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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윤 Apr 16. 2023

프로이트_미워했던 나를 보듬어 줄때

  인생을 통틀어 가장 관심 있는 대상이 무엇이신가요? 질문을 좀 더 세분화해 보면, 삶을 살아갈 때 자주 궁금하고 알고 싶은 일관된 대상이 있다면 무엇이셨나요? 혹은 자주 만나서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잘 몰랐구나 하고 여기기도 했던 것이 있으셨나요?



  저는 그 대상이 저, '제 자신(self)'이었어요. 나는 누굴까. 나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무엇일까. 내 강점은 과연 무엇일까. 늘 이게 궁금했어요. 여고시절에는 친한 친구에게 포스트잇을 주며 '나는 어떤 사람인 거 같아?'하고 적어달라는 부탁을 했던 적도 있었어요. 저는 그만큼 제가 궁금했어요. 그 당시 제 마음을 도끼로 내려친 한 문장이 있었거든요.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물론 궁금한 대상이 타인인 적도 있었죠. '재는 왜 저렇게 행동하는 거야?', '재는 왜 저렇게 말을 해? 저렇게밖에 말을 못 해?'하고 타인의 말과 행동이 왜 그런지 궁금해하곤 했죠. 사실은 탓을 하고 싶었던 적이 많았나 봅니다. 그 대상은 대게 내가 싫어하는 누군가였던 적이 많았던 것 같아요. 물론 가족이나 친한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도 궁금해했던 것 같아요. 그때는 다소 격양된"왜 그러는 거야?"가 아닌 "이래서 이랬나 봐." 하는 다정한 시선이었죠. 이렇게 말하면서 저를 발견합니다. 저 역시 안과 밖을 구분하는 사람이었네요. 밖에 대한 경계심이 지금 제가 여전히 낯을 가리는 성향을 굳건히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생각해 보니, 자신(self)에 대한 궁금증은 현재의 '나'그 자체였는데, 타인에 대한 궁금증은 '왜'였어요. 아마도 '나'는 익숙한 대상이라 잘 안다고 생각했을까요? 우리는 자주 보면 잘 안다고 착각하곤 하잖아요. 익숙한 것과 그 대상을 잘 아는 것은 다른 것인데 말이죠.' 나는 왜 이런 선택을 했지?', '나는 왜 그때 그렇게 말했을까?',  '내 생각은 왜 이렇게 걱정과 불안 쪽으로 향하지?'와 같은 수많은 '왜'들에 나는 답할 수 있을까요? 확실한 답이 어려워요. 아마도 나를 낯설게 만나는 어색한 시간이 필요할 거 같아요.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이런 '왜'를 궁금해했다는 건 참 다행이에요. 그는 인간을 쾌락을 탐닉하고 욕망하는 존재로 보았죠. 그 욕망과 쾌락의 주된 에너지를 리비도(libido)라는 성적 에너지에 집중했지만 크게 보면 리비도를 인간 생존을 위한 본능적 에너지로 볼 때 저는 어느 정도 동의해요.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이로운 것에 좋은 정서를 느껴요. 좋은 정서는 그 행동을 계속하게 만들죠. 즐거운 유머와 대화가 오갔던 상대는 나중에 또 만나고 싶잖아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나중에 또 먹을 계획을 세우듯이 말이죠. 맹수를 만났을 때는 위협을, 상한 음식을 먹었을 때는 역겨움을, 나를 해하려는 상대에 대해서는 두려움을 느껴야 맞죠. 그래야 그 상황을 피하니까요. 그렇게 볼 때 성은 우리 인간의 생존과 진화에 너무나 이롭고 중요한 부분이잖아요. 따라서 무엇보다 큰 쾌락을 느껴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이 돼요. 우리에게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세팅되어 있는 디폴트값이라는 거죠.



