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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윤 Jul 15. 2022

항노화 백신, 배움을 맞는 태도

  얼마 수영 강습에서의 일이었다. 나는 3개월째 다니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매달 선생님이 바뀌어 3번째 선생님께서 수업을 해주셨다. 여름의 초입에 들어서자 수강생이 많아져서 우리 반은 2개의 레인에 각 열 두세명 정도씩 나누어 수업을 받게 되었다. 아마도 접영을 배우는 반이니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서 정원을 30명쯤으로 받았던 것 같다. 나는 주로 사람이 한 명이라도 적은 레인으로 들어가 수업을 듣곤 했다. 선생님께서는 수업시간에 수차례 2개의 레인을 오가며 한 명씩 자세 교정을 해주셨다.      


     

  그렇게 한 달의 2/3가 지날 즈음 어느 날.

  “자, 이쪽 레인으로 넘어가세요.”

선생님께서는 몇몇 수강생을 이동시키셨다. 나는 원래 운동하던 레인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 그런데, 어라? 수영강습 때는 반에서 가장 잘하는 사람이 선두에서 멋지게 쓰윽 시작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룰인데, 그분은 저 레인에 있다! 게다가 평소 수업에서 눈동냥으로 보았을 때

  ‘우와! 잘한다! 나도 저렇게 하고 싶다. 어떻게 저렇게 하지?’

하며 그분의 움직임을 따라 허공에 팔도 저어 보게 했던 사람들은 다 저 레인에 있다! 이 말은? 나는 좋게 말하면 선생님의 도움이 필요한 수강생이자, 직설적으로 말하면 못하는 그룹이라는 것이다.      


         

  물론, 나도 안다. 그리고 내 여덟 살 수영 동지인 아들에게도 여러 차례 말해왔다. 난 수영을 잘 못한다.



  늘 배영까지만 배워왔던 내게 수영의 꽃은 배영이다. 나의 수영 이상형 배영은 목에 힘을 빼야한단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살면서 목에 힘을 빼본 적이 없다. 아무래도 내 어깨와 목은 그냥 뼈 하나가 분명하다. 관절이란 없이 하나의 뼈니까 굽어지지도 휘어지지도 않는게 분명하다. 이제 어느 정도 불치병으로 받아들인 지 오래이다. 커피를 먹어본 적이 없이는 커피 맛을 절대 모르듯, 목에 힘이 빠진 적이 없는 나는 그게 어떤 상태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목에 힘을 빼라니요?!



  나는 배영을 할 때마다 가슴이 두근두근 거리고, 심장은 두 배쯤 펌핑을 하는 듯 숨이 가빠온다. 그 격한 긴장이 담긴 발차기는 너무나 진심이다. 내 발차기는 파닥파닥 잘게 쪼개지며 그렇게 잔망스럽다. 진심의 발차기를 하며 누워있는 내 눈은 물안경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천장을 보며 기대한다.

  ‘얼마나 움직이고 있을까?’



  아...! 내 천장 위는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그 자리에 떠 있다. 배영을 할 때 다른 사람들이 망망대해에서 헤엄치며 움직이는 고래라면, 나는 바다 위 외딴섬이다. 늘 그 자리에 있다. 잔망스럽게 차는 발은 바닥에 더 가깝고, 코와 입으로는 계속 물이 들어와 컥컥거리고 있다. 결국 나는 꾀를 내어 몰래 수영장 레인을 손으로 밀어서 내 몸을 도착점으로 조금씩 보낸다. 그리고 도착점에서 일어서면 이미 발은 바닥에 참 가까이 있다. 짠하다. 내 사지육신. 애쓴다, 애써. 나는 꿈이 있다. 배영으로 레인 끝까지 간 줄 모르는 열정의 뒤통수가 도착점 벽에 부딪히는 일.      



  내가 서있는 레인의 구성원을 확인한 후 나도 아는데, 그래도 살짝 응? 하고 불편했다.

  ‘나 못하는 반이네.’

  나와 같은 레인의 수강생들도 다소 웅성웅성거렸다. 일단은 선생님께서 시작 사인을 보내셔서 강습은 진행되었다. 선생님께서는 거의 수업의 대부분을 우리 레인에 계시며 한 명 한 명을 다 개별적으로 지도해주셨다.



