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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윤 Jun 05. 2023

내가 나의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될수도 있지

  주말 저녁이 되면 한없이 느슨해진 마음이 몸에 그대로 반영이 된다. 이미 볼까지 내려간 눈꼬리와 3 음계정도 올라간 목소리 톤에 팽팽한 긴장은 없다. 가벼운 발을 가진 덕분에 발걸음도 명랑한데 이 발엔 고단한 일주일의 흔적도 없다. 책임으로 가득한 공간에서 무책임의 공간으로의 이동은 이렇게나 가뿐하다.



  아침형 인간인 남편과 아이가 잠든 금요일 밤. 나는 이제 시작이다. 냉장고에서 차가운 맥주를 꺼낸다. 맥주란 마치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존재했던 것 같다. 새우깡, 하리보젤리, 양심상 매우 약소한 과일을 들고 TV방으로 간다. 간결한 리모컨 터치로 TV를 켠다. 등에 쿠션을 세팅하고 소파에 다리를 쭉 뻗어 길게 누워 맥주 한 모금을 마시고 새우깡을 하나 먹는다. 어쩜 이 조합은 늘 같은데도 매번 새로운지! 클래식은 영원함을 새우깡 앞에서 다시 한번 느낀다.



  TV속 예능프로그램에 눈길 한번, 손에 들려있는 휴대폰에 눈길과 손길을 여러 번 둔다. 어느새 TV는 BGM이 된 듯하다. 그러다 TV의 한 장면이 눈에 들어오면 그때는 또 TV를 본다. 이런 나를 보고 남편은

  "휴대폰을 보는 거야, TV를 보는 거야?"하고 묻지만 나는

  "하고 싶은 거 하는 거야. 내 맘대로."




  일주일 동안 나는 해야 할 일을 성실히 해왔다. 그런 날들을 보내다가 금요일 밤이 왔지 않나. TV를 보든 휴대폰을 보든 아무렇지도 않다. 이 순간 나는 이 시간의 파쇼다. 나 하고 싶은 거 다 해! 이 금요일 밤의 사치를 나는 두 다리 쭉 뻗고 음미한다. 지금 이 순간의 가벼움과 나른함을 온몸으로 겪어낸다.



  사실, 주말의 기대로 잠시 덮었을 뿐 내 몸 곳곳에는 지난 일주일의 고단함과 피로가 곳곳에 배어들어있다.     '고생했어. 애썼어.'

내가 느꼈던 고단함도, 내가 미처 살피지 못했던 수고도 모두 알아봐준다. 내가. 내 몸 곳곳에 자리잡은 내 수고를 쓰다듬어준다. 매일 열심히 타자를 쳤을 내 손가락, 어떻게든 버텼던 내 허리, 찌릿한 통증을 당연한 듯 여겨왔던 목과 어깨를 자랑스러우면서도 안쓰러운 눈길로 알아봐준다. 동시에 나의 맥주도, 새우깡도, 젤리도 나를 자극적으로 다독여준다.



  자정을 향해가는 시간, 이제 늘어진 허리를 다시 세울 시간이면 아주 대단한 고민이 시작된다.

  '내일 치울까. 귀찮은데. 그냥 일어설까.'

  작은 테이블에 놓인 맥주 1캔, 과자봉지, 접시와 포크를 그대로 널브러뜨린 채 몸만 이 방을 가뿐히 나가고 싶다.

  '나는 지금 한 없이 나른하지 않나! 하고 싶은 일로만 가득한 시간인데, 지금 이걸 치워야 한다고!?'

  '그만 성실하자.'

  '나 지금 충분히 보헤미안인데?!'

마음속에 반항심이 가득 몰려온다. 아니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뭐뭐.



그러다 한 가지 생각 앞에 내 반항은 억울한 뒷모습을 남기고 굴복하게 마련이다.

  '내일의 나에게 미루지 말자. 오늘의 내가 싫은 건 내일의 나도 싫어해.'

그렇게 호기롭던 내 욕구와 반항들은 어느새 왼손에 빈 맥주캔의 중앙을 눌러 접고, 오른손엔 접시와 포크 위에 딱지모양으로 접은 과자봉지를 들고 조심스레 부엌으로 간다. 한 번에 옮기겠다는 내 게으름은 반항심을 거둬들인 데에 마지막 자존심이다. 반드시 한 번에 가겠다.



   귀찮음을 살살 달린 대가로 나는 내일의 내가 게으른 아침을 시작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 주었다. 내일의 나는 천천히 일어나 말끔히 치워진 부엌에서 아홉 살과 오롯이 오늘의 아침을 음미할 것이다. 어제의 흔적 따윈  없는 오늘만의 시간을 가지는 호사.



  오늘의 나는 지난 시간의 고단함을 잘 어루만져주고, 반항하는 내 투정도 받아주고, 내일의 아침까지 준비해 주었다. 여기까지 했으니 오늘은 다 했다. 나를 내가 아껴주었다. 이 순간 나는 내 엄마이고 아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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