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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엔 좋아하는 마음, 놓치지 않을 거예요.

자기개념 self 자아정체성

by 주윤

“난 어릴 때 딱히 좋아하는 게 없었어. 선생님을 좋아해 본 적도 없었고, 다른 친구들처럼 자정에 음악도시를 듣고 음악도 음악도 들었지만 폭 빠져서 탐닉해 본 적은 없어. 공부도 고만고만하게 했고, 친구들이랑도 안 싸웠고, 눈치껏 내가 할 일은 알아서 했으니 혼 날일 없었지. 평범한 애였어.”

“그래? 부인도 알다시피 난 어릴 때부터 차에 꽂혀서 꿈도 엔지니어가 되는 거였잖아. 6학년 때 삼촌이 처음으로 자동차 잡지를 사줬는데 그때부터 모은 게 아직도 있어. 시험이 끝나면 프라모델 만드는 게 낙이었고. 음악도 하드롹 좋아했지. 나는 좋아하는 게 확실했는데. 부인은 다르다.”

“응. 알지. 번호판 옆에 달렸던 남편의 무광블랙 요상한 차를 기억하지. 나는 그랬어. 아무거나 다 괜찮은. 의견이 없었지. “



겨울의 햇살이 거실 창 가까이에 둔 우리의 블랙 테이블까지 그 투명한 빛을 깊게 보내준 새해의 오후. 테이블에 마주 앉아 피노누아와 샤르도네가 블렌딩 되어 과실감과 빵맛이 조화를 이룬 크레망 한 잔씩을 앞에 둔 우리의 대화는 어느덧 여기까지 와 있었다. 시작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겨울 오후의 여리한 황금빛을 담은 크레망의 버블이 샴페인잔의 바닥 부분부터 표면까지 가볍고 가볍게 솟아오르듯 우리의 대화는 가볍게 여기저기를 튀어 다녔다. 동시에 크레망이 사과와 배의 가벼운 달큼함과 시트러스의 기분 좋은 산미, 효모의 고소함을 남겼듯 내겐 한 가지 생각이 남았다.



‘한 사람을 오직 그 사람으로 빛나게 해주는 건,

좋아하는 마음.‘



좋아하는 마음이 불현듯 스칠 때 보통의 일상은 물을 준 잎처럼 생생하게 피어난다. 내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저녁을 준비하려고 쌀을 씻어 밥통에 앉혀두고, 달걀 프라이를 프라이팬과 나눠먹지 않기 위해 스텐 프라이팬을 달구는 사이에 습관처럼 켠 스마트폰에서 나는 만나고야 말았다.



시즌 내내 사고 싶던 스카프! 드디어 재고가 풀렸구나! 이렇게 불현듯, 기대도 없고 준비도 없는 지금이지만, 지금만이 그 타이밍이다. The time is now! 그때 세상엔 이 스카프와 나만 있다. 행여 결재하다 품절이 될까 손가락을 떨며 로그인을 하는데 비밀번호가 생각이 안 나서 메모장에 비밀번호를 다시 확인한다. 또 기억이 안 난다는 짜증과 함께 제발 내 휴대폰은 나를 믿어주면 좋겠다는 바람이 한가득이다. 이 순간 그 스카프는 이 세상에 단 한 장 남은 스카프임에 틀림없다. 전전긍긍하며 결재 성공. 흥분의 여운이 여전히 남은 심장이 두근거린다. 쇼핑의 기쁨이 전신을 휘감는다. 정신을 부여잡고 스카프를 한 나를 상상하며 이제 현실로 돌아오자, 내 앞의 프라이팬은 화산처럼 연기를 뿜어댄다.



인덕션 불을 끄고 프라이팬의 열기와 나의 흥분을 함께 가라앉힌다. 뭐, 어때. 괜찮지. 좀 이따 하지 뭐. 아름다운 것, 스카프를 좋아하는 내 마음이 이 정도는 다 괜찮다고 해준다. 좋아하는 마음을 꽉 잡은 덕에 일상의 나는 조금 더 너그러워진다.



나는 스카프를 한 나를 좋아한다. 나를 위해 내가 애써준 마음 덕분에 나는 내가 좋아하는 나를 또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나를 좋아하는 마음 쪽으로 데려가주었다는 것만큼 기쁜 일이 있을까. 좋아하는 마음이 과정에 있을 때 우리는 자주 괜찮아진다. 잔잔한 흥분의 열기에 심장이 건강히 뛰고 손발에 희열의 땀이 쥐어진다. 그래, 살아있다 느낀다. 잘 살고 있다 만족한다. 나답게.