  “허리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셨어요. 힘 빼세요. 웨이브를 할 때 머리부터 가슴 앞쪽까지만 쓰셔야지 엉덩이를 접으려고 하면 허리 아프십니다.”

  “아~그래서 허리가 아팠나 봐요. 그러면 선생님, 웨이브를 할 때 다리는 팔랑거리면 안되죠?”

  “그렇죠! 다리는 잡고 계셔야죠.”     


  “배영을 할 때는 무릎 아래를 차서 물을 밀어야 해요. 발 뒤꿈치가 엉덩이까지 차고 올라온다고 생각하면서 차야 해요. 허벅지부터 전체를 차려고 하면 오래 못해요.”

  “네? 무릎 아래요?”

  “네!(이걸 이제야 물어봐?) 그리고 무게중심이 머리겠죠? 머리를 보낸다고 생각해야 해요. 그러면 앞으로 갈 수밖에 없어요. 또 입을 꽉 다무시는 게 아니라, 입으로 호흡하시고 턱은 살짝 당기세요. 팔은 물 안에서도 끝까지 쭉 펴서 물을 밀어야 합니다. 자 출발!”



  선생님의 설명대로 배영을 할 때 무릎 아래로 발을 열심히 찼다. 그리고 턱을 살짝 당겼다. 그랬더니, 이게 뭐야! 왜 이러지?

   ‘어! 어! 어! 천장이 움직인다아아아아!!!’

맙소사. 이게 뭐람. 왜 갑자기 천장이 움직이지? 내 손은 레인 줄을 밀지도 않았는데! 이게 갑자기 이러는 법이 어딨어!          



  이전까지 배영을 할 때는 내 팔, 다리, 심장, 코, 입, 손가락 끝까지 요 애들이 그렇게 애를 썼었다. 아니 용을 썼었다. 그런데 각자 개별적으로 너무 열심히는 하는데 늘 덜그럭 거리는 기분이었다. 배영을 할 때마다 내 몸은 마치 지휘자 없이 각자 맡은 파트만 열심히 연습해온 오케스트라의 협주 같은 느낌이었다. 오케스트라의 다른 악기 소리에 내 악기를 맞추어본다거나, 메인 테마를 전달하기 위해 악곡의 시퀀스를 해석하는 과정 없이 개별적으로 너무 열심히 내 악기만 연주하는 느낌. 각자 열심히 하지만 결국은 불협화음으로 끝나는 안타까운 결과를 보는 듯했다.        


   

 그런데! 이젠 아니다! 이젠 그때의 내가 아니다! 내 배영에 지휘자가 오셨다! 내 눈에 보이는 천장이 움직인다. 무릎 아래를 최대한 엉덩이까지 찬다는 생각으로 발차기 5번을 한 후, 팔을 쭉 펴서 팔을 돌리기만 했는데 내 몸이 스윽 움직인다.



  어? 머리에 손이 닿았다. 먼저 출발하셨던 회원분께서 도착을 알려주시며 내 머리에 손을 대셨다. 뭐야. 나 거의 혼자 온 거야? 몸을 바로 세우고 섰는데, 몸의 움직임이 그전과는 다르다. 그전에는 가빠오는 숨과, 이미 먹은 물에 코와 입이 매웠고, 부둥부둥 애쓴 팔다리가 삐걱거렸는데, 뭔가 몸이 가뿐하다.

이게 밸런스... 뭐 그런 건가...!           



  내 배영의 찬란함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배영 잘하시네요. 저는 배영이 느려요. 이번에는 제 앞에서 출발하셔야 될 것 같아요.”

  “네? 제가요? 저 처음으로 지금 됐어요. 태어나서 처음으로요. 늘 배영이 안되었는데, 이번에 선생님께서 설명해 주신대로 했거든요.”



