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에도 업데이트가 필요하다

by 주윤

노희경 작가의 우리들의 블루스에서는 사람을 보여준다. 이기적이고 나쁜년이었고 타인을 오해하고 내 생각대로 해석하는 민낯의 나를 보여준다. 처음엔 중년의 타인들 이야기를 염탐하듯 드라마를 보았는데 어느새 그 인물의 눈빛과 행동에서 내가 보인다. 미란이였고 또 때로는 은희였고, 영옥이었던 내가.


부잣집 딸에 살갑고 강단 있는 미란이가 나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것은 가난한 삶을 씩씩하게 살아내야 했던 소녀 시절의 은희에게 자랑이고 든든한 기댈 구석이었다. 미란이 덕분에 학교를 졸업했고, 친구들 사이에서 기를 펴고 다녔다. 학교의 금수저이자 히로인인 미란이는 은희에게 은인이고, 자랑이고, 의리였다. 미란이가 나를 만만하게 생각해도 아무렇지 않았다. 괜찮았다.



십 대 소녀시절을 지나 중년에 이른 지금, 은희는 가난해서 미란이가 싸주는 도시락이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이 아니다. 은희는 이제 자수성가해서 누구나 인정하는 자산가인 데다 태생적인 성실함으로 주위의 신망을 받으며 살고 있다. 몸에 밴 생선 비린내도 은희에겐 자부심이다. 하지만 미란이는 늘 그때처럼 자신을 만만하게 대한다. 심지어 스스로 나를 만만한 사람이라고 함부로 말한다. 이젠 더 이상 은희는 괜찮지가 않다.


은희는 예쁘고 살가운 미란이가 고향에 내려오면 마을이 모두 들썩이는 것도, 자신이 무수리처럼 미란이를 챙겨주는 것도 싫다. 하지만 은희는 스스로에게 의리 있는 멋진 사람이고 싶다. 나는 도움을 받은 사람에게는 끝까지 의리를 보임으로서 이기적이고 이중인격인 미란이와 다른, 더 나은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서 미란에 대한 자격지심, 인간적인 실망, 의심을 숨긴 채 미란을 대한다. 어쩌면 은희는 그 과정들에서 미란에 대한 마음의 문을 서서히 닫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은희의 속마음을 알게 된 미란은 은희에게 묻는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은 부분이 있었는지, 사과할 부분은 있었는지 묻는다. 하지만 은희는 없다고 말한다.



마음이 떠난 사람은 하고 싶은 말이 없다. 그 사람이 왜 그랬는지 궁금하지도 않다. 나는 이미 과거의 시간들 속에서 결론을 냈으니 그저 닫히고 있던 문을 단단히 닫아 이 관계를 정리하고 싶은 생각뿐이다. 아니면 시간의 힘을 빌어 서서히 안온하게 멀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대화를 바라는 건 아직 마음이 있는 사람 쪽이다. 아직 상대의 마음을 알아채지 못해 놀란 가슴이 있는 사람 쪽이다.



나도 언제는 은희였고, 언제는 미란이었다. 나는 언젠가 여러 모습들에서 나와 다르다고 느꼈던 친구의 결혼식에 이게 마지막 선의라는 생각으로 축의를 두둑이 했던 적이 있었다. 이후 연락을 회피하는 내게 친구는 왜 그런지 궁금해했지만, 나는

“너랑 안 맞는 것 같아서 그만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왜엔 하고 싶은 말이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멀어졌다.


또 언젠가

“너는 네 생각만 하는구나.” 하는 말을 남기고는 나와의 만남을 완곡히 거절했던 친구도 있었다. 그때 나는 그 친구가 내게 왜 이러는지 궁금했다. 한두 번 연락을 더 해보았을 때 나는 서서히 알아챘다. 내가 예전에 다른 친구에게 그랬듯이 그 친구는 나에게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내 경험으로 이미 그 마음이 이해되어버리자 더 이상 친구의 거절에 담긴 이유를 물어볼 용기가 말라버렸다. 그렇게 나는 그 물음을 접었다. 그리고 그 친구가 보여준 무언의 거절을 받아들였다.



그 이후 현실의 나는 그들과 거리를 두며 지내고 있지만,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어떤 이별에도 서울 한복판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는 운명을 경험하듯이 드라마에서는 그 두 마음이 다시 만났다. 서로 뜨거운 눈물과 살을 어루만지며 그 시간을 위로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마음을 솔직한 언어로 표현했다.


짐작컨대 다시 만난 미란이는 은희를 더 이상 만만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다. 과거 만만하기만 했던 은희였지만 지금은 든든해진 은희와의 새로운 관계를 축적해나갈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그렇지 않다. 나와 내 친구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각자 변해온 서로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만만했던 친구는 늘 만만해야 하는데, 이젠 자기를 만만하게 보는 게 싫어졌을 수 있다. 혹은 늘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그렇지 않은 우리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 불편하다.


또는 유년시절에는 다 괜찮았지만, 이제는 괜찮지가 않은 친구의 행동을 받아들이기엔 스스로가 불편하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그 친구에게는 쉽게 어겨지는 것이 보이게 되었고, 그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나는 그 친구가 처한 상황은 보지 않았다. 그저 나와 다른 행동에 주목했고,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는 친구의 방식이 나의 가치관과 맞지 않다고 확신했다. 그 이후 나는 이해되지 않는 대화와 관계를 나누는 것은 나에게만 스트레스인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이제는 더이상 애쓰기 싫어졌다.


이전 버전의 휴대폰의 버전을 확인하지 않고 새로운 앱을 깔면 구동이 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친구가 처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거나, 내가 가진 과거의 생각으로 친구를 대한 댓가는 삐걱거림이었다. 나는 친구의 변화가 불편했고, 친구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변화시켜야함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나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을지 모른다. 대신 나는 지금 내 삶의 안녕을 위해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것을 택했다. 그렇게 나와 그 친구들의 관계는 성장을 멈추었다. 마치 미처 업데이트를 못한 앱처럼 버벅거리다가 바로 종료되듯이.



어쩌면 관계의 성장은 과거의 애정을 기반으로 지금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데서 오는 것 같다. 오래된 친구와 함께 공유한 과거의 시간들. 함께 신났고, 찌질했고, 서툴렀고, 이기적이었던 시간이 내 삶에 진심으로 의미 있었고 앞으로의 삶에서도 함께하고 싶다면 친구들의 현재를 바라보아야 한다. 더불어 내가 친구들을 이해하는 시선도 현재라는 시점에 초점을 맞추며 그들의 삶을 존중해야 한다. 그리고 친구가 보인 행동의 이유를 궁금해해야 한다. 그래야 우정을 위해 비로소 나를 수정해나갈 수 있다.


업데이트가 필요한 건 휴대폰 앱 만이 아니다. 지속 가능한 우정에도 늘 새로운 시선과 현재를 존중하는 태도, 그리고 관심이라는 업데이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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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윤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직업 연구자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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