  프로이트는 내 몸을 좀 더 낯설게 바라보았어요. 몸도 내가 맞죠. 그는 내 몸의 욕구가 얼마나 만족되었는지 또는 그렇지 못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고 보았어요. 내 성격은 내 마음에서만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거죠. 그는 인간은 어린 시절에 성과 삶의 에너지인 리비도가 신체의 특정부위에 집중되는 시기가 있고 성장에 따라 그 신체 부위가 몸에서 옮겨 다녀요. 그때 나의 리비도가 환경 속에서 얼마나 만족되었는지, 또는 거부당하거나 억압당했는지에 따라 성격이 형성된다고 보았어요. 내 욕구와 쾌락이 환경에서 수용되어 스스로 만족스러우면 성격이 원만해지는 거죠. 하지만 나의 본능적 욕구와 쾌락이 거부당하면 어떻겠어요? 당연히 고착화되는 거죠. 구체적으로 살펴볼까요?



  첫 번째 시기는 구강기예요. 리비도가 입과 그 주위에 집중되죠. 영유아는 살기 위해 젖병을 힘껏 빨아요. 뿐만 아니라 우리가 영유아를 보면 무조건 모든 물건이 입으로 가잖아요. 신기하기만 한 첫 세상을 입으로 탐색하는 거죠. 살고자 하는 에너지와 세상에 대한 궁금증이 입에 모인 시기에 빨기 욕구가 충분히 허용되는 경험을 했던 사람은 이후에 낙천적이고 명랑하며 미식을 즐기는 여유로운 성격을 가진 사람이 된다고 해요. 하지만 이때 빨기 욕구 좌절이나 과도한 충족을 경험한 사람은 과식이나 과음, 타인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나 비판적 논쟁을 하는 성격을 형성한다고 봅니다.



  두 번째 시기는 리비도가 항문으로 이동을 해요. 영아들은 배변활동이 내 몸에서 무언가를 창조하는 일로 여기기도 한대요. 개인적으로 배변활동은 삶의 질을 달라지게 하는 아주 사소하고 중요한 요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화장실은 다녀오기 전과 후가 정말 다르잖아요. 다녀오기 전에는 초조하고, 배가 불편하지만  화장실을 잘 다녀오면 안도감과 쾌감을 느끼죠.



  그런데 배변은 사회적으로 통제가 이루어져야 하잖아요. 배변은 정해진 장소에서 해야 하고, 남에게 보여서는 안 되고, 깔끔하게 처리해야 하고요. 내 개인이 쾌락을 느끼는 일인데, 사회적으로는 부끄러운 일이라고? 이 이상한 상황이 우리는 자연스럽지만, 처음에 경험하면 어떻겠어요. 영유아들도 배변활동을 하면 쾌감을 느끼는데, 이걸 통제받는 상황을 처음 경험하는 거죠. '어? 이렇게 기분이 좋은 일을 했는데 엄마랑 아빠는 냄새가 난다고 하고, 치우고, 마치 없었던 일처럼 부끄러워하네!' 하며 내가 창조한 무엇이 부끄러워지는 이상한 상황을 받아들여야 하는 거예요. 혼란스럽죠.



  이때 배변훈련을 아이가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완곡하게 이루어지면 창의적이고 삶에 만족하는 성격이 형성된다고 해요. 하지만 너무 엄격한 배변훈련을 받은 아이는 이후 고집이 세거나 규율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완벽주의적 성격을 갖게 된다고 합니다. 반대로 너무 느슨한 배변훈련을 받은 아이는 낭비를 하거나 주변 정리가 잘 안 되는 지저분한 성격을 가지게 된다고 해요.



  세 번째 시기는 리비도가 남근에 집중돼요. 실제 이 시기에 남자아이들은 목욕을 할 때 성기를 만지는 모습이 보이곤 해요. 이미 사회화된 부모는 자녀가 성기를 만지는 모습에 당혹스럽죠. 다행히 배변훈련이 잘 된 아이는 내가 좋더라도 사회적으로 모두 표현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이해했을 거예요. 세상 살기가 참 쉽지 않아요, 그렇죠? 그런 식으로 이해시켜 주는 게 좋다고 해요. 너무 놀라서 "이러면 안 돼!" 하면 수치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내 몸은 개인적인 부분이라는 것, 그리고 위생과 관련해서도 알려주면 좋겠죠. 유아기에 성장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사람은 가족이고 부모이죠.