  흐엉. 이러지 말아요. 수영 몇 개월 다니면 보기만 해도 안다. 난 잘하시는 분들은 수경 쓴 모습만 봐도 잘하시는 분들을 알아볼 수 있다. 이 사람은 잘한다! 잘하는 사람은 수영장에서의 그 에티튜드가 다르다. 훌륭한 보컬들이 탄탄한 발성을 기반으로 소리에 무게감이 느껴지듯이 그분들은 소리 없이 강하게, 말이 없이, 스윽! 몸으로 보여주신다. 그 움직임에는 묵직함에 의한 부드러움이 있다. 나의 호들갑과 잔망스러움의 소란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 회원분은 출발할 때도 잠영으로 스윽 멋지게 출발할 줄 아시는, 내가 두 달간 보아온 잘하시는 분이다.

  '저에게 이러시면 안 돼요. 제 어깨가 저 천장에 닿을 듯하고, 제 심장이 튀어나와서 날아다니려고 하잖아요.'



  두 번째 배영 턴에서 나는 그분 앞에서 출발했고, 이번에도 역시나 내 눈 위 천장은 부드럽게 움직였다. 이거였구나. 대학생 때부터 찔끔씩 배웠던 그 배영은 이렇게 하는 거였구나.

  ‘오! 지저스! 선생님! 전 이제 선생님을 따르겠어요.’          



  그런데, 다른 회원분들의 표정과 서로 나누는 이야기의 기운이 심상치 않다. 수업 막바지에 이르자 몇몇 회원 분들이 선생님께 불만을 표했다.

  “선생님, 이렇게 못하는 반으로 나누시니까 기분이 안 좋아요.”

  “이렇게 잘하는 반, 못하는 반 나누신 거잖아요. 저희가 수영 선수할 것도 아니고 즐겁게 배우러 온 건데 이렇게 하시니까 좀 불쾌해요.”

  “잘하시는 분들이 먼저 하시면 그거 눈으로 보고 배우는 것도 있는데, 이렇게 아예 라인을 나눠버리시니까 보고 할 수도 없어요.”     


  “아, 저는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요. 두 라인에 각자 자유롭게 시작하시다 보니 더 봐드려야 할 회원분들이 있으신데 이 라인 봐주고 있으면 다른 라인에서 그분이 출발해 버리시더라고요. 그러면 그분들 지도하기가 어렵고, 왔다 갔다 하다 보니 몇몇 회원분들 자세 교정이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일단 오늘은 이렇게 해봤어요. 불쾌하셨다면 죄송하고요. 다음 시간부터는 다시 하시던 대로 자유롭게 레인 선택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웨이브 갔다가 올 때는 자유형 왼팔은 고정하고 오른팔만 젖고 오는 걸로 한 바퀴 더 돌겠습니다.”          



  나는 다시 우리 반 실력자 분께 앞자리를 양보하고 마지막 한 바퀴를 돌았다. 물론 나도 처음에 못하는 레인에 서니 뭐지? 하며 살짝 언짢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 거 있지 않나. 나도 못하는 거 아는데, 나 혼자 아는 거랑 다 전문가의 평가로 확실시됨과 동시에 다른 사람도 다 알아버리는 건 다르니까. 표현 했고, 하지 않았고의 차이일 뿐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선생님의 오늘 수업은 그 의도가 확실히 보였다. 거의 모든 시간을 우리 레인에서 개별적인 지도를 위해 할애하셨다. 매 바퀴를 돌 때마다 한 명씩 세워서 자세를 진단하고 교정해주셨다. 그러느라 잘하는 사람들이 있던 레인은 선생님의 출발 신호만 있을 뿐 거의 지도를 받지 못했다. 기분은 나빴을지언정, 오늘 수업 내용에서 배움에 아쉬워야 할 사람은 우리 레인이 아니라 잘하는 레인 쪽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내게 배운다는 것은 나의 부족함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내가 스스로 내 무지를 객관화하지 못하고

 '이 정도면 괜찮겠지.'

하고 안일하게 생각했을  굴욕은  등뒤에 칼을 꽂았다. 정말 굴욕적인 과정이다. 내게 굴욕은 적당히 준비한  결과물의 형편없음이나 실수에 자괴감이기도 했고, 교수님의 지도에서  부족함이 드러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때  자존감은  발톱 끝에 겨우 달랑달랑 매달려 었다. 하지만  무지를 받아들였을  나는 배울  있었다.



