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라면 누구나 한 번쯤 그 위험한 가능성을 야심 차게 꿈꾼다.
‘내가 가르쳐볼까?’
쉽게 들었던 생각이어서 그런지 준비도 간단하다. 교재를 선정하는 것이 가장 어렵고 고민되는 일인데 이것을 정했다면 절반은 준비한 셈이다. 이제 모든 것은 집에 있다. 연필, 색연필, 집에 있는 어떤 테이블, 그리고 너와 나. 모두 이미 함께였어서 풀셋팅이 쉽다.
상쾌한 마음으로 너와 나, 엄마와 자녀는 자리에 앉는다. 내 머리엔 이미 계산이 섰다. 문제집 제일 앞 페이지에 보니 하루에 몇 장씩 풀면 4주 완성이란다.
‘에헤~문제집이 친절하기도 해라. 하지만 처음이라 입문 책을 샀으니 한 장씩은 더 풀 수 있을 텐데.’
이미 나는 한 달 후에 지금 문제집을 다 풀어내고 뿌듯해할 나와 아이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리고 또 다음 단계를 향한 성실한 노력의 과정과 결과! 나는 여러 학원에 아이를 맡기는 엄마가 아니다.
“아, 저희 아이는 학원 안 다녀요. 집에서 공부하는 편이에요.”
이 대답은 “어느 학원 다녀요?”라는 고요한 질문에 큰 파동을 일으키는 묵직한 한 방이다. 물론 아이의 성과가 좋았을 때 그 힘이 큰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아이의 성과가 조금 모자라더라도 괜찮다. 꾸준히 집 공부를 한다는 것의 잠재력은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집 공부를 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대단한 일이 맞다. 내게 집 공부를 한다는 것에는 부모와 자녀의 삶의 태도에 ‘성실함’, ‘끈기’라는 자산이 발휘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삶의 가치 중 이 두 가지를 가장 큰 자산으로 삼는 내게 집 공부는 동경의 대상이다.
이에 더해서 집 공부에는 효율적인 사교육 활용과 집 공부의 병행을 위한 부모의 의지와 노력이 배어있다. 교육에는 약간의 노력을 들이면 집에서도 할 수 있는 영역과 반드시 사교육을 통해 확보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 우리는 이 두 영역의 균형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 부모는 자신만의 주관과 아이의 성향을 고려하여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성실의 힘을 발휘하여 집 공부로 진행하고, 집 공부로 확보하기 어려운 영역(영어 원어민 선생님 만나기, 실험 실습, 토론 등)은 취하는 등의 선택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를 위해 부모는 아이의 현재 능력과 아이가 배우고자 하는 것을 알기 위해 아이와 여러 번 대화하며 아이를 파악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부모는 아이의 성향과 요구의 반영과 동시에 기본 학습 내용과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틀을 구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집에서 할 수 있는 것과 사교육의 도움을 받을 것을 구분 짓는 선택을 한다.
이후에는 각각의 공부를 잘 구현하기 위해 가장 적합한 방법을 서칭 하여 탐색하고 많은 방법들 중 무엇이 가장 적합한 것인가에 관한 고민과 선택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 이 과정은 꽤나 시간과 노력이 들지만, 이 과정을 거쳐야 파악한 자녀에게 가장 적합한 종류의 문제집은 무엇이고, 이 문제집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어떤 능력인지 확신이 든다. 또 사교육 시장의 방향에 대한 정보를 정리할 수도 있다. 더욱이 이러한 자료는 선택에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이후 그 방법을 쭉 밀고 나가는 데에 자산이 되어 심리적 레퍼런스가 되어준다.
이렇듯 집 공부를 위한 부모와 자녀의 노력은 성실함, 끈기, 정보 탐색과 선택, 이후의 집 공부의 지속성이라는 경험의 힘을 부여한다. 이는 해보아야만 획득할 수 있는 경험의 산물이 된다.
하지만 이 과정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사실 학원 보내는 일이 시간의 효율성을 확보하고 마음의 소비를 줄이는 쉬운 길이다. 학원을 보내면 성과는 온전히 아이의 몫이지만, 집 공부는 그 과정과 결과에 대한 책임이 부모에게도 같은 무게로 온다. 집 공부에 있어서 아이와 부모는 서로 의지하는 원팀이다.
따라서 이런 무게감 있는 집 공부를 꾸준히 해왔다는 것은 사교육비를 아끼는 경제적 이득보다 더 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내게 집 공부는 너무나 대단한 일이다. 그래서 이런 과정을 겪은 부모와 자녀를 나는 존경한다.
