잔뜩 들어간 이불을 목까지 덮으며 온기를 더해준다. 그렇게 몸과 마음을 데우며 나를 달래고 있다.



  침대에서 뽀시락 소리가 난다. 웃음이 난다. 아홉 살 일어났구나. 아홉 살의 다리 한쪽이 침대 밑으로 내려온다. 흐린 아침에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뜨뜻한 구스 이불에 빌려 흐린 아침을 어떻게든 데워보려는 내 옆으로 아홉 살이 눕는다. 아홉 살은 내 목에 제 두 팔을 감고 내 목에 얼굴을 묻는다. 방학을 맞아 토실토실해진 아홉 살의 볼이 내 목에 닿는다. 내 목에 닿은 아홉 살의 날숨이 따뜻하게 닿는다. 나는 내 날숨이 아홉 살을 불편하게 할까 봐 배게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구스로 데워보려 했던 흐린 날의 내 정서는 이미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 지 오래다.



  "굿모닝! 엄마, 오늘은 날씨가 흐린가 봐요. 커튼이 어두워요. 원래 아침엔 커튼이 노란색이잖아요."

  "맞아. 아침 햇살이 커튼에 닿지 못했나 봐. 비가 왔나? 뭐 그래도 좋지. 그렇지? 방학 만만세야. 아침에 이렇게 주윤이랑 꼭 안고 이불속에 누워있을 수 있잖아."

  "맞아요."

주윤이의 동그란 얼굴이 해님처럼 내 얼굴 위로 올라온다. 그리곤 짧은 뽀뽀. 이건 우리 둘의 약속이다. 늦잠쟁이 엄마를 깨우는 주윤이의 비법.

  


  어릴 적부터 새벽부터 일어나 놀고 싶던 주윤이었다. 아침에 눈 뜨면 얼른 방으로 들어가 빨강 노랑 색종이로 도형도 접고, 레고로 에펠탑부터 콜로세움까지 랜드마크를 만들고, 그림도 그려야 하니 바쁜데 엄마는 도통 일어나질 않는다. 늘 사랑한다고 말해놓고 주윤이가 답답하면 어쩌려고 엄마는 계속 자고만 있는 걸까.



지난밤, 금요일이라며 맥주에 새우깡을 들고 티브이를 틀어놓고 휴대폰 속 세상을 탐닉했던 나였다. 금요일에만 허락된 작은 일탈을 마치니 자정을 넘긴 시각. 감겨오는 눈꺼풀의 무게를 선선히 받아들이는 그 희열은 금요일에 내게 허락된 므흣한 행복감이다. 이 행복은 게으른 토요일 아침과 만났을 때 정점에 이른다. 내일이 없고 오후가 없는 게으름으로 지난 평일을 보상받는다.



  "엄마! 일어나요!"

  "엄마는 늦잠꾸러기예요!"

  아홉 살이 꼬물꼬물 작은 손으로 내 눈꺼풀을 들어 올린다. 아가야. 그 눈꺼풀은 누가 올린다고 올려지는 게 아니야. 나만 올릴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있다고. 아홉 살은 결국 두 손을 내 배에 대고 나를 흔들어댄다. 내 자율성에 대한 침해를 나는 무응답으로 일관했다.



  "주윤아. 엄마에게 소리치면 엄마가 안 일어나지 않을까?"

  "그럼 어떻게 해요?"

  "동화에서 길을 가던 사람의 외투를 벗긴 건 따뜻한 햇살이었어, 아니면 거센 바람이었어?"

  "따뜻해서 외투를 벗었지요."

  "그렇게 엄마의 마음을 녹여봐."



  주윤이는 그렇게 남편의 말을 듣고 돌아왔다. 내 옆으로 와서 누워있는 나에게 뽀뽀를 했다. 나는 잠자는 숲 속의 공주가 된 듯 뾰로롱 일어났다. 내 눈꺼풀은 나의 의지와 다정함이면 기꺼이 올라갈 준비가 되어있었다.

  "주윤이 덕분에 엄마 잠이 확 달아났지 뭐야. 얼른 가서 놀자!"



  이날 이후로 주윤이는 자고 있는 엄마를 깨우는 필살기를 얻었다. 먼저 엄마 옆에 와서 눕는다. 그리곤 나를 꼭 안아준다. 도란도란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며 내 잠을 솔솔 날린 후, 마지막엔 뽀뽀를 한다. 우린 그렇게 손을 잡고 거실로, 놀이방으로 향한다. 다정함은 나와 아홉 살이 닿은 손에 햇살을 비춘다.



  화를 내는 사람에 대한 시선이 따가워지는 요즘이다. 예전엔 화를 내는 사람을 두려워했었다면, 요즘엔 화를 내는 사람을 감정조절이 안 되는 미성숙한 사람으로 여긴다.



  생각해 보면 화는 위계에서 온다. 화를 낼 수 있는 사람은 그 관계에서 갑의 위치에 있는 경우가 잦다. 아무리 화가 나도 을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감히 화내지 못한다. 화를 낸다는 것은 내가 너보다 우위에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행동일지도 모른다.



  위계는 상황이 결정한다. 영원한 상황, 불변한 상황은 없는 것이 세상이다.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지 못하고 위계의 계단에서 사는 삶이 익숙한 사람은 고립된다. 사회지배성향이나 권위주의로 너와 나를 구분하는 사람에게 위계의 계단이 없다면 함께 대화를 나누고 차 한잔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에서는 평등한 우정을 우리 종이 이룬 진화의 힘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일이 우리를 살게 하고 기쁘게 하고 먹고 마시게 하고 충분히 잠을 잘 수 있게 해 준다. 서은국 교수의 행복의 기원에서도 행복이 진화의 산물임을 밝혔다. 그리고 그 행복의 주요 원천은 외향성이라 말했다. 관계 안에서 좋은 정서를 자주 느끼는 삶.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고 연대하는 삶. 그 안에서 우리가 더 나은 삶을 계속 살아갈 수 있는 힘, 진화를 찾는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에서는 그 연대는 이제 사람을 넘어 더 넓은 자연으로 넓혀가는 데 손을 내밀어주었다.



  옆에 있음이 너무 당연해서,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게 너무 당연해서 가끔 나는 주윤이에게 주윤이는 나에게 화를 낼 때가 있다. 그럴 때 내 마음에 나를 위해 그리고 주윤이를 위해 말을 한다.



  "주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다정하게 말하는 거야."

  언제나 내 행복은, 내 삶에 더 나은 정서를 스미게 했던 일은 아홉 살을 꼭 안는 순간에 왔다. 이 순간들이 모여 내 삶의 진화를 이루는 게 틀림없다.



  내가 주윤이와 우정하길 바란다. 엄마여서 아이여서 갖는 위계의 계단 없이 우리가 서로를 우정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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