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사실 공부를 좋아하는지도 몰라요."
제 손톱 밑 거스러미를 보던 눈이, 국어시간임에도 손에 쥐고 있던 가위를 향했던 눈이, 분명 75페이지 수업 중이었는데 74페이지를 보고 있던 눈이 갑자기 나를 향한다. 아, 이런 어처구니없는 말도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구나. 여기저기서 억울한 표정들이 두더지처럼 튀어 오른다. 못 볼 걸 보고 못 들을 걸 들은 듯 어이없는 표정. 이거 싸우자는 건가 하는 힘이 빡 들어간 눈을 치켜든 표정. 잘못 채점된 시험지를 보고 답을 고쳐달라는 듯한 표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랑곳없이 또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사실은 공부를 좋아하는 데, 그 마음을 들킬까 봐 숨기고 있는 거죠. 부끄러우니까."
이쯤 하면 싸우자는 게 맞다. 여기저기서 진실의 함성이 터져 나온다. 말이 아닌 말을 곱게 하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는 없다. 어린이라는 이름으로! 정의롭게! 아무리 선생님이어도 안 되는 건 안된다고 말해야 하니까.
"그게 말이 돼요?"
"지금 얼마나 힘든데."
"숙제하느라 어제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공부하느라 못 놀잖아요!"
"에이~그짓말!"
"저는 축구가 제일 좋아요."
"지금 학교에 왔잖아요."
"학교에 가야 하니까요."
"엄마가 가라고 하니까요."
"수업에 아름답게 참여하고 있잖아요. 발표하고, 노트정리도 하고, 문제도 풀고."
"수업시간이니까요. 혼나잖아요."
"선생님이 혼내진 않잖아요. 조용히 쳐다볼 뿐."
"아, 그거는."
"여러분은 하기 싫다고 하면서 해요. 심지어 열심히 해요. 좋아하니까."
"아니거든요!"
아무리 선생님이어도 내 마음은 함부로 꺾을 수 없다. 학교생활 4년 차. 이제 초보 딱지는 뗀 지 한참 되었다. 지난 4년간 학교를 다닌 경력직 어린이가 공부를 싫어하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다들 그러니까. 친해지는 데는 뒷담화만한게 없지 않나. 우리 모두의 뒷담화, 공부. 공부를 싫어하는 마음은 딱풀처럼 학생을 하나로 연결해 주었다. 공동의 적을 가진 것은 얼마나 안심을 주는 일이던가.
"공부가 뭘까?"
"네?"
"공부가 뭐라고 생각해?"
"싫은 거요."
"우리는 자주 보면 안다고 생각해요. 사실 그렇지 않거든. 여러분은 부모님이 어떤 음식을 좋아하시는지. 직장에 갈 때 어떤 방법으로 가시는지. 점심은 무엇을 드시는지. 어떤 색을 좋아하는지 알아요? 잘 모르죠. 그러면서 부모님을 매일 만나니까 안다고 생각해요. 실상은 모르면서.
마찬가지예요. 공부를 매일 하면서 공부가 뭔지 궁금해 본 적 있나요? 공부를 자세히 살펴봐준 적이 있나요? 그러지 않고 무턱대고 다른 사람 말을 듣고 공부를 오해한 건 아닐까요?"
"공부를 매일 하니까 알죠. 힘들어요."
"공부는 늘 힘들기만 했나요? 좋았던 기억도 있었을 텐데. 공부가 도움이 되었다거나, 공부 덕분에 좋았다거나. 아! 이때 생각해 볼 건, 공부는 국어, 수학만이 아니잖아요. 축구도, 피아노도, 식물 이름 아는 것도, 친구에게 사과하는 것도 다 공부잖아요. 공부를 너무 좁게 보는 건 아닐까요?"