그렇게 나도 도전해본다. 집 공부. 1학년에게 가장 만만한 집 공부는 수학 문제집 풀기이다. 연산 문제집 1권, 교과 문제집 1권을 준비했다. 먼저, 워밍업으로 간단한 연산 문제집을 펼쳐보았다. 받아 올림이 없는 덧셈이라니! 이건 복습 단계에 해당하니 딱! 딱! 딱! 딱! 풀면 5분이면 수월하겠지 싶다. 게다가 아이에게 온갖 호들갑으로 우와! 우와! 하고 감탄사를 날려줄 준비도 다 되어있다. 준비는 끝났다.
집 공부를 떠올리면 아름다운 집안 풍경이 떠오른다. 아이는 자리에 스스로 앉아 오늘 해야 할 학습량을 해내고, 부모는 어느 신문이나 잡지에 나오듯 힘들어하는 아이 옆에서 함께 책을 읽으며 앉아 힘을 준다거나 간식을 준비하며
“00아! 간식 먹고 해!” 한다.
그러면 아이는 공부하다가
“네~!” 하고 나와서 간식 시간에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시 공부를 하러 들어간다. 드라마에 나올 것만 같은 그 장면은 “Happy ever after”만큼이나 판타지이다.
하지만, 실제 집 공부를 위한 과정은 지난한 감정 소비의 연속이었다. 원활한 집 공부를 위해서는 공부 전 루틴으로 반드시 가슴에 손을 얹고, 나는 얼마나 공부를 하고 싶어서 자발적으로 했는가를 떠올려야 한다. 하지만, 나는 깜박쟁이이기에 이미 끌려가듯 공부했던 나를 잊었다.
나는 집에 돌아갈 때 미리 집에 가면 무엇 무엇을 해야 한다고 미리 안내해주었다. 그리고 집에 도착하면 손 씻고 잠시 휴식을 가진 후 다정한 목소리로
“우리 이제 공부해볼까?”하고 격려해보기도 하고
“공부할 시간이야!”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정해진 일이라는 암묵적 신호를 보내기도 했다.
서로 합심해서 책상에 앉았다면, 이젠 과제 해결이라는 큰 산이 남겨있다. 나에겐 쉽지만, 아이에겐 처음이라 어렵다. 모든 사람에게 익숙지 않은 내용을 자신의 인지구조에 새롭게 입력시키고 기억하여 재구조화시키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더욱이 적절한 시기에 인출하는 것도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아이도 그렇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이 어려운 일을 해낼 때 서툴고 때론 잘 해내지 못했던 경험을 잊는다. 나는 언제나 어떤 문제상황 앞에서 서툴었던 적이 없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아이가 못하는 것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
부모는 ‘ㄱ’은 기역이고, ‘ㅏ’를 만나면 ‘가’가 된다는 것이 이게 너무 쉽다는 생각이다. 또 1+1은 2라고, 바둑돌로도 친절히 웃으며 설명해주었다. 그런데 왜 아이는 왜 1+1이 11이라고 하는 것인가! 아니! 나는 이미 설명을 아주 친절히 그리고 자세히 ‘이미’ 해주었지 않나! 이 쉬운걸 이렇게 설명해주었는데 아이가 이해하지 못한다?
‘여러 번 모른다구?’ 게다가
‘내 아이가?’
‘이렇게나 당연하고 쉬운 건데?’
‘애가 머리가 나쁜가?’
진심으로 온 마음을 다해 울컥 화가 난다.
예전에 아는 언니는 국어교사인 지인이 아이의 한글 교육을 시키는데 자음 ‘ㅁ’을 제대로 익히지 못하는 자녀에게 화가 나서
“미음! 미음! 미음이라고! 멍청이의 미음!”
했다며 이렇게 자녀 공부시키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당시에 나는 아이가 어려서 웃고 넘겼지만, 이제는 차마 자녀에게 멍청이라고는 못하고 답답함에 끓어오르는 화가 너무나 이해가 간다.
화가 나는 지점은 학습적인 부분뿐만이 아니다. 태도의 문제로 오면 더 상황은 심각해진다.
“하.. 문제가 너무 많은 거 아니에요.”
‘응? 이게? 지금? 어렵지도 않은데? 왜? 할 수 있는 문제인데?’
