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윤 Nov 30. 2022

두 마음들의 시소 타기

  아침형 인간인 남편이 방문을 연다. “일어날 시간이야!”

고마운 한 마디로 시작하는 아침. 오늘도 마땅히 아침이 시작되었다. 이젠 내 몸과 마음의 차례이다. 떠야 하는데 떠지지 않는 눈과 박차고 나가야 하는데 갑자기 이불을 잡아당기는 손, 그리고 나에게 찾아오는 여러 마음들. 그 시작은 날이 밝았다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더 자면 안 될까. 더욱이 오늘처럼 갑자기 추위가 찾아왔노라고 엄포를 놓은 날이라면 좀 더 이불속에 있으면 안 될까. 매일의 아침은 어제의 아침과 다르지만 어떻게든 이불 밖으로 최대한 더 늦게 나가고 싶은 꼼지락 거림의 마음은 한결같다. 어쩌면 이 마음은 내 아침의 문지기 인지도 모른다.           



  이윽고 옆에 누워있는 아이를 본다. 눈을 뜨지 못한 채 여전히 고요히 잠을 자고 있는 여덟 살 소년. 와락 오늘의 이 아침이 감사하다. 이렇게 우리, 서로의 건강한 새 아침을 함께 시작할 수 있다는 데에서 오는 다행. 이 순간만큼은 감사할 수 있는 모든 것들에 새삼 감사를 전한다. 이불속에 있어서 아직은 따듯한 내 손으로 아이의 이마를 어루만지고, 아이의 머리카락을 넘겨준다. 저녁까지 코감기에 얼굴이 파리하던 아이도 오늘 아침만큼은 혈색이 좋다. 아마도 푹 자서 감기가 누그러졌나 보다. 아이의 감기를 포근한 이불속에 보낼 수 있던 지난 깊은 밤에 감사하다. 아이가 감기를 이불에 놓고 새롭게 시작할 아침을 만나니 내 마음속 감사의 면적은 더 넓어진다.            



  말랑말랑한 감성적인 아침은 늘 현실의 성실하고 단호한 시계 앞에 힘을 잃는다. 이 순간부터는 ‘일어나야지’의 세계에서 ‘일어나야만 해’의 절대 당위의 세계에 도착한다. 아이의 머리를 느릿하게 넘겨주던 손은 이제 그 속도를 높여야만 한다.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고, 양치질을 하는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분주해진 손의 속도는 온기 대신 가벼운 서두름이 달려있다. 여전히 그 자리에서 성실한 시계는 급한 마음이 담긴 분주한 내 손의 움직임을 흡족해하며 그게 맞다고 뒤에서 밀어준다. 그래야 우리는 서로 안전하게 서로의 공간에 도착할 수 있다. 이불속 따듯하고 느린 손도 맞고, 지금의 분주하고 바쁜 손도 맞다.        


  

  느긋한 아침만을 바란 적도 있다. 분주한 아침을 바라는 마음은 늘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 평일 하루의 아침엔 언제나 이 둘이 함께이다. 덜 분주한 날은 좀 더 느긋했고, 어떤 날은 숨이 찰만큼 분주하기만 했다. 그 둘의 시소 타기만 있을 뿐 하나만 있는 날은 없었다.      


     

  사실 아침의 마음에만 두 마음이 공존한 것은 아니었다. 언제나 내 마음엔 앙숙들이 함께 소란스러웠다. 그때 언제나 영혼의 단짝, 합리화가 함께한다. 나는 나를 감추고 싶으면서도 좋은 부분만 골라서 드러내 보이고 싶어 한다. 일상을 기록하고 싶다는 합리화로 싸이월드, 블로그를 했고, 좋은 순간을 골라서 카카오톡의 프로필 사진을 바꾸곤 한다. 아! 지금도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친구를 만나면 좋아하면서도 일주일에 약속이 두 개 이상이 되면 부담스러워한다. 나와 다른 결의 친구를 만나 생각의 차이를 넘나드는 대화는 나의 생각에 창을 열고 환기를 시켜준다. 나와 다른 생각이 불어준 상쾌한 산소를 받아들이느라 활짝 귀를 열어둔 덕분에 나는 새로이 에너지를 합성한다. 다녀와서 오늘 인상깊은 대화로 합성한 신선한 생각을 남편에게 들려준다. 그러면 친구를 만나길 참 잘했다는 만족감이 부풀어 오른다. 아니, 타인과의 만남은 당위를 갖는다.



