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은 종종 이불과 내 등을 딱풀처럼 붙이곤 한다. 이불에 착 달라붙은 등을 떼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잠을 자던 나와 이별해야하는 것이기에 난 매일의 이별 앞에 늘 질척대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이불과 내 등 사이엔 신선한 아침 공기가 지나다닐만한 가벼운 공간이 있다. 기지개를 켜는 팔에서 손가락 하나하나가 가볍다. 티끌만 한 잠이 하나도 붙어있지 않은 가벼운 아침이다.
침대에 누운 아홉 살이 또르르 굴러서 내 옆에 눕는다. 따뜻한 아홉 살의 배가 내 등에 닿는다.
"안녕! 안녕! 아침이 밝았어요! 우리 모두 일어나 아침을 시작할까요~안녕! 안녕! 아침이 밝았어요!"
아홉 살이 아가였을 때 도로 위에 까맣던 우리 차 안을 명랑하게 울렸던 동요를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러준다. 아홉 살은 입술을 단단히 닫은 채 좌우로 부드러운 곡선을 만들고 두 눈에 사랑을 담아 웃는다. 그리곤 두 팔을 쭉 내밀어 내 목을 감싼다. 내 두 팔은 아홉 살의 엉덩이를 팡팡 다독여준다.
나는 원래 이렇게 느긋하고 여유로우며 다정한 엄마일까? 아홉 살은 원래 사랑이 많고 달콤한 어린일까? 사랑이 많고 다정한 성격의 우리여서 목요일인 오늘, 게으르고 나른한 아침에 평화와 사랑이 온 안방을 채워 난방한 가스보다 더 큰 훈훈함을 주는 걸까? 이 물음은 다음의 한 마디에 어느 정도 답을 보낸다.
"방학이어서 진짜 좋다. 그렇지? 방학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어!"
그렇다. 사랑이 많았던 아침이 가능한 확실한 이유는 오늘이 방학이기 때문이다. 무려 목요일 아침임에도 눈을 떠야 하는 시간이 아닌 눈이 떠지는 시간에 일어나 사랑이 많은 아침을 나눠 가질 수 있는 명백한 이유. 이불에 잠을 탈탈 털어내고 가벼운 몸으로 일어서며 서로를 꼭 안고 거실로 나갈 수 있는 선명하고 묵직한 이유는 하나, 오늘이 방학이기 때문이다.
"주윤! 엄마 커피 부탁해!"
부은 얼굴을 마주하며 천천히 달걀을 삶고, 빵을 구워 커피와 우유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한다. 사랑이 많은 아침, 오늘은 목요일 방학 아침이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으면 그 사람의 선택과 행동을 보라고 조언하는 편이다. 말은 행동보다 쉽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렇다면 오늘 아침의 나 행동을 본 사람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다정한 엄마, 느긋한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다. 노란 햇살이 비치는 아침, 노란 아침 햇살만큼 따뜻한 토스트 굽는 냄새와 뽀얀 두 볼에 뽀뽀로 아이를 깨우는 다정한 엄마. 그리곤 예측할 것이다. 저 엄마라면 언제나 다정하게 아이에게 말할 거야. 혼낼 때도 차분히 설명하며 달래겠지. 저 성격이라면 충분히 그러고 남아.
미안하지만, 출근길 아침의 나는 불도저다.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 3번 참다가 결국 목청 자랑을 한다.
"주윤! 5분 안에 이 닦고 세수하고 나와야 해!"
"주윤! 지금까지 뭐 했어! 장난하지 말고 딴짓하지 말아야지!"
그러다 풀 죽은 아홉 살 뒤통수에 쩌렁쩌렁 울린 내 목소리가 미안해서 현관으로 나가는 길에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주윤아, 엄마가 아침에는 마음이 급해. 아침 5분은 10초인 것 같아. 엄마가 화내서 미안해. 근데 늦으면 안 되잖아. 낮이나 저녁엔 괜찮은데 아침엔 주윤이가 딴짓하면 마음이 급해져서 화가 나거든. 딴짓은 오후나 저녁에 하자. 알겠지?"