“왜~이 정도는 금방 하잖아. 그치? 우리 주윤이가 누군데~우와! 완전 쉽네! 해볼까?”
아이는 겨우 연필을 들어 문제를 보고 또 보고 계속 보기만 한다.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기다려야지. 그럼. 뭐라고 하지 말아야지.’
이윽고 아이는 정답을 써야 하는 칸을 넘어 완전 큰 숫자를 쓴다. 아... 화가 난다.
“이렇게 쓰면, 알아볼 수 없어. 말은 다른 사람이 들리게, 글씨도 알아볼 수 있게 써야지. 다시 써볼까?"
아이는 이제 정답 칸에 겨우 보일 듯 말 듯 작은 글씨로 정답을 쓴다.
‘아...’
‘이렇게 자기 맡은 일도 제대로 안 해내는 애였어?’
‘성실과 끈기가 나중에 어떤 일을 하더라도 중요한데!’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이제 나는 노스트라다무스가 되어 아이가 미래에 자신의 일을 허투루 해낼 광경을 수도 없이 예견한다. 그렇게 아이가 보이는 현재의 작은 어려움에 현미경을 대고 크게 확대해서 요리보고 저리 보며 그것이 아이의 모든 성향을 뒤덮을 거대한 특질이 될 것이라 예언한다. 마치, 나는 어떤 허점도 없는 완전무결한 사람인 것처럼 말이다.
이쯤 되면 나의 격려, 친절, 웃음기는 말라가고 이미 휘발되어 자취도 없다. 내 마음은 답답함과 걱정과 불안과 화로 점점 달궈져 용암이 용솟음을 친다. 열기를 내뿜으며 휘몰아치는 마그마는 언제 어느 시점에 폭발해도 어색치 않다. 이쯤 되면 입으로 불이 나오는 것은 막을 수 없는 자연의 섭리가 된다. 드디어 누르고 눌러왔던 포효가 나온다.
"하지 마! 하지 마! 절대 하지 마!"
"제대로 안 하는 사람은 자격이 없어! 하지 마!"
이렇게 나도, 그 전설처럼 구전되는 전통적 코스를 통해 친자확인의 과정을 거치고야 말았다.
이런 복장이 터지는 친자확인의 과정은 어쩌면 부모가 아이를 자신과 아직 분리하지 못하면서도 동시에 자녀를 타자화하는 이분법적 과정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녀와 나를 분리해야 할 때는 분리하지 못하고, 분리하지 말아야 할 순간에는 철저히 분리하는 모순을 보인다.
먼저, 우리는 자녀와 나를 분리해야 하는 순간에는 분리하지 못한다. 나는 자녀가 아니고, 자녀는 내가 아니다. 나의 경험치와 자녀의 경험치는 다르다. 그런데 나는 자녀와 내가 같은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한다.
나에게 쉽다고 해서, 당연하다고 해서 아이가 그것을 당연히 알 수는 없다. 나는 너무나 많은 경험으로 1+1=2가 당연하지만, 아이에게는 1도, +도 새것이다. 더욱이 1+1=2가 된다는 것은 우리의 사회적 약속이자 기호가 아니던가. 수학 시간에 우리도 그렇게 많이 들었다. 수학은 기호이고 약속이라고. 그렇다면 우리 아이들이 그 약속을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도 이것을 왜 모르냐고 다그치는 것은 약속 장소를 모르는 사람에게 왜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았느냐고 화를 내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런 억지가 어디 있는가 싶지만, 우리는 자녀에게 이런 억지를 자주 쓴다.
타인과 나는 분리된 독립적 존재이다. 내가 아는 것을 너는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이것을 알아야 원만한 대인관계가 형성된다. 부모와 자녀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는 작은 부모, 작은 내가 아니다. 내가 아는 것을 아이는 모른다. 집 공부를 위해서 부모는 이 생각이 먼저 들어야 한다.
둘째, 부모는 자녀와 나를 분리하지 말아야 하는 순간에는 철저히 분리를 한다. 그리고 그 분리 이후 나와 자녀를 차별적으로 대한다. 우리는 자주 스스로에게 관대하다. 하지만 타인에게는 보다 엄격한 잣대를 대어 평가한다. 실제 대게 사람들은 자신이 잘못했을 때는 상황을 탓하면서도 타인의 잘못에는 그 사람의 성향을 탓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한다. 예를 들어, 자신이 늦으면 차가 막혀서라거나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고 여긴다. 하지만 타인이 늦으면 ‘아~저 사람은 원래 좀 게으른가? 불성실한가?’하고 생각한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내가 숙제를 앞두고 끝까지 미뤄두었던 상황이나 도전적인 과제 앞에서 정리가 잘 안 되어 고군분투하고 실수했던 경험에 대해서는 ‘그럴 수도 있지. 오늘 일은 내일로 미루자!’ ‘지금 파도는 내 것이 아니니 흘려보내고, 다음 파도를 기다리는 거지!’ 하며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그 순간 나는 삶의 부침의 흐름을 타는 관대한 서퍼이다.