  그러다 이틀 연속 약속이 잡힌 주에는 만나기도 전에 피로함이 몰려온다. 갑작스럽게 내 일상의 키를 놓친 기분이 든다. 집에 혼자 않아 의미 없이 티브이를 보더라도 내 손으로 리모컨을 쥐고 싶은 마음. 근사한 장소에서 훌륭한 커피를 마시며 디저트를 먹는 것보다 우리 집 골방에서 사발면에 김치를 얹고 의미 없는 티브이 시청이 내 내면을 채워줄 것 같다. 하지만, 외출하면 그 순간 나는 호모 사피언스로서 친사회적 사람이 듬뿍 되어 돌아온다. 또 생각한다. 새로운 이야기들을 만났기에, 좋았다.      



  가장  괴리감은 게으르고 느린 행동과 급한  마음의 동등성이다.  둘은 어지간해서는 양보가 없다.    축은 각각  마음에 굳건히 자리 잡혀 있다. 마음은 테이블링을 걸어둔 식당 앞으로 숨이 차게 달려가야  만큼 바쁜데, 아름다운 오브제 앞에서 나는 남편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한다. 혼자 느긋함을  부린  느린 행동의 대가로  발은 도로 위에서 엑셀을 깊게 밟을 수밖에 없다. 그리곤 자주 아슬아슬하게 도착하고서는 합리화를 시작한다. '어떻게든  되게 되어있다니까.' 과정의 불안을 다행으로 포장하거, 뻔뻔함으로 리본도 묶어준다. 하지만 포장지 안에서 나만 알고 있는 급한 속도의 행동과 느긋한 속도의 마음이 한참을 벌려놓은 간극은 조용히 그 자리에 똬리를 틀고 있다. 덕분에 나는 자주 쫄리고, 반성하고, 다짐한다. 미리 준비해야지.                



  내 안에 상반된 두 마음들은 어느 하나가 질 생각이 없다. 단단히 자리 잡고 방을 뺄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저 내 삶에서 늘 시소를 탈 것만 같다. 어떤 날은 나를 보여주고 어떤 날은 나를 감출 것이고, 어떤 날은 혼자서 에너지를 모으고 어떤 날은 대화로 새 바람을 얻겠지. 아무리 마음에 안 들고 미운 날이 있어도 이 두 마음들 모두 다 나를 키워온 내 마음들이 맞다. 덕분에 어떤 날은 느려서 덕을 본 날도 있었고, 어떤 날은 느려서 자책한 날도 있었다. 그래도 둘 다 다독여서 잘 키워가야 할 내 마음들이다. 카를 융이 상반된 두 마음의 균형을 이야기했듯이 두 마음들의 시소 위에 두 다리로 튼튼히 서서 중심을 잡는 게 내 일이다.           



  이불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망설이면서도 새 아침에 감사했던 아침을 보내고, 이제 저녁이다. 고생했을 하루를 따듯하게 위로하는 것도, 오늘을 마무리하기 위해 아이는 숙제와 책가방을 싸고, 나는 식사를 준비하며 각자의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해내는 것도 이 저녁, 우리 집에 함께 공존한다. 다만 우리의 분주함이 따뜻함으로 한 겹 포근하게 감싸주기를 바란다. 분주한 서로의 과업에 격려를 한 겹 쓱 밀어 넣어주길 바란다. 그러면 오늘 저녁, 이 두 마음들의 시소도 썩 괜찮을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휴대폰, 그 은밀한 나의 버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