주절주절 이유를 붙여가며 학교 가는 주윤이를 한 팔로 안고 말한다. 한 소리 크게 들은 주윤이의 눈가가 이내 붉어지며 동그랗고 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힝. 나도 차분하고 싶다.
태도와 행동을 결정짓는 것은 사람일까 상황일까. 어느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고유한 정의적 특성을 성격이라고 한다. 일시적이거나 반사적인 면은 성격이 될 수 없다. 성격만으로 그 사람의 행동을 이해하거나 예측할 수 있을까? 그러기에 방학 중일 때의 나와 학기중일 때의 나는 엄마로서 온도차가 상당하다. 어쩌면 방학이라는 상황이 내 행동에 너그러운 여백을 쓱 밀어준 것은 아닐까.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재미난 실험을 했다. 연구자들은 신학생을 두 집단으로 나누어 다른 상황을 설정했다. 한 성직자 집단은 다음 스케줄까지 시간이 촉박한 상황이었고, 다른 성직자 집단은 여유 있는 상황이었다. 이때 각 집단의 성직자들이 지나가는 길에 쓰러진 사람이 보인다. 과연 성직자들은 그 사람을 도울까? 그냥 지나칠까? 연구 결과는 63% vs 10%였다. 여유 있던 성직자 집단에서는 63%의 사람이 쓰러진 사람을 도왔고 촉박한 상황에 있던 성직자 집단에서는 10%가 쓰러진 사람을 도왔다. 이 실험은 행동의 차이를 만드는 것은 종교관이나 성향보다는 바쁜 상황임을 보여준다.
나의 경우도 그렇다. 방학이라는 여유로운 상황에서 나는 너그러웠다. 낯선 상황에서 말을 한마디도 못 하고 낯을 잔뜩 가리다가도 친구들을 만나면 농담을 해가며 말 못 한 억울한 사연이 있었다는 듯 말을 신나게 한다. 호감이 가는 사람 앞에 서면 눈에 반짝이는 전구가 켜지면서 다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지만, 불편한 사람 앞에서는 시선은 되도록 멀리 보고 말투는 다나까로 끼워놓는다. 어떤 상황에 처하느냐에 따라 나는 다른 행동을 가진 다른 사람이 되곤 한다.
참 신기한 건, 나를 이해할 때는 상황을 보면서 타인의 행동을 볼 때는 그 사람의 성향으로 판단하곤 한다. 내가 약속시간에 늦은 것은 내가 게으르고 행동이 느린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하필 출발 직전에 차 앞에 이중주차가 되어있었는데 차까지 막혔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대학시절, 강의시간에 늦는 친구를 보고 생각했다.
'애가 원래 시간 약속을 안 지키나? 수업시간이 안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
'나라면 이렇게 할 텐데. 저 사람은 왜 저러는 거야?' 하는 타인도 나처럼 생각할 거라는 자기 중심성은 타인을 책망하는 용도로만 쓰이는 게 분명하다. 타인의 행동을 이해하려는 순간에는 전혀 쓰이지 않는다.
타인도 나처럼 사정이 있고 상황이 있다. 성격대로 행동하기보다 상황에 맞게 행동하는 것은 너나 나나 마찬가지이다. 내 행동을 설명할 때처럼 타인의 행동에 묻어있는 상황을 보려는 균형 있는 눈은 너와 나의 간극을 좁혀주고, 어쩌면 더 나은 상황을 만들어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하게 한다. 쓰러진 사람을 도와주는 큰 친절에서부터 뒷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주는 작은 친절도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있어야 가능하지 않을까.
