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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윤 Oct 27. 2024

내 하루도 시가 될 수 있을까_한정원[시와 산책]

 시인의 마음으로 걷는 길엔 어떤 일이 일어날까. 벚꽃 나무 그림자가 내려앉은 노인의 등허리를 보고 온 마음으로 오느라 늙었음을 알아주고, 얼어붙은 강에 잠긴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소금보다 높은 비밀의 밀도를 가진 깊고 푸른 바다의 마음을 헤아리는 걸음을 나는 차마 알지 못한다. 한 걸음에 다음 걸음을 덧 입힐 때마다 더 깊고, 푸르러지고, 울창해질 그 산책을 나는 아직 갖지 못했다. 내 걸음은 아직 외면을 걷고 있다.    


      

  다정하기도 한 시인은 외면과 내면은 다른 게 아니라고 말해준다. 내면과 내면과 내면이 겹쳐졌을 때 가장 바깥에 있는 내면이 외면이 되는 것이라고. 결국 다른 건 아니라고. 내가 고작 걷는 길과 숲의 표면도 다 내면이라고 말해준다. 그렇다면 나도 좀 입지가 생기며 한 발 또 내딛을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내 발바닥에 내 산책의 의미가 연둣빛 싹이 되어 움튼다.


          

  겨울이 가는 지금, 나는 겨울의 마음으로 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쨍한 회색의 추위가 당연한 계절에 나는 춥다고 불평했다. 어쩌면 겨울에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아무래도 아가미호흡을 해야 할 것 같은 습아일체의 계절인 여름, 땀과 함께 잠을 자야 했던 여름밤엔 느린 시간을 한없이 재촉하던 나였다. 40여 년을 살면서 이거 하나만 알아두지 그랬다. 계절을 아무리 재촉해도, 겨울은 겨울의 시간을 다 채우고서야 떠난다는 것을.


          

  오늘을 불평해도 오늘은 오늘의 시간을 다 채우고서야 떠난다. 고통도 이별도 역경도 그렇다. 다신 보고 싶지 않은 한 해도 일 년의 시간을 다 채우고서야 떠난다. 알아서 먼저 가주는 기적은 없다. 그렇다면, 겨울은 겨울의 마음으로 사는 수밖에. 어쩌면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세상에 대한 우아한 자세일 것이다.           



  그 시간을 진심으로 겪고 나면 온 마음으로 살아내느라 내 얼굴은 하루씩 주름이 진다. 이 주름은 애써 억지로 만든 사회적 미소 덕분에 생긴 주름이고, 이 주름은 천장형 히터 아래 앉아서 열심히 모니터를 볼때 건조함이 듬뿍 눈가에 내려 갈라놓은 주름이다. 이 주름은 열심히 타이핑을 하다 보니 손목에 담긴 주름이고, 이 주름은 내가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내 아이의 삐진 얼굴을 보고 너무 귀여워 헤벌쭉 웃느라 생긴 주름이다. 그 켜켜이 쌓인 주름에 내가 있고 내 사소한 하루가 있다.           



  어느 것도 하찮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 시라면, 나의 삶도 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내겐 없을 것이라 여겼던 시인의 삶이 어쩌면 나에게도 허락되었던 것은 아닐까. 시인의 폭과 깊이를 마주할 수는 없겠지만, 내 내면의 가장 바깥쪽의 야트막한 삶도 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오늘 출근을 하며 나누었던 아파트 경비원 아저씨와의 성실한 인사, 하교 길에 바로 집에 오지 않은 아들을 찾아 씩씩거리며 나갔다가 화단에서 돌멩이를 보고 놀고 있던 열 살의 딴짓에 어이없어하며 웃었던 마음, 바쁜 내 걸음에 매달려 자신의 무게를 싣던 열 살의 보폭에 내 속도를 맞추던 걸음. 서로 다른 곳으로 아이 학원 픽업을 가는 길에 달디달고 달디달고 달디 단 밤양갱 노래를 좋아한다 했더니 밤양갱 세트를 선물로 보낸 내 친구와의 사소한 통화.      



  내 삶에도 이렇게 소소한 것들이 있다. 덕분에 내 삶도 덜 다치고 오래 아프지 않을 수 있다. 일상의 폭력과 구태의연함에 함부로 물들지 않을 수 있다. 다행이다.              



  나이가 드니, 새로운 시작 앞에 겁이 많아진다. 괜찮을 일보다 걱정되는 일이 앞선다. 벌어지지 않을 걱정을 하다 보니 오늘을 살지 못하고 있다. 이때 나는 이 책을 펼친다. 시인의 마음으로 내 하루를 비춰준다. 오늘의 마음으로 오늘을 살 수 있도록. 내가 오늘 걷는 한 걸음마다 놓여있는 내 하루의 소소한 것들에 시선을 두도록. 걱정에 내 오늘이 함부로 물들지 않도록. 내 하루에 고요한 시인의 마음을 옮겨 온다. 덕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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