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윤 Oct 23. 2022

김밥은 사랑을 싣고

  나는 유머 추종자이다.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선명한 말들은 모두 내 주변 사람들이 툭! 내뱉었던 유머의 말들이다. “나는 뒤태! 앞 퇘!잖아.”하고 아무렇지 않게 스스로를 말하는 친구는 그때부터 나의 스타! 나의 롤모델이다. 그녀는 나의 남편을 처음 본 날도 그랬다. 그날, 운동을 하고 나서 땀범벅이 되어 나타난 남편은 머쓱한 말투로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아, 하필 운동해서 땀범벅인데 처음 뵙네요.” 그녀는 그의 말에 툭. 이렇게 말했다.

“아, 평소엔 굉장하신가 봐요!”



  아! 아! 아! 왜 그녀가 하는 말은 다 괜찮을까? 나만큼 무표정하고 나만큼 낯을 가리는 그녀인데 왜 그녀가 하는 말은 다 괜찮지? 그리고 나도 저 단어 아는데! 나도 아는 단어가 그녀 입에서 나오면 그 단어는 생동감을 갖는다. 난 그 순간에 진심으로 바랐다. 나도 보통의 일상의 무게를 가볍게 툭 쳐주는 그런 유머러스한 사람이 되고 싶다. 내 한마디도 그런 가벼운 바람이면 좋겠다.       


    

  십 수년간 그녀와 대화하며 그녀의 참신한 단어와 문장들에 귀를 쫑긋 세워왔다. 몇몇 문장과 단어는 머릿속에 필기해두고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요때다! 싶을 때 써먹어보기도 했다. 승률은 꽤나 높은 편이었다. 그때의 쾌감이란! 자아실현의 꿈이 이런 것인가 싶었다. 그 쾌감의 뒷면을 모아본 어느 날, 오리지널을 카피해서 써먹어도 괜찮았던 걸 다시 생각해보면 그만큼 우리가 지내는 보통의 날들이 얼마나 건조한 곳인지가 보였다. 유머 한 방울이면 마른 화분도 이내 촉촉하고 부드러워질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 가벼운 행동이 어색함과 건조함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사람. 그런 작은 교류의 순간을 내어줄 수 있는 여유와 유머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었다.           



  오늘은 그럴 수 있는 날이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가득한 오늘, 아이가 가을 소풍을 가는 날이기 때문이다. 주방엔 남편이 마련해놓은 알록달록한 김밥 재료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주황의 채 썬 당근과 초록의 시금치는 참기름을 살짝 먹어 반들반들하다. 살짝 볶아둔 기다란 햄과 생생한 빨강 하양 맛살의 짭조름함이 이미 입에 가득 닿는 듯하다. 그 옆에 수분 가득 머금은 가벼운 노란색 단무지와 빳빳하기 이를 데 없는 갈색의 우엉도 한 자리 조신하게 차지하고 있다. 특별히 백미로 지어 놓고 소금과 참기름 깨소금 간을 해둔 하양 밥과 단정한 검은색 김, 그리고 내가 가장 중점을 두는 보름달만큼 커다랗고 둥근 노랑 달걀지단도 놓여있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내가 돌돌돌 김밥을 말 차례이다.     


      

  반듯한 검은색 김의 우둘투둘한 면을 놓고, 하얀 밥을 최대한 얇게 편다. 그 위에 김만큼 크고 둥근 노란 달걀지단을 올리고, 베이지색 햄, 빨강 햐양 맛살, 노랑 단무지, 갈색의 우엉을 툭 올린다. 그다음 초록 시금치를 가지런히 펴서 일렬로 정돈하고 잘게 채 썬 주황 당근을 재료 위에 눈 내리듯 쌓는다. 그 재료를 달걀지단으로 먼저 동글게 말아둔 후, 김으로 다시 한번 돌돌 말면 완성이다. 그렇게 노오란 달걀지단을 품은 김밥 꽃이 하나둘씩 완성되어간다. 이미 온 집에도 내 마음에도 꼬순내가 솔솔 풍겨 난다.           



  먼저 빨간색 아이 도시락 통을 꺼내 김밥을 하나씩 가지런히 넣는다. 맛살을 싫어하는 나의 여덟 살의 김밥엔 맛살 대신 볶음 멸치가 들어가 있다. 좀 더 고소하겠지. 좋은 날엔 점심도 좋아하는 것으로 담는다. 김밥 옆 칸엔 가을을 닮은 주황 태추 단감을 깎아 절반을 담고, 역시나 주황의 감귤을 넣었다. 목 멕히면 하나씩 시원하게 먹으렴.           