좋아하는 마음은 가끔 이렇게 철이 없다. 일상을 잘 살아가기 위해 모래주머니 잔뜩 달아놓은 해야 할 일들과는 결이 다르다. 좋아하는 마음은 일상의 중력 사이사이에 풍선처럼 떠다니곤 한다. 손에 잡힐 때도 있지만 대게는 저 멀리 날아가는 노랗고 파란 풍선을 보며 나도 좋아하지 하는 씁쓸한 마음을 남기기 마련이다. 우리에겐 이미 해야 할 일 보따리들이 두 어깨에, 팔 목에, 양손에 가득 메어져 있고 달려있고 쥐어져 있기 때문에 쉽게 손을 놓을 수 없다. 일상을 아무 일 없이 이루어나가는 데는 해야 할 일을 성실히 해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좋은 사회는 각자 제 일을 성실히 해내는 곳이라 나는 믿고 있으니까. 해야 할 일들을 하며 나의 역량이 키워지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배웠으니까.


동시에 나는 좋아하는 마음이 나를 우주에 다 한 사람으로 만들어준다는 것도 안다. 좋아하는 일 앞에 눈이 빛나고 심장이 뛰고 손에 흥분의 땀이 난다. 더 잘하고 싶고, 더 알고 싶고, 더 아름답게 해보고 싶고, 더 하고 싶고, 보고 싶고, 더 살피고 싶고, 더 함께하고 싶다. 그 마음들은 보일 수밖에 없다. 붉게 상기된 표정과 호들갑스러운 몸짓으로. 들뜬 목소리와 흥분과 열의의 눈빛으로. 그때 우리는 온전히 나 다워진다. 고유한 내가 된다. 순수한 내가 된다.



새해가 되어 처음으로 시작한 아침 조회시간. 한 살씩 더 먹은 나와 어린이들이 만났다. 무슨 이야기를 해볼까 하다가 장기하의 노래, ‘새해 복’을 틀었다.

“새해 복 많이 받았나요? 선생님이 정말 감명깊은 노래를 하나 들었어요. 같이 들어봅시다.”

새해 복 만으로는 안돼. 니가 잘해야지. 노력을 해야지.
새해 복 만으로는 안돼. 니가 잘해야지. 노력을 해야지.

노래가 진행될 수록 어린이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어때요! 선생님은 너무 감명을 받았지 뭡니까.”

“뼈가 아파요, 선생님.”

“아, 노력.“

“올해도 우리 노력할 거 잖아요. 우리가 잘 하는거니까. 그러면 새해 노력할 내용을 생각해볼까요? 이때 2가지를 고려해봅니다.

첫째, 목표를 결과로만 생각하지 않기. 쉽게 말하면 100점 맞기! 1등하기! 상 받기! 100권 읽기! 이런목표는 아니었으면 합니다. 수학 공부 하루에 40분씩 하기. 하루에 30분씩 책 읽기. 일주일마다 다른 장르의 책 읽기. 하루에 15분 줄넘기 하기. 이랗게 과정 속에 있는 목표를 세워보세요.

둘째,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도 목표에 세워보세요. 여러분이 해야하는 일은 여러분의 역량을 키워주는 일이예요. 공부는 여러분의 논리적 사고력을 확장시켜주고, 숙제는 성실함을 키워주고, 친구에게 다정한 말과 행동, 용서의 태도는 좋은 관계를 가져옵니다. 이 역량은 여러분이 사회 속에서 잘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어 중요해요.

동시에 여러분이 좋아하는 일은 여러분의 얼굴 생김새가 다르듯 모두 달라요. 서연이는 그림그리기를 좋아하고, 정후는 체육을 정말 좋아하잖아요. 하윤이는 춤 추기를 좋아하고, 예은이는 만화그리기 좋아하죠. 규은이는 책 읽기를 좋아하잖아요. 여러분은 이렇게 좋아하는 게 다 달라요. 좋아하는 마음은 여러분을 우주에서 유일한 존재로 만들어줍니다. 각자 다른 기쁨의 색으로 빛나게 해주거든요.

해야할 일과 좋아하는 일을 양손에 꽉 쥐길 바랍니다. 사회 안에서 힘을 키우면서도 여러분만의 색으로 빛나기를 바랍니다.“



한 명 한 명의 눈을 맞추며 바람을 전했다. 공감능력이 좋은 서우의 눈빛이 흔들리며 빛이 난다. 열정적인 진우의 입술이 양옆으로 넓어지며 눈동자가 움직인다. 그림을 좋아하는 서연이의 표정이 빛난다. 어린이들은 각자 좋아하는 마음을 찾고 있다. 어린이들의 움직이는 마음들이 와락 전해진다. 오늘도 우리는 살아있다.



어린이들을 보며 나도 다시 기억한다. 해야 할 일들의 사이에 좋아하는 마음이 둥둥 떠다닐 때, 내 손에 남은 손가락이 하나라고 있다면 그 손가락에 좋아하는 마음을 걸어야만 한다. 애초에 좋아하는 마음을 쥘 손 하나 늘 남겨두는 것도 좋겠다. 사회 안에서 성실히 힘을 키워가는 나와, 고유하고 순수한 나를 모두 지켜가는 것.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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