  반대로 나의 무지에 관대했을  나는 배우지 못했다. 그런때 나는  자존감은 지켰을망정  산출물은 그저 그랬다.



  그때부터 내가 생각하는 배움의 태도는 이것이다. 혼날만할 때는 무조건적으로 혼나는 것. 그 순간은 나를 변호하는데 생각을 쓰지 않을 것. 나의 무지에 대한 안일한 태도마저도 깨달을 것.           



  “주윤아, 오늘 수영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 선생님이 잘하는 사람이랑 좀 못해서 더 배워야 하는 사람별로 레인을 나눠서 수업하셨어. 엄마는 어디였게?”

  “당연히 못해서 더 배워야 하는 사람이지요.”

  “엥? 어떻게 알았어?”

  “엄마가 맨날 말하잖아요.”

  “히히. 그렇지? 그래서 선생님께서 오늘은 거의 수업 내내 엄마 쪽 레인에 오셔서 자세히 알려주셨다. 근데 몇몇 사람들이 선생님에게 불만을 말했어. 잘하는 사람들이 그랬을까 못해서 더 배워야 하는 사람들이 그랬을까?”

  “당연히, 잘하는 사람들이지요.”

  “왜?”

  “선생님이 잘하는 사람들은 안 가르쳐줬잖아요.”

  “아니다!”

  “네?”

  “엄마 쪽 레인 사람들이 불만이 있었어. 일단 못한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나빴거든. 사실 엄마도 처음에는 기분이 안 좋더라고. 근데 나중엔 괜찮았어. 진짜 오늘 많이 배웠거든.”

  “엄마, 저도 수영반에서 이제 시작했으니까 좀 못하는 편이거든요. 근데 전 괜찮아요. 배우면 되지요.”     



  우린 언제부터 배운다는 것에 인색해질까. 우리가 흔히 기분 나빠하는 관용적인 표현 중에 하나는

  “아니, 나를 가르치려고 하더라니까.”

이다. 우리는 어른이라고 해서 누가 가르치려고 한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먼저 나쁘다. 여덟 살은 배우는 거니까 괜찮다고 하는데 말이다.  



  어른은 누가 가르치면 안되는걸까? 나를 가르치려고 드는 사람에 불쾌한 감정이 든다면, 과연 누가 나를 가르쳐야 괜찮은걸까? 수영은 국가대표가 가르쳐야 괜찮고, 육아는 오은영 선생님만이 괜찮은걸까? 그런 배움은 너무 요원하다. 내 옆에 내 짝과 동료에게도 배울 수 있어야 내가 자주 나아질텐데.



  물론 순간 기분은 나쁠 수 있다. 배움이란 내 무지를 스스로도 확인하게 되지만 타인으로부터 확인하게 되는 경우도 잦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움은 굴욕적인 과정이 맞다. 하지만 요즘 많이 들어본 표현에 의하면 기분이 태도가 되면 안 된다. 무지의 확인으로 인한 기분 나쁨이 내 배움의 태도에도 관여하게 둘 때, 우린 배울 수 없다.           



  배움에 대한 여덟 살의 말에서 배운다. 배운다는 것은 곧 겸손한 태도를 가진다는 것을. 그리고 나의 무지를 깨닫고 누군가의 조언을 자의적 해석 없이 그대로 수용하는 귀와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그때 나는 또 새로운 배움을 가진 사람이 된다는 것을.         


 

  사실,  굳은 믿음 하나는 배움은 새로움으로 나를 성장시키는 일이다. 그래서 배움은 가장 효과적인 항노화 백신이다. 주삿바늘이 들어갈 때는 따끔한데,  따끔함을 견뎌야 나의 건강한 삶이 보호된다. 따끔함은 짧고, 나의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건강은 길다.


  항노화를 위해 자주 기분이 나쁠 예정이지만,  따끔함이 나를 자주 찾아와주길 바란다. 그리고 그때 잠시의 언짢음은  배움의 시그널임을 알아채길 바란다. 따끔함에 손을 번쩍 들고 안녕!  만나서 반가워! 하며 신나게 손을 흔들며 환대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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