이틀 전 원두를 사러 갔을 때 오늘 코스타리카 원두가 볶아져 나오는 날이라고 점원이 귀띔을 해주었다. 평소 플로랄 향과 과실향이 풍부한 미디엄 바디감의 원두를 선호하는 나를 아는 점원은 눈을 반짝이며 내게 아름다운 소식을 알려주었다. 약속의 목요일. 하루종일 비가 내린다. 향이 더욱 진해지는 비 오는 날, 향이 좋은 원두를 사기에 좋은 날이다. 원두를 사면 무료음료 한 잔을 서비스로 주는 곳이다. 내 인생 라테가 있는 카페여서 늘 라테를 주문하곤 하는데 오늘은 아메리카노를 부탁드렸다. 멜론과 포도향이 담겨있다는 새 원두가 내 비어있는 식도에 은은히 퍼졌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상냥한 점원은 나에게 따뜻한 잔을 넘겨주었다.
"어? 저 오늘은 아메리카노 주문했었어요. 라테가 나왔네요."
"아! 정말요? 죄송해요. 다시 만들어드릴게요. 혹시 괜찮으시면 기다리시는 동안 이 라테도 함께 드시겠어요?"
그녀는 유독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이어서 라테까지 나에게 선뜻 준 걸까? 주문착오에 순간 당황스러움과 미안함을 표시한 그녀는 능숙하고 편안하게 아메리카노를 다시 만들어주었다. 그녀가 큰 동요 없이 바로 주문착오를 부드럽게 처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카페가 그녀에게 그 정도의 재량권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주문착오에 대한 질책이나 까다로운 검수가 아닌 커피 한 잔 정도는 처리할 수 있는 환경. 그 환경은 그녀를 친절한 점원이 되게 해 주었다. 역시나 오늘도 묵직한 부드러움 위로 맑고 가벼운 향이 반사되는 라테가 내 비어있는 식도를 타고 내려가 나를 따뜻하게 데워준다. 그녀의 친절에 내가 더 따뜻하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면, 내가 내 환경을 좋은 곳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여유로운 상황을 위해 20분 먼저 일어나는 노력이 필요하다. 업무를 닥쳐서 하는 바람에 말도 안 되는 오탈자에 자괴감을 느끼기보다 적어도 마감 하루 이틀 전에 끝내려는 계획이 필요하다. 내 역량을 발휘하고 싶다면 그 역량이 발휘될 수 있는 환경을 선택하고, 또 내 환경을 수정해 보려는 노력 또한 필요하다. 그렇게 내 환경을 좋은 곳으로 만들 때 나는 내 업무를 만족스럽게 해내면서도 다정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 주변을 좋은 사람들로 꾸리는 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좋은 사람이 된다. 내가 배울 점이 있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겸손해지고 정교해질 수 있다. 좋은 사람은 무엇보다 좋은 환경이 되어준다고 믿는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환경이다. 나는 아홉 살에게 엄마이자 40대 여성으로서, 남편에게 아내이자 친구로서의 환경이다. 엄마에게는 조용히 할 말 다 하는 딸로서, 언니에게는 되바라진 동생으로서, 조카들에게는 예쁜 거 좋아하는 이모로서의 환경이다. 친구들에게는 아는 것도 정보라고는 없이 마이웨이하면서도 맛집 좋아하는 실없는 친구이고, 학생들 앞에서는 긴장을 숨긴 채 아는 게 많다는 듯 계속 설명하는 교수자이다. 각자들에게 나는 각각의 환경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 나라는 환경에 따라 아홉 살, 남편, 엄마, 언니, 조카, 친구, 학생의 행동은 달라진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내가 나로 잘 살 수 있는 상황과 환경은 어떤 모습인지 그려본다. 나에게 내 행동방향에 대한 선택권이 있고, 내 유능성을 경험할 수 있으며 좋은 사람과 맛있는 커피나 와인을 나누며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는 상황. 그 안에서 나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상황이 무엇인지 정의해 보는 일, 어쩌면 내가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시작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