나에게 공부란 무엇인가. 공부가 내 업이라면, 경험과 생각을 내 필터로 걸러 나만의 정의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생에게만 공부가 업은 아니다. 평생학습자로서 살아갈 우리에게 공부는 살아가는 데 필요한 영양소와 같다. 배우며 살아가는 사람은 공부가 무엇인지 내 말로 정의를 내릴 필요가 있다. 어떻게 정의 내리느냐에 따라 어떤 공부를 할 것인지, 어떤 태도로 공부할 것인지, 공부를 하며 겪는 지난한 어려움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어느 순간 기쁠 것인지가 달라진다.
나에게 공부는 나를 나답게 살아가도록 스스로를 돕는 일이다. 공부는 두루뭉술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두루뭉술한 나에게 조각칼을 들고 그 안에 숨겨진 나의 형태를 드러나게 해 주었다. 공부는 나를 보여주었다. 어떤 글을 읽으면 재미있었다. 어떤 분야를 공부할 때는 어렵지만 더 궁금했다. 어떤 분야는 제 아무리 읽어도 도통 이해되지 않아 이 분야에 내가 젬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좀 더 좋아하고 궁금하고 더 배우고 싶은 공부가 무엇인지는 공부를 할 때 선명히 드러났다.
공부의 과정에서 만난 새로운 세상은 내 삶의 면적도 넓혀주었다. 학교심리에 대한 여러 분야 중 내 마음을 끈 것은 행복이었다. 심리학의 관점 중 긍정심리와의 만남이 참 좋았다. 행복이 무엇인지, 행복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는 심리적 자산은 무엇인지, 역경에도 불구하고 행복을 이끌기 위해 불씨를 지펴야 할 것은 무엇인지 연구를 한다니! 학교에서 행복했던 내가 학교에서 배우며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는 건 자연스러웠다. 긍정심리학의 눈으로 학교와 배움을 자세히 보았다. 부담스러운 마음이 헝클어놓은 배움에 대한 흙탕물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며 천천히 보니 배움의 맑은 조약돌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그 위를 명랑하게 흐르는 배움이라는 맑은 물이 조약돌과 만나서 손뼉 치는 조잘조잘 소리가 아름다웠다.
공부를 하는 사람이 공부의 반짝이는 면을 발견하니, 내 삶이 좋아졌다. 내가 좋아하는 순간의 조약돌을 모으는 습관이 생겼다. 봄향기 은은한 커피, 봄날의 명랑한 쇼비뇽블랑, 여름의 산뜻한 까바, 비 내린 직후 진한 숲 속 산책, 연둣빛 새싹이 황금빛을 받아 딸랑거리는 봄 산책, 운전하며 듣는 어떤 날은 피아노, 어떤 날은 롹큰롤. 이 순간들은 내 삶에 오독토독 귀여운 자수를 놓아주었다. 노랑, 하늘, 연두로 놓아진 색실의 자수는 구태의연한 납작한 일상에 입체적인 질감을 만들어주었다. 마른 손으로 내 삶을 매만질 때 그 자수들을 만나면 내 손은 생기를 더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졌다. 내게 좋은 사람이란 읽으며 세상에 대한 해상도와 감수성을 넓혀가는 사람. 쓰며 그 마음을 나누는 사람. 내 생각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 사람. 세상을 입체적으로 보는 사람. 읽을수록 겸손해졌고, 쓸수록 부족함을 느꼈다. 모르는 세상을 책에서 만날 때 내 좁은 생각만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될 수밖에 없다. 겸손하고 다정해질 수밖에. 그럼에도 남아있는 내 필터로 걸러보지 않은 내 오만함을 경계하는 것도 읽는 활동에서 얻어졌다.
강요할 수는 없지만 좋은 것을 나누고 싶은 마음은 든다. 공부를 자세히 보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그러면 어린이들이 좀 더 공부하는 자신에게 자부심을 가질 수 있을 텐데. 공부를 하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인지. 공부하는 순간이 저를 얼마나 잘 키워내는 일인지. 공부로 우리는 상상보다 더 좋은 내가 될 수 있음을 알았으면 좋겠다. 공부하는 순간, 그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았으면 좋겠다.
공부라는 세상을 보여주는 일. 어쩌면 내가 해야하는 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어서 귀한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