  남근기를 통해 어린이들은 남녀 성의 구분된 역할과 특징을 동일시해 나갑니다. 이때 남자아이들은 그 유명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를 경험합니다. 남자아이들이 갖는 성적 욕망은 이성인 엄마를 향한다고 해요. 하지만 아빠라는 크고 힘이 센 존재가 있어 아이는 아빠를 이길 수가 없다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가지게 됩니다. 이 콤플렉스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남자아이들은 아빠를 동일시하며 남성다움을 발달시킨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주양육자는 엄마잖아요. 남자아이들은 엄마중심의 세계에서 이제 아빠라는 남성이 중요한 존재로 부각이 되는 거죠. 이때 마찬가지로 여자아이들은 엄마를 동일시합니다. 이때 비로소 남자아이와 여자 아이는 각자의 성역할을 학습하게 됩니다. 이렇게 남근기에 부모의 권위와 남녀의 역할을 유연하게 학습하는 게 중요하죠. 하지만 그렇지 못했을 때 과시적이거나 공격적이고 경쟁적인 성격을 형성하기도 합니다.



  사실 콤플렉스(complex)라는 용어를 현재의 의미로 가장 먼저 사용한 카를 융은 이에 반대하는 의견을 보이죠. 융이 볼 때 성역할은 콤플렉스에 의해 형성되는 건 맞아요. 그 양상이 다르죠. 우리는 살다 보면 내 남편은 참 시아버지 같고, 저는 친정엄마랑 비슷해져 간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죠. 융이 보기에 우리는 어릴 적에 무의식적으로 동성부모를 좋아하면서도 비판해요. 하지만 차마 표현은 못하죠. 부모라는 큰 산인 데다 부모를 비판하는 건 사회에서 용인되지 않는 정말 나쁜 행동이잖아요. 이렇게 동성부모의 비판에 대해 억압된 무의식은 콤플렉스를 형성하고, 자아는 이를 견디지 못하게 되면서 나의 콤플렉스와 자아는 동일시(identification)됩니다. 사실상 자아가 콤플렉스의 아래에 놓이게 되는 거죠. 그래서 문득 내 행동에서 내가 그렇게 싫어하고 비판하고 반발했던 부모의 모습이나 사고방식을 발견하게 된다고 합니다. 내 눈앞에 보이지 않는 무의식은 참 힘이 세요.  



  프로이트는 이후 학교에 입학하여 친구 및 학교생활을 하고 성적 욕구가 없는 평온한 시기인 잠복기를 설명합니다. 이때는 사회적 관계가 부모중심에서 친구, 학교를 중심으로 확대되죠. 이때 학업과 신체활동에 많은 에너지를 쓰게 됩니다. 따라서 도덕성이나 사회적 관계 기술 형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다양한 신체활동 및 체험을 권유하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생식기입니다. 사춘기가 되면 다시 리비도는 성기로 향합니다. 이제 또래 이성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이 최고조에 달하죠. 이때는 단순한 쾌감보다는 사랑이라는 추상적 개념에 대한 탐색이 이루어집니다. 이 시기에 형성된 원만한 이성관계에 대한 개념은 이후 원숙한 사랑, 이타적 관계를 이루는 토대가 되어줍니다.



  프로이트는 이렇게 '왜'라는 질문에 대답을 해줍니다. 아, 내가 지금 손톱을 물어뜯고, 비판적인 이유는 어릴 적에 빨기 욕구 충족이 되지 않아서였구나. 하고 나와 타인의 행동을 이해하게 해 주죠. 우리는 이해하고 이해받고 싶어 하잖아요. 그런 점에서 프로이트의 덕을 우리는 자주 봅니다. 그래서 여전히 그는 심리학의 슈퍼스타 중 한 명인 게 확실해요.



  물론 프로이트의 이론은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인간을 무의식적 욕망, 특히 성적 충동이 마구잡이로 충동질하는 데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존재로 보는 건가. 우리는 빛나는 이성을 가진 존재인데! 하는 거죠. 그리고 인간은 전생애적으로 발달한다는 견해에서 보았을 때도 이 이론은 한계가 있죠.