하지만 아이의 그런 행동 앞에서 부모는 아이를 타자로 분리하고는 평가의 대상으로 본다. 부모는 아이를 엄격하게 평가하고 그 부정적인 결과가 불러오는 불안과 걱정은 더욱 아이를 몰아세우는 윤활유로 돌아온다. 나는 더 이상 관대한 서퍼가 아닌, 엄격한 칸트가 된다.
‘해야 할 일을 미루는 것은 태만이 되고, 이는 잘라야 할 싹이다.’
‘하루에 해야 할 양을 반드시 해내야 하는 것이 성실함이다.’
그리곤 성실함으로 자아실현을 했던 모든 셀럽과 위인들의 사례를 모두 가져와서 아이의 태만을 좌시하지 않는다.
이런 차별, 너무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이해하는데 쓰이는 관대함을 자녀를 이해하는 데에도 써야 한다. 내가 직장에 가기 싫은 것이 당연한 것처럼, 아이가 학교에 가기 싫은 것도 당연하다. 내가 일을 미루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아이가 그런 마음을 표현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런데 나는 그런 아이 앞에서 내가 뒷담화 했던 사장님처럼 행동하고 있다.
아이에게 일은 공부이다. 아이는 공부를 하겠다고 선택한 적이 없다. 사실 교육과정도 학문의 내용도 정해진 것이다. 아이는 외부로부터 주어진 거대한 일의 벽에 들어서야 한다. 그 벽 너머는 새롭고 어려운 것들로 가득하다. 아이는 당연히 두렵고 서툴러서 주춤하고 실수할 것이다.
이때 부모가 해줄 일은 처음 문을 열 때 그 문을 열기 위해 힘을 보태어 주는 일이다. 함께 자리에 앉아 주고 문을 열기 위해 필요한 힘과 능력을 쌓는 방법을 제안해주는 일이다. 그리고 그 문을 열고 들어간 아이의 고군분투를 지켜보며 함께 버텨주는 일이 부모의 몫이다. 고군분투하는 아이에게 채찍질을 가하기보다, 부모는 옆에서 지켜보고 힘이 들어있는 아이의 마음을 관대한 손으로 쓸어주는 일을 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가끔은 먼저 살아본 어른으로서 나의 경험을 나누어 주는 존재가 되어주는 것도 좋다.
“그럴 수 있어.”
“엄마도 회사 가기 싫어. 그 마음 알아. 근데 있지, 엄마도 진짜 가기 싫은데 일단 가잖아? 그럼 또 괜찮더라! 이상하지? 하기 전엔 귀찮은데 또 막상 하면 아무렇지도 않더라구. 아마 너도 그럴 거야.”
“엄마도 혼나. 많이 혼났어. 사실 얼마 전에도 지도교수님에게도 혼났어. 완전 혼나서 엄마 자존심이 발톱 끝에 겨우 달랑달랑 매달려 있었거든. 그러니까 엄마도 그럼 그만할까? 혼났으니까? 어떻게 생각해?”
“혼났지만, 혼날만했는지 생각해보니까 또 교수님 말씀처럼 엄마가 못 한 게 맞더라고. 그래서 그냥 뭐 계속 다시 했지.”
아이와 집 공부와의 씨름 속에서 내가 아이에게 했던 말들이다. 많은 노력과, 포효, 화의 다스림에도 불구하고 집 공부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을 보면 집 공부는 나의 이상형인 것이 확실하다. 나는 나의 이상형과의 데이트를 성공하기 위해 오늘도 몸으로 노력하고, 생각으로 노력한다.
내가 아는 것을 아이는 모른다는 생각의 분리, 그리고 나의 관대함을 아이에게도 공평하게 적용하자는 다짐을 오늘도 한다. 아마 자주 이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하고 머리를 감듯이, 중요한 일들은 늘 자주 해야 하는 게 맞으니까. 그 사소한 일들이 우리의 삶을 기본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맞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