  아이의 도시락에 김밥을 한 알씩 넣어 채워지는 만큼 엄마의 마음이 고소하게 채워진다. 아이는 아무렇지 않게 도시락 통을 열고 한 알씩 김밥을 먹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그 자연스러움을 위해 엄마와 아빠는 새벽부터 일어나 색색의 재료를 하나하나 손질해서 김밥을 만들어냈다. 자연스럽기 위한 일에는 참 많은 수고들이 모여있다. 그 수고들은 결국 그 일을 잘 해낸, 그래서 그 일을 잘 아는 사람들에게만 뿌듯함으로 경험된다. 다만 한 가지를 바란다. 아이는 그 도시락을 가볍게 받아 가볍게 향유하기를! 노는 일에 한껏 열중해야 할 소풍의 날에 노는 일과 노는 일 사이에 가벼운 징검다리가 놓인다면 그 순간 이 도시락이 힘이 되어주기를. 가벼운 도시락을 가방에 넣어 학교를 가는 아이는 걸음도 가벼워 뛸 수밖에 없나 보다. 오늘은 그런 날이다.          


  오늘을 위해 준비한 하얀 일회용 도시락을 꺼내어 접었다. 하나는 우리 집 김밥을 참 좋아하는 친구를 위해, 하나는 늘 내가 닮고 싶어 하는 아는 언니를 위해, 마지막 하나는 오늘도 분주한 하루를 보낼 엄마를 위해. 동그란 김밥 한 알 한 알을 넣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예뻐 보일까 고민했고, 몇 개정도 넣어야 부담스럽지 않고 딱 맛있게 먹을 수 있을까 하며 개수를 고민했다. 그리곤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출근하지? 오늘 주윤이 소풍이거든. 내가 새벽부터 일어나서 김밥을 쌌지 않겠어? 아주 허리가 톡 끊어지려는 걸 겨우 붙였잖아. 오늘 나 강의 끝나고 지나가는 길에 들러서 하나 주고 갈게.”

  “우와! 정말! 나 너네 김밥 진짜 좋아하잖아. 완전 좋지. 내가 정말 행복한 여자다.”

친구의 환한 목소리에 내 마음이 더 환해져 마음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언니, 오늘 아이 소풍이었어요. 제가 어매라, 또 새벽부터 이렇게 김밥 쌌잖아요. 가볍게 드세요.”

  “엄마, 주윤이 소풍이라 김밥 쌌거든. 강의 가는 길에 주고 갈까?”



배달을 하러 가는 길, 서늘한 10월 말임에도 나는 행여 차 안의 온도가 높아 김밥 맛이 변할까 싶어 창문을 살짝 열고 운전을 한다. 살랑살랑 가볍게 부는 가을바람이 내 김밥을 살살 달래주기를 바라며 차 안에 최대한 그늘 진 곳에 쇼핑백 3개를 놓고 달린다.           



  엄마와 친구에게는 드라이빙 쓰루 딜리버리였고, 아는 언니는 근무하는 사무실 문을 똑똑하고 잠깐 건네드린 덕에 우리가 만난 시간은 1분 여가 채 되지 않았다. 보통의 목요일을 보내고 있었을 텐데 불쑥 내가 들른 1분 정도의 가벼운 시간이 그녀들에게는 어땠을까? 나는 그 1분 들마다 유난히도 화사했던 오늘의 가을 햇살이 내 마음에도 내린 듯했다. 돌아오는 길, 나는 그녀들이 도시락을 열고 한 알씩의 알록달록한 김밥이 입에 담긴 순간, 일상에 유머러스한 물 한 방울씩이 김밥을 닮아 화사하고 촉촉하게 전해지기를 바랐다.      


     

  나도 집에 와서 김밥을 썰어 한 알씩 먹었다. 유난히 마음도 부르고 배도 불렀던 오후가 분명했다. 그리고 나도 나의 일상으로 돌아와 다음 날 수업 준비를 하는 보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버님께서 편찮으셔서 내내 간호를 하다가 이제 막 출근했었어. 네 김밥이 힘이 되어주고 있어. 고마워...”

아는 언니가 메시지에 내 마음이 뭉클해졌다. 고작 김밥 하나가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었나 보다. 어쩌면 우리는 이렇게 작디작은 마음들에 위로받고, 크게 기뻐할 수 있는 여린 사람들인가 보다.       


    

  주윤이의 소풍이 마치 기념일 같다. 평소에 전하고 싶은 고마운 마음을 기념일이라는 핑계로 가볍게 툭 건네듯, 주윤이의 소풍 덕분에 김밥을 싸서 내 마음을 전한다. 너무 부담스럽지 않게 너스레 한 움큼 급히 집어 얹혀서. 어쩌면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유머인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러러보면 개운한 목 스트레칭은 덤입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