  그럼에도 이 이론은 흥미로워요.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욕망이 우리의 몸에 집중되는 시기에 해당 욕망이 얼마나 충족되었느냐에 따라 우리의 성격을 설명합니다. 참 재미있죠. 성격은 내가 타고난 본성과 환경과의 상호작용으로 형성된다고 볼 때, 내 몸은 너무나 정직한 내가 맞잖아요. 성격은 무의식이 발현된 내 몸의 움직임이 세상에 얼마나 받아들여졌느냐, 그렇지 못했느냐에 따라 다르게 형성되었는데, 그 성격은 또다시 세상과 만나게 돼요. 내 성격 중 어떤 아이는 세상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서 내 강점이 되어 나를 빛내주고 있을 게 분명해요. 덕분에 내가 좋은 사람들과 좋아하는 일을 해가며 내 삶을 좋아하는 쪽으로 당겨보는 거겠죠.



  하지만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못한 내 욕망과 쾌락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어릴 땐 부모에게 차마 드러내지 못했지만 이젠 세상에 드러내지 못하는 나의 욕망과 쾌락도 내가 맞는데 말이죠. 나도 긍정적이고 싶지 누가 비관적이고 싶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동적으로 비관적인 말을 하고 손톱을 뜯는 나는 내가 봐도 꼴 보기가 싫어요. 누가 그러고 싶어서 그러나요. 나도 근사한 사람이고 싶죠.



  이제 프로이트를 만났으니 문득 억압된 본질이 담긴 내 존재의 블랙박스가 나를 두드리는 순간이 오면 이제는 더이상 외면하지 않고 바라봐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동안 숨어 지내야만 했던 그 안쓰러운 나에게 고생했다며 손을 잡아줄거예요.



  가끔은 어린 시절의 나를 불러 다독여줘야 할지도 몰라요. 내 욕망, 또는 내가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고. 그때 어쩌면 환경이 미숙했을 수 있다고. 누굴 탓하지는 않아요. 모두의 최선이었지만 내가 세상과 만나는 방식이 어색했을 수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때의 어린아이가 아니니까 나에겐 힘이 있다고 용기를 줄 거예요.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고. 세상에 낯설던 어린 시절보다 나는 지금 내 목소리를 가진 어른이 되었다고 말이에요.



  어떤 때는 지금 내가 마음에 안 드는 성격을 좀 더 나긋나긋한 시선으로 보고, 보드라운 손길로 만져줘야 할 때도 있을 거예요. '손톱을 뜯는 나를 보니 지금 내가 불안하구나. 뭔가 불편하구나. 괜찮아. 괜찮아. 심호흡을 해봐.' 하고요. 방법은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고. 주변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 글로 내 마음을 정리해보기도 하고, 쓸데없는 농담 따먹기를 하며 마음을 가라앉혀보라고 말해줄 거예요. 그러다 보면 가끔은 지금의 내 꼴 보기 싫은 성격 덕을 보았던 경험이 떠오르기도 할 거예요. 저는 낯을 가리는 탓에 예의바르다는 말을 듣기로 했거든요. 그렇게 나에게 좀 더 너그러워질 거예요. 그리고 너에게도 그럴 거예요.




  프로이트를 만나 지금 내 성격에 대한 '왜'의 질문에 답을 하다 보니, 내가 더 선명해져요. 감사할 사람도 생각이 나고, 멋진 내 모습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 세상과 처음 만나 신나면서도 불안했던 내가 짠하기도 하고요. 그 모든 모습은 다 내가 맨몸으로 세상을 만나 만든 내가 맞아요. 그런 나라면 내가 나에게 한번 더 따듯한 눈길로 쳐다봐주고, 한 번 더 안아주고, 자랑스러워하고, 다독여줘야 하는 게 맞아요. 가끔 노크하는 내 무의식에게도 귀 기울여줘야 하고요.



  어린시절의 내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듯이, 지금의 나는 미래의 나를 만들어요.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 사이에 균형을 잡는 현재의 나는 그래서 참 근사한 어른이예요. 어린 나를 애정어린 시선으로 봐주고, 현재의 나를 지켜보고 격려해줄 수 있잖아요. 그렇게 미래의 나는 더 나아질 게 분명해져요. 오늘의 나는 나를 챙기는 기쁜 바쁨의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어떤 시간도 이보다 중요할 수는 없아요. 나를 키우는 발걸음이 바쁘게 땅에 닿을때마다 내 마음은 더욱 웅장해져가거든요. 그 